얼간이들 “밤비노, 편히 쉬소서”
  • 김병주 (메이저 리그 전문가) ()
  • 승인 2004.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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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86년 간의 저주 어떻게 풀었나
마침내 ‘밤비노의 저주’가 풀렸다. 무려 86년이나 된, 스포츠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뿌리 깊은 전설이 사라졌다. 무수한 화젯거리를 양산해내던 보스턴 레드삭스는 올해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0으로 돌려세우고 한 세기 가까운 좌절의 오명을 시원하게 벗어던졌다.

1918년 우승한 이후 당대 최고 스타 밤비노(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한 이래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한 레드삭스는 메이저 리그에서 좌절과 불운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왔다. ‘염소의 저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를 비롯해, 우승과 거리가 있는 팀이 여럿 있다. 하지만 레드삭스에 씌운 저주는 특히 높은 관심을 끌었다. 매번 우승 문턱에서 극적인 실책이나 불운으로 좌절했기 때문이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 선보인 광고들을 살펴보면 밤비노의 저주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실감할 수 있다. 한 어린 소년이 세월의 흐름을 따라 80대 노인이 되어 가면서 보스턴 홈구장인 펜웨이파크에 앉아 여전히 갈망하는 듯한 눈으로 타구를 좇는 나이키 광고, 레드삭스의 월드 시리즈를 위해서라면 두 달치 월급, 새 차, 심지어는 아내까지도 포기하겠다는 카드회사 광고 등이 보스턴 팬들의 좌절과 갈증의 역사를 대변한다.

1946년 페스키의 뒤늦은 홈 송구, 1978년의 ‘보스턴 대학살’, 1986년 버크너의 알까기, 2003년 애론 분의 끝내기 홈런까지…. 우승을 향한 마지막 길목에서 무너진 그들의 불운은 어지간한 국내 팬들에게도 상식처럼 회자될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월드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투수 앞 땅볼이 1루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레드삭스 팬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레드삭스 팬에게 같은 지구 소속인 양키스는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산과도 같았다. 이것이 저주의 시발점이다. 압도적인 우승 전통과 화려한 스타들, 넘치는 자금력은 오히려 감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늘 대등한, 때로는 우세한 전력을 갖고도 보스턴은 월드 시리즈를 향한 중요한 고비에서는 늘 양키스에게 무너졌다.
과감한 투자와 끈끈한 응집력으로 우승

저주를 풀기 위한 레드삭스의 노력도 대단했다. 루스의 손녀 등 루스와 관계 있는 사람은 모조리 불러 ‘저주는 없다’는 연설을 하게 하거나, 루스가 연못에 집어던졌다는 피아노를 찾아 건져내는 등 저주를 풀려는 그들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지난 9월에는 매니 라미레스가 친 파울볼에 맞아 한 소년의 이가 부러졌는데, 마침 그 소년이 과거 루스가 살던 집과 같은 주소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드디어 저주가 풀렸다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그만큼 절박했다. 이에 반해 양키스 팬들은 ‘저주론’을 앞세우고 양키스의 전통을 부각하려 애썼다.

불운의 팀 레드삭스가 올 시즌 양키스를 꺾고 우승까지 거머쥐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로는 메이저 리그에서 1995년부터 시행된 와일드카드 제도로 인해 천적 양키스에게 지구 수위를 놓치고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레드삭스는 지난 7년간 양키스에 밀려 지구 2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세 차례나 와일드카드를 통해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게다가 2001년부터 같은 지구 팀끼리 열아홉 번을 맞서는 일정으로 바뀌면서, 거듭되는 양키스와의 경기를 통해 큰 경기에 익숙해졌다. 특히 양키스가 자랑하는 ‘철벽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에 대한 자신감이 배가되었던 점이 양키스에 역전승을 거둘 수 있는 힘이었다.

둘째는, 3년 전 팀을 인수한 구단주 존 헨리 등 새 구단 수뇌부의 물량 공세다. 헨리 구단주는 양키스 구단주와 신경전을 벌여가며 팀의 상품성을 극대화했다. ‘밤비노의 저주’도 팬들을 결집하는 좋은 매개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유 계약을 앞둔 선수들에게 ‘저주를 풀어달라’는 동기 부여와 함께 막대한 물량을 퍼부어 이번 시즌에 올인했다.

통계와 숫자를 중시하는 매트리션파인 엡스타인 단장은 지난해 실패를 교훈 삼아 정규 시즌보다 단기전 준비에 열중했다. 변수가 많은 단기전 승부에 필수인 특급 투수 커트 실링과 견실한 마무리 키스 포크를 영입했는데, 결국 이들이 저주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팀의 상징이던 노마 가르시아파라를 시즌 중에 트레이드하고 받은 카브레라·민케이비치·로버츠 등 알찬 보강 멤버들도 고비마다 자기 몫을 하며 빛을 발했다.

셋째는 지저분한 머리와 수염, 자유분방하고 소란한 선수들의 개성을 존중함으로써 광기 어린 보스턴 언론과 팬들의 압박에서 숨통을 틀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 점이다. 보스턴에는 유독 장발과 텁수룩한 수염을 가진 선수들이 많다. 양키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단면이다. 선수들은 스스로를 ‘얼간이들’이라고 칭하며 저주와 우승에 대한 부담을 털어버렸다. 끈끈한 응집력으로 선수들은 공포의 타선을 구축했고, 지난 시즌을 마치고 쫓겨날 뻔하며 수모를 겪었던 주포 라미레스는 월드 시리즈 MVP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다면 86년에 걸친 레드삭스의 좌절과 눈물의 저주는 완전히 풀린 것인가. 분명한 것은 수많은 언론과 호사가 들로 인해 굳어진 레드삭스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수십 년간 메이저 리그 최고의 흥미를 모아왔던 ‘저주의 팀’ 레드삭스의 정체성도 전환기를 맞았다. 실제로 저주설이 레드삭스에 대한 맹목적 애정과 관심 그리고 동정심의 원천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고유의 정체성으로 인해 수많은 부동층 팬, 심지어 국내에서까지 압도적 응원을 받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긋지긋한 저주를 떨쳐냈지만 레드삭스만의 매력 역시 잃게 된 것이다. 만났다 하면 저주를 들먹이던 뉴욕 팬이나, 뉴욕만 만나면 적개심을 불태우던 보스턴 팬. 늘 쓰라린 좌절을 감수해야 했던 보스턴 팬들에게 그 저주가 패배를 부정하기 위한 ‘방패’였다면,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애써 감추며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뉴욕 팬들에게 저주는 그들의 식은땀을 감추는 ‘가면’이었을 뿐이다. 이제 그 오랜 방패와 가면을 벗어 던지고 두 라이벌은 새롭게 맞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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