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의 ‘진화’는 끝이 없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5.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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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신’해 이용객 급증…게임·헬스·술 모임 등 ‘전천후 휴식’ 가능
번쩍번쩍거리는 무대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뒤쪽, 스낵과 아이스크림을 파는 매점 옆에서는 아이들 몇이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며 무대를 바라본다. 달빛 조명이 가수를 비추자 말소리가 잦아들고 박수가 쏟아진다. 이윽고 통기타 가수가 귀에 익숙한 트로트를 불러대자 사람들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진다.

돈을 내고 일부러 찾아가는 공연장 모습이 아니다. 서울 중계동에 있는 한 찜질방(한독스파벨리)의 오후 풍경이다. 찜질방 공연이지만 무대에 오르는 가수의 가창력은 관객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관객들의 호응도 뜨겁다. 거의 매일 한독스파벨리에 들른다는 선우양씨(주부·서울 공릉동)는 “처음에는 찜질이 좋아서 왔는데, 이제는 노래를 들으러 온다”라고 말했다.

선씨처럼 ‘엉뚱한 목적’으로 찜질방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제 찜질방에서 목욕이나 찜질은 뒷전이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갖추어진 복합 문화 시설을 즐기러 찾아간다. 찜질방들은 그같은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변화하고 또 변화하고 있다.

한독스파벨리의 경우 4천여 평 공간에 각종 찜질방과 게임방·영화관·식당·헬스장은 기본이고, 생맥주집과 피자집까지 들어와 있다. 입장료 7천원만 내면 24시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먹고, 자고, 쉬고, 즐기고, 운동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이태원랜드는 소연회장 13개와 만화방·보드게임방을 갖추고 있다. 1월 중순에는 특이하게도 회화 전시회까지 열리고 있었다. 연회장의 경우 2만원만 내면 거의 하루 종일 이용할 수 있는데, 격리된 공간에서 회의나 계모임은 물론 술 모임까지 할 수 있다. 이태원랜드 이민상 상무는 “평일에도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라고 말했다.

만화방과 보드게임방에도 손님의 발길이 잦다. 한남동에서 왔다는 20대 손파라씨는 “이곳에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특히 따뜻한 바닥에 누워 만화를 볼 때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찜질·목욕은 뒷전

두 딸과 함께 찜질방을 찾은 한소라씨(서울 하계동)는 “아이들과 가끔 독서하러 온다. 넓은 공간과 훈훈한 공기 덕분인지,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찜질방에서 동생들과 함께 마블 게임을 하던 한 여학생은 “엄마 아빠랑 같이 와도 어른과 아이들이 따로따로 놀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이곳에 오면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여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말했다. 여자 친구와 함께 온 대학생 김 아무개씨는 “시간은 많고 돈이 없을 때, 찜질방만큼 경제적인 데이트 장소는 없다”라고 말했다.

따뜻함과 편안함 덕분일까. 찜질방을 찾는 사람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한독스파벨리의 경우 주말이면 6천~7천 명이 찾아오고,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이곳을 여관으로 삼는다. “가수 남 진씨가 온 날에는 8천명 이상이 입장했다. 지방에서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라고 지배인 이경희씨는 말했다. 이태원랜드에도 하루 평균 천여명이 찾아오고, 외국인과 관광객도 1주일에 100명 이상이 방문한다.

10대 어린이에서 70대 노인까지 사로잡는 찜질방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단순히 때 빼고 광 내고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각종 ‘방’과 놀이시설이 주는 쾌감뿐일까. 인류학자 송도영 교수(서울시립대·도시사회학)는 스피드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한국인의 심성이 노래방·사이월드 미니 홈피·찜질방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고 해석한다. 빠르고 간단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개인의 열망과 상업 문화가 적절히 타협한 공간이 노래방이나 찜질방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른 전문가는 찜질방의 평등함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입장료만 내면 빈부 격차나 신분의 차이 없이 누구나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시설을 공유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한 달에 두세 번 찜질방을 찾는다는 한 주부는 “환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대리석에서 매력을 느낀다. 우중충한 집에 있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바로 뛰쳐나오고 싶다”라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사람들이 조직, 지위, 빈부 격차 등이 없는 공간 안에서 (과거 원시 촌락시대 인간들이 경험하던) 근원적인 일체감을 맛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수익을 늘리기 위해 몸집을 키우고 있는 찜질방을 걱정스런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찜질방에서 만난 박 아무개씨(회사원)는 “따로 돈을 들여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늘어나면서, 또 다른 빈부 격차를 경험한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찜질방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만끽할 것이다. 지금 찜질방의 무료 가요교실이나 요가 교실에 가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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