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멋진 ‘길’은 없다
  • 글·사진 이용한 (시인) ()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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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눈 구경을 하려면 마땅한 시기에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자연 속에 발을 깊이 들여야 한다. 곳곳에 길이 나고 산이 파헤쳐져도 다행히 비밀스럽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과 길이 있다. 그곳에서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법수치와 면옥치
외나무다리와 설피의 추억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거긴 못 들어갈 거요.” 어성전에서 만난 구멍가게 아저씨는 잔돈을 거슬러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나는 가기로 했고, 결국 40cm 정도 쌓인 눈 위에서 설설 기었다. 원시 그대로의 청정 계곡이 실타래처럼 흐르는 곳. 법수치 계곡은 가장 깨끗하고 비밀스런 골짜기로 알려져 있는데, 그만큼 가는 길도 멀다. 법수치 마지막 마을까지는 현북면 어성전에서도 구불구불 30리가 넘는다.

법수치 계곡에는 운치 있는 통나무 다리가 있다. 이 통나무 다리는 계곡의 중간쯤에 버팀돌을 쌓아놓고 깎아서 만든 통나무 두 개를 양쪽에 질러놓은 외나무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그 통나무가 끝나는 곳에는 다시 징검다리를 몇 개 놓아 통나무 다리와 연결해 놓았다. 비가 많이 올 때면 떠내려가기 십상이어서, 해마다 서너 번씩 다리 놓는 일을 반복한다. 이런 나무 다리는 어성전에서도 볼 수 있는데,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개울에 자연적으로 솟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 통나무 여러 개를 지그재그로 놓아 하나의 다리로 연결한 모양새다.

어성전 삼거리에서 왼쪽 길은 법수치, 오른쪽 길은 면옥치로 이어진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두메 마을 신세를 면치 못했던 면옥치는 이제 길을 넓혀놓아 눈이 내린 뒤에도 접근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면옥치는 윗면옥치와 아래면옥치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집들은 아래면옥치에 있다.

남대천의 발원이 되는 면옥치천은 윗면옥치에서 시작된다. 아래면옥치에서 윗면옥치까지는 2km도 되지 않아 겨울철에 눈 트레킹을 하기에 더없이 좋다. 윗면옥치에서 처음 만나는 집은 질박하고 살가운 흙집이다. 흙집 주인은 선글라스를 낀 노인(서종원·66세)이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혼자 아궁이에 불을 때고, 당귀며 삼지구엽초 같은 약초를 뜯는다.

“요새도 이 설피를 신나요?” “그럼요. 여기서는 살(설)피 없으면 댕기덜 못해요. 여긴 눈이 워낙에 마이 오는 데라서. 요번에는 무릎 밑에까지 왔는데, 지난번에는 허리까지 눈이 온 적도 있어요. 그러니 이 살피가 절대적으루 필요하죠 뭐.” 그는 이날 낮에도 설피를 신고 마실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설피는 눈밭에서 신는 둥근 덧신이다. 옛날 강원도나 경북의 두메에서는 한번 폭설이 내리고 나면 보름 넘게 길이 끊겨 싫든 좋든 고립무원 생활을 할 때가 많았다. 이때 산마을 사람들은 설피를 신고 마실을 다니거나, 꿩 사냥이며 토끼몰이를 했다. 그냥 다니면 눈에 푹푹 빠질 곳도 설피를 신으면 조금밖에 빠지지 않아 이동이 자유로웠다.

설피를 신을 때는 신발을 신은 채로 덧신는데, 모양은 타원형으로 보통 신발보다 서너 배쯤 크다. 바닥에는 발받침을 대거나 얼기설기 삼끈을 팽팽하게 매서 신발이 눈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한 뒤 그는 주섬주섬 설피를 챙겨 신고 마실을 나섰다. 보아하니 봉당에 있던 지게 작대기가 그의 지팡이였다. 강아지 여덟 마리가 노인의 뒤를 줄레줄레 따라나섰다.

■가는 길/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양양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가 7번 국도를 따라 올라간다. 양양읍에 이르러 남대천 줄기를 따라 가는 지방도(어성전 방면)를 따라 가면 어성전이 나온다. 어성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법수치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면옥치다. 숙식 시설은 오색지구와 낙산에 몰려 있지만, 법수치 계곡에도 민박집과 펜션(‘흐르는 강물처럼’ 033-673-0941)이 많다. 양양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낙산사가 나온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봉산리에서 월정사까지
고요한 숲, 적막한 ‘투방집’


폭설 그친 산중에 새소리가 그득하다. 봉산리로 가기 위해 눈길을 달려 발왕재를 넘는다. 박지산(1391m)과 발왕산(1458m), 두루봉(1226m) 같은 고봉에 둘러싸인 봉산리(봉두고니)는 그야말로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두메 마을이다. 발왕재 길은 비교적 험한 산세에 비해 나쁘지 않은 편이어서 승용차로도 넘을 수 있지만, 눈이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세찬 바람에 길의 우묵한 곳마다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자칫 차를 눈 웅덩이에 빠뜨릴 수 있다.

