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죽음의 밀림에 국민을 버렸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3.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이 단독 입수한 국방부와 외무부의 미공개 문서 <베트남 전쟁 포로 및 실종자 송환>에 따르면, 역대 정부는 한국인 실종자와 포로를 무책임하게 방치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의 한국인 실종자 문제에 대해 정부가 베트남 전쟁 종전 당시 15명의 명단을 작성해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군인이 7명이고 민간인이 8명이다. 한국 정부 기록에 의해 베트남 전쟁 민간인 실종자 8명의 명단이 공식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한국 정부는 이들 실종자의 실태를 파악하고서도 베트남 전쟁 종전 무렵 미군측에 명단을 통보한 것 외에는 그들의 생사 확인과 송환을 위해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시사저널>이 최근 단독 입수한 베트남 전쟁 기간 실종자와 포로 문제를 다룬 국방부와 외무부의 미공개 문서 <베트남 전쟁 포로 및 실종자 송환>(CA0006682)을 통해 드러났다.

 
A4용지 4백2쪽 분량에 이르는 이 기록은 주로 1969~1974년 베트남과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과 외무부 본부, 국방부와 청와대 및 중앙정보부 사이에 숨가쁘게 오간 포로 및 실종자 관련 군사·외교 비밀 문서들을 담고 있다. <시사저널>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이 기록은 베트남 전쟁 한국인 포로 문제에 대해 정부가 첫 단추를 어떻게 잘못 끼웠는지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선 정부가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파악한 한국인 실종자 15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성열 병장·김인식 대위·정준택 하사·안학수 하사·조준범 중위·안상이 상병·이용선 병장(이상 군인) 김성모 김흥삼 민경윤 이기영 김수근 이창훈 신창화 채교상(이상 민간인). 민간인 8명 중 김성모씨와 김흥삼씨는 한양건설 직원들로서 1968년 베트남에 파견되었다가 도로 공사 중 실종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베트남 정부가 종전 후 한국인 사망자로 분류해 보존해둔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정부 문서를 들여다보면 베트남 전쟁 종전 무렵까지 정부는 자국민 포로와 실종자에 대해 거의 무신경했을 뿐 아니라 국민이 알까 봐 쉬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965년부터 파월 장병 중 포로와 실종자가 발생했지만 국방부와 주월사령부는 이들에 대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정부 내에서조차 일부 참전 포로에 대한 정보가 최초로 보고된 것은 1969년 8월19일에 이르러서였다. 주한 미국대사가 베트남 전쟁 미군 포로 석방을 위해 한국 외무부 아주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면서 한국군 포로 문제가 처음 등장했다.

‘미국 정부는 1969년 9월6일부터 13일까지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제21차 국제적십자사 총회에서 전시 미군 포로 상태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집중하고자 하니 한국 정부가 적극 동의해 달라’.
외무부는 이 전문을 국방부에 보내고 ‘파월 한국군 가운데서도 공산측에 포로로 잡힌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그 현황을 알려달라’고 회신을 요청했다. 1969년 8월20일 국방부는 실종자 3명의 명단을 달랑 보냈다. 1965년 11월3일 정찰을 나갔다가 실종된 박성열 병장(맹호부대)과 1966년 9월9일 외출했다가 실종된 육군건설지원단 소속 안학수 하사, 그리고 1967년 12월2일 타고 있던 헬기와 함께 실종된 박우섭 대위였다.