험한 눈길을 간신히 달려 봉산리에 이르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을에서 처음 만난 권분하 할머니(74)와 최양순 할아버지(80)는 추운 날씨인데도 마당에 패놓은 장작들을 장작더미로 옮기고 있었다. 마당 왼편으로 보이는 돌비탈 산자락에는 빼곡하게 들어찬 토종 벌통이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겨울 봉산리의 집들은 대부분 비어 있다. 본래 열 가구도 살지 않는 곳이지만, 그마저 추수철인 가을이 지나면 짐을 챙겨 봉산리를 떠나기 일쑤다. 폭설이 내리면 곧잘 고립되기 때문이다. 봉산리의 집들은 대부분 ‘흙집’ 아니면 ‘투방집’이다. 투방집이란 통나무를 어긋어긋 치쌓아 흙고물로 벽 막음을 한 귀틀집인데, 천장의 높이는 사람이 간신히 드나들 정도로 낮다. 과거 투방집 지붕은 짚이나 겨릅을 해 얹었으나, 지금은 모두 함석을 얹어 놓았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수령 수백 년이 넘는 성황나무(전나무)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에는 성황나무만큼이나 신성한 당집이 서 있다.

봉산리가 있는 진부에 왔으니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를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좋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운치 있는 숲길로 알려진 전나무 숲도 월정사에서 만날 수 있다. 경내에는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과 보물 제139호인 석조보살좌상을 비롯한 문화재가 있으며, 월정사에서 계곡을 따라 9km를 오르면 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상을 모신 상원사가 나온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는 겨울이면 인적이 드물어 모처럼 호젓하고 여유 있어진다.

■가는 길/봉산리에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진부까지 가서 진부에서 405번 지방도로를 탄다. 거기서 정선 쪽으로 가다가 신기리에서 다리를 건너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박지산 모래재와 발왕산 발왕재를 넘는다. 진부에서 1시간 30분. 오대산 월정사에 가려면 영동고속도로 진부 인터체인지로 빠져나가 6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다 좌회전,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숙박과 식사는 진부나 오대산 가는 길에 해결하는 것이 좋다. 오대산 관리사무소 033-332-6417, 033-332-6494.
강원도 영월 서강
순결하고 애절한 풍경과 상처


휘휘 똬리를 틀어 산자락을 에도는 주천강에 들자 희끗희끗 눈발이 흩뿌린다. 산자락과 강자락이 섞이고, 나무와 바위가 뒤엉켜 절묘한 풍경을 이루는 ‘도원’을 지나자 눈에 덮인 ‘무릉’이 펼쳐진다. 요선정이라는 정자를 사이에 두고 위쪽은 도원리이고 아래쪽은 무릉리인데, 둘을 합쳐 무릉도원이라 부른다. 무릉과 도원의 경계에 자리한 요선정에는 현재 마애불과 석탑이 남아 있으며, 그 아래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뒤엉킨 요선암이 돌출해 있다. 주천강은 바로 이곳의 무릉도원을 지나고, 주천을 거쳐 평창강과 한몸을 이루어 태깔 좋고 맵시 있는 서강이 된다.

서강으로 흘러드는 주천강 주천리에서는 섶다리를 쌍으로 질러놓은 쌍섶다리를 만날 수 있다. 주천의 쌍섶다리는 그 유래가 깊다. 3백여 년 전 조정에서는 원주에 부임하는 강원 관찰사로 하여금 단종이 묻힌 장릉을 참배토록 하였는데, 이때 주천강을 사이에 둔 주천리와 신일리 사람들은 쌍섶다리를 놓아 장릉 참배에 나서는 관찰사 일행을 도왔다.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월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쌍섶다리 놓기는 단종을 기리는 의식이요, 마을 공동의 축제였다.

주천리에 쌍섶다리가 있다면, 주천에서 고갯마루를 넘어가 만나는 판운리에는 외섶다리가 있다. 솔갑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섶다리는 똬리 틀 듯 마을을 휘돌아나가는 평창강 줄기를 가로질러 얼금설금 지네발처럼 서 있다. 옛날 판운리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이 다 모여 버드나무를 베어다 다릿목을 세운 뒤, 솔가지를 위에 얹고, 뗏장을 떼어다 흙과 함께 덮어 해마다 섶다리를 놓았다.