특이 사항 난에는 안학수 하사가 실종된 후 1967년 3월23일 평양방송에 나와서 생존이 확인되었다고 적었다. 국방부는 당시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이들 실종자 3명에 대해 ‘포로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포로로 간주한다’는 주석을 달았다. 훗날 확인된 사실이지만, 당시 포로로 잡힌 안하사와 박성열 병장은 모두 평양으로 송환되어 대남 심리전 방송에서 대본을 읽었다. 박우식 대위는 실종 35년 만인 2002년 8월 미군 유해발굴단이 베트남에서 유해를 찾아내 유족에게 인계한 덕분에 대전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처럼 국방부가 1969년 실종 군인 3명에 대해 무성의한 자료를 외무부로 넘긴 뒤 한국인 실종자와 포로 문제는 3년여 후 베트남 전쟁이 끝나기까지 정부 논의에서조차 아예 실종되었다. 대신 이 기간에 한국 정부는 자국인 포로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며 미국 요청에 따라 미군 포로 석방 문제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드러났다. 1970년 8월7일 청와대 비서실장은 외무부장관 앞으로 미군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촉구하는 조처를 취하라는 문서를 전달했다. 미군 포로 미타엘 마틴달 씨와 유진 심프슨 씨 두 사람의 가족이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미군 포로를 인도적으로 다루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달라’는 호소문을 보내왔는데, 청와대가 이를 외무부장관에게 보내 협력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4백여 쪽에 달하는 베트남 전쟁 포로 실종자 관련 정부 문서 중 당시 청와대가 직접 관심을 기울인 포로 관련 사항은 이들 미군 포로 문제뿐이었다. 미국은 1970년 10월 유엔 안보리에 전쟁 포로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겠다며 한국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고, 외무부는 이를 수락하는 전문을 보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파월 부대가 공산측 포로를 다수 잡아서 심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제적십자사가 주월 한국군 해병 제2여단에 있던 포로심문소를 방문한 결과보고서에는 1970년 2월11일 현재 베트콩 남자 2백87명과 여자 1백16명 등 총 4백3명의 포로를 잡아둔 것으로 나왔다. 국제적십자사는 이후 1971년까지 베트콩 포로가 1백20여명 추가로 주월한국군 포로심문소로 간 것으로 기록해, 이 기간에 가장 치열한 교전이 벌여졌음을 시사했다.

 정부 문서들에는 1970년 이후 월맹측과 월남 정부, 그리고 국제적십자사 간에 포로 교환 협상이 활발하게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많다. 그 중에는 1970년 12월10일 제94차 파리 회담에서 월남 외상이 공산 포로 약 9천명을 잡고 있다면서 월맹이 억류한 연합군 포로 1천여 명과 맞바꾸자고 제안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런 상황을 외교 문서로 보고했지만, 정부는 연합군 포로 속에 한국인이 몇 명인지 확인하려는 문제 의식조차 없었다. 한국 정부가 포로 실종자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사이에 1971년 봄 미군과 월맹군은 월맹군 포로 5백70여명을 송환하는 데 합의했고, 실제 송환이 이루어졌다. 

 
정부가 한국인 포로 문제에 잠시나마 관심을 기울인 때는 1972년 11월19일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인터내셔널)가 한국 정부에 보낸 한 장의 서한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사면위원회는 인도차이나 지역에 억류된 민간인 포로 석방과 송환을 위해 분쟁 당사국 간에 체결시키고자 하는 합의의정서 시안을 만들어 당사국인 한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앞으로 사본을 보내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권 개념이 희박했던 유신 정부로서는 국제사면위의 실체도 잘 몰랐던 듯하다. 외무부장관이 주영 한국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이 단체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자세히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훈령을 내려 보냈다.

 아무튼 국제사면위의 움직임을 계기로 정부는 한국군 실종자 파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1972년 12월18일 국방부는 3년여 만에 추가 실종자 명단을 외무부에 보냈다. 2급 비밀 문서는 실종자 7명의 명단을 실었다. 이 문서에서는 앞서의 박성열 병장과 안학수 하사가 대남 방송을 함으로써 북한 체류가 확인되었다고 적혀 있다. 나머지 실종자로는 정준택 하사, 안상이 상병, 이용선 병장, 김인식 대위, 조준범 중위 등이 추가되었다. 군은 이들을 무단 이탈자로 분류했다. 아울러 국방부는 1972년 9월30일을 기준으로 작성한 베트남 전쟁 사망 실종 부상자 비밀 통계자료도 넘겼다. 이 자료에 따르면, 그때까지 3천7백22명이 전사했고, 9백35명이 순직했으며, 1백79명은 일반 사망한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 포로는 단 한 명도 없다.  실종자는 장교 1명과 사병 4명을 합해 5명이다. 나란히 보낸 명단에는 실종자가 7명이라는 점에서 통계의 축소 조작 의혹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런데도 이 서류들에는 극비 사항이므로 ’12월 말일까지 파기하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당시 군부와 박정권이 베트남 전쟁 피해 실상이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을 차단하려 한 점을 잘 보여준다.