본래 섶다리는 이듬해 장마가 지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마련이지만, 판운리에서는 장마 이전에 다릿목과 발판을 거두었다가 날이 추워지면 다시 내어다 썼다. 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서 섶다리는 이웃 세상을 넘나드는 유일한 통로였다.

섶다리 마을 판운리에서 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평창강이 주천강과 만나 서강으로 한몸이 되는 옹정리 선암마을이 나온다. 선암마을은 최근 한반도 모양의 절벽이 있는 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암마을 앞산에 올라 이 절벽을 보고 있으면 ‘아!’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산에서 내려다본 한반도 절벽은 위성에서 내려다본 한반도의 모습과 꼭 빼닮았다. 심지어 호미곶의 툭 삐져나온 꼬리까지 고스란히 닮아 있다. 하지만 이 한반도 절벽의 운명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영월군이 이 절벽의 윗부분을 싹둑 자르며 건너가는 관광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영월의 최고 관광자원을 짓밟는 도로가 관광도로라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가는 길/승용차로 서강을 둘러보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남원주 인터체인지로 빠져 중앙고속도로 신림에서 주천을 잇는 88번 지방도를 따라 간다. 쌍섶다리가 있는 주천에서 평창 쪽으로 가면 섶다리 마을 판운리이고, 계속 강을 따라 영월 쪽으로 내려가면 한반도 모양의 절벽이 있는 선암마을이다. 선암마을은 영월 책박물관 삼거리에서 우회전, 조금만 가면 오른쪽으로 선암마을 내려가는 시멘트길이 나온다. 잘 곳은 주로 영월읍과 주천면에 많다. 선암마을에 묵으려면 이장댁(033-372-2469)을 찾아가면 된다. 먹을 데로는 주천에 있는 주천묵집(033-372-3800, 묵밥)과 판운리에 있는 판운식당(033-374-1908, 민물 매운탕과 골뱅이 해장국)이 유명하다.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 안정리에서 불당골까지
곶감 타래는 ‘눈떼’에 젖고…


정처 없는 바람에 부대끼며 희디 흰 눈떼가 우우 뒷산으로 몰려갔다가 이내 우르르 마을로 몰려온다. 하늘에 가득한 눈떼. 영동 땅 용화에서 도마령으로 이어진 한적한 차도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눈 맞은 산과 들이 저녁의 흐릿한 풍경에 빠져 있다. 그 옛날 밤에 농사를 짓는 ‘달밭’이 많았다는 월전을 지나 안정리에 올라서자 눈발이 더욱 거세져 눈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누군가 일부러 산자락에 꼭꼭 숨겨놓은 듯한 마을. 푸짐하게 눈이 내려 다랑논처럼 층층이 들어선 집들도 눈에 폭 잠겨 있다. 마을로 오르는 비탈길에는 마을 사람 몇이 나와 눈을 치우고 있다. 잠시라도 쓸어내지 않으면 차는 물론 사람이 다니기도 버거워지기 때문이다.

안정리. 마을이라고 해봐야 흙집 20여 채가 고작이다. 곳곳에 흙벽으로 된 담배 건조실이 쓰러질 듯 눈밭에 서 있다. “저 건조실이 나 쪼만해서 지은 거여. 하마 60년 넘었지. 댐배 핼 때 생각하면 참 지긋지긋하지. 하지만서두 사는 게 어디 그래 핀한 건가. 지끔은 이래 허리가 꼬부라져서, 남자가 혼자 밥 해먹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유. 방은 웃풍이 시서 바람이 숭숭한 게, 참.”
두 채의 건조실을 평생 집 양켠에 거느려온 정원섭 할아버지(78)의 말이다. 영하 17도의 산중마을. 쓸어도 쓸어도 눈은 계속해서 쌓이고, 저녁이 이슥해서야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어느 새 희디 흰 눈떼 사이로 여기저기 저녁 연기가 솟아오른다.

안정리의 이웃 마을인 조동리 불당골은 도마령이 시작되는 첫 마을이다. 산중에 틀어박힌 집들은 저마다 30cm쯤 되는 눈을 이고 짜부라질 듯 등을 기대고 있다. 어떤 집은 흙집이고, 어떤 집은 막 지어놓은 귀틀집이다. 툇마루 처마에 주렁주렁 감 타래를 늘어뜨린 빈집도 여럿이다. 하긴 영동 하면 곶감이고, 불당골 또한 대부분의 집에서 곶감 타래를 내건다.

■가는 길/영동 안정리와 불당골에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황간 인터체인지로 빠져나가 579번 지방도로를 따라 상촌면(임산) 소재지를 지나 고자리 쪽에서 도마령을 넘어가거나 무주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용화를 거쳐 조동리 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물한계곡이 있는 물한리와 도마령 아랫말인 조동리에 민박집이 여럿 있다. 조동리를 비롯해 도마령 인근 마을은 영동에서도 알아주는 곶감마을로 통한다. 곶감 문의 043-740-3432.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에서 미천리까지
부처의 땅, 미륵의 땅


간밤에 눈이 내려 멀리 보이는 민주지산과 삼도봉이 눈꽃으로 새하얗다. 반딧불이 서식지로 알려진 남대천 줄기만이 지상의 숨구멍처럼 남아 구불구불 구천동과 대불천으로 갈라진다. 대불천을 따라 올라가 만나는 대불리와 미천리.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대불리는 부처의 땅이고 미천리는 미륵의 땅이다. 본래 대불리는 석기봉에 있다는 마애불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대불리를 이루는 불대·윗중고개·아랫중고개·불당골 등의 자연 마을도 마찬가지 경우다.

대불리 불대마을에는 눈 덮인 흙집들이 올망졸망하다. 대부분은 노인들만 살고, 더러는 빈집으로 남았다. 오랜 옛날의 호롱불도, 종다래끼도 빈집에 그렁그렁 걸려 있다. 불대마을을 지나쳐 만나는 내북동 또한 적막한 산중 마을이다. 눈이 내려 더욱 고요한 마을에 소 털 빛깔을 닮은 흙집이 드문드문 빛나는 그런 마을.

마을 들머리에는 덩지 큰 소나무가 금줄을 두르고 서 있다. 크고 멋진 당산나무다. “당산제도 지냅니까?” 대숲길에서 눈을 치우던 박재우씨(57)에게 물었더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한동안 넉가래질만 했다. “옛날에는 산제라고 해서 사흘 동안 공을 들였는데, 지끔은 정월 열나흗 날 하루만 공을 들여요. 석기봉 불상이 지켜주는가 몰라도, 옛날부텀 여기가 피난처였어요.” 다시 그는 넉가래로 수북하게 쌓인 눈을 밀어낸다. 눈 내린 산중 마을에 눈 치우는 소리가 상쾌하다.

대불리가 민주지산과 석기봉에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면, 미천리는 삼도봉에 더 가까이 둥지를 틀고 있다. 삼도봉은 예로부터 충북·경북·전북 3도를 나누는 봉우리 노릇을 해왔다. 언젠가 미륵이 올 땅이라는 미천리는 웃미래·아랫미래·장자터·점말을 아우르고 있으며, 이 중 웃미래는 화전민 정착 마을이다.

김인용 노인(77)에 따르면 1973년 삼도봉 가까이에서 불밭을 일구며 살던 안골 화전민들을 모두 이곳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김노인 댁은 아직도 짚으로 엮은 닭둥우리를 쓰고 있다. 닭둥우리는 짚을 엮어 우묵한 둥우리를 만든 뒤, 그 안에 짚을 깔아주어 암탉이 알을 낳고 품도록 만든 것으로, 요즘 실생활에서는 그 쓰임이 다한 물건이다. 외양간에 매어 둔 어미 소와 송아지에게도 따뜻한 덕석을 해 입혔다. 가축을 가족으로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저렇게 둥우리를 엮고, 덕석을 만들어 입힌 것이다.

웃미래에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장자터가 나오고, 장자터에서 삼도봉을 향해 오르면 샛집과 흙집이 각각 한 채씩 있는 점말이다. 점말로 가는 길(2km)은 눈이 내린 뒤라면 지프로도 오르기 힘든 길이지만, 청량한 공기 냄새를 맡으며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산길(30~40분)이다.

노부부가 사는 점말의 샛집은 한 칸짜리 귀틀집이다. 부엌도 한데부엌으로, 억새로 벽막음을 해 놓았을 뿐이다. 찬바람이 불면 그대로 찬바람이 통하는 부엌. 여기에는 옛날 조왕신을 모시던 조왕중발이라는 턱받이가 있지만, 지금은 촛대 노릇만 하고 있다. 노부부는 이 샛집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30여 년의 오막살이.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한 세상을 이렇듯 욕심 없이 건너온 것이다.

■가는 길/무주에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까지 가서 대전-무주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무주에서 설천으로 가려면 다시 30번 국도를 타고 남대천을 거슬러오르면 된다. 대불리나 미천리는 설천 면소재지에서 15번 지방도를 타야 한다. 잠잘 데나 먹을 데는 무주 리조트나 구천동 관광단지, 배방마을과 삼공리 민박촌에서 해결하면 된다. 무주 리조트 063-322-9000, 배방마을 063-322-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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