 1972년 말이면 베트남 전쟁 종전 협상이 마무리되고 철군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이때까지 부실하게나마 군인 실종자 문제가 두 차례 정부 기록에 나오지만 대개 묵살하는 태도였다. 민간인 포로나 실종자 문제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1973년 봄 들어 베트남 전쟁 종전을 앞두고 한국군 포로는 없다는 공식 입장을 고수하며 철군 작업에 들어갔던 주월사령부와 한국 정부를 난처하게 만든 쪽은 월맹이었다.

3월23일 사이공에 있던 주월 한국대사가 본국에 긴급 전문을 보냈다. 베트콩측이 3월25일께 일방적으로 한국군 포로 1명을 석방한다고 미군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포로가 없다던 당시 국방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1주일간 국방부·외무부·주월 한국대사관 사이에 숨가쁘게 오간 ‘석방 포로맞이 비밀 문서’들은 정부가 이 문제에 얼마나 당황하고 우왕좌왕했는지를 드러낸다. 국방부에는 아예 포로 관련 자료가 없으므로 돌아올 이에 대한 신원 파악은 현지 대사관 몫이었다. 처음에는 포로 이름이 인정철 준위라고 한국에 보고되었다. 포로를 사이공에서 맞을지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맞을 것인지, 어떻게 귀국시킬지도 혼선이었다. 3월25일 신병을 인수한 뒤에야 송환 포로 신상은 월남 주재 한국대사관에 의해 본인 입으로 확인 되었다. ‘맹호기갑연대 2대대 8중대 1소대 유종철 일병. 부산 영도가 고향인 유일병은 72년 4월19일 유명한 안케 패스 행군 작전 중 베트콩 기습으로 포로가 되었다.’ 7월25일 이런 내용의 긴급 전문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국방부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유일병 시신도 없는 상태에서 전사자로 둔갑시켜 국립 묘지에 안장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그를 전사 처리함과 동시에 1972년 5월11일 인현무공훈장까지 추서했다. 그 직후 유족에게 전사통지서와 함께 유품이라며 관물 24점을 전달했고, 장례비 100만원을 주어 장례도 치른 뒤였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73년 3월27일 밤 9시, 국방부가 ‘죽인’ 유종철 일병은 대한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와 가족 품에 안겼다. 사망 처리되었던 그의 호적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적혔다.

  유종철씨가 살아서 돌아오자 외무부와 국방부간에는 실종자 문제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다. 국방부는 더 이상 포로는 없다고 주장했다. 주월사령부는 아예 국군 실종자를 찾을 필요가 없는 ‘쓰레기’로 비유했다. 1973년 3월27일 열린 국무회의 기록에는 한국 정부 당국자들의 자국민 보호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나타나 있다. “주월한국군 실종자는 전투중 발생한 행불자가 아니고 모두 자의에 의한 탈영자로서, 일부는 북한에서 방송한 사실이 있고, 나머지도 범법 도배자들이므로 주월사령부는 이들을 포로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며 송환 요청을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견해이다.’ 군인 실종자들은 군 당국의 반인도적 처사에 의해 이렇게 버림받았던 것이다. 한편 외무부는 마지 못해 형식적으로 외교 경로를 통해 이들 군인 실종자의 생사와 소재를 확인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베트남 전쟁 종전 협정에 따라 외국군 철수 기한이 만료되기 하루 전인 3월27일 죽었다던 유일병이 생환하자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정부가 그동안 실종자 및 포로에 대해 실태 파악조차 안해 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인 포로는 안중에도 없었다. 국방부와 외무부 간에 책임 소재를 둘러싼 잡음이 흘러나왔다. 당시 정보기관이 작성한 <주월 한국인 포로 인수 대책에 결함 노정>이라는 정보 보고 문건은 그 문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월남 파병 이래 한국군 8명과 민간인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는데 3월21일 베트콩측이 한국인 포로 1명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대책이 시급하게 요구되었으나 관계 부서인 국방·외무 양부는 업무 한계를 둘러싸고 상반된 주장만 내세우고 있음. 실종자 문제는 1972년 12월 초 총리실에서 철군계획 검토 당시 외무부가 담당하기로 결정되었고, 철군 완료된 지금에는 국방부 단독으로 실종 현황만 발표할 경우 정부가 실종자 구제 대책에 무성의하다는 국민 비난이 대두될 우려가 다분하므로 외무부가 실종자 현황과 구제대책을 발표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함. 외무부는 아주국장이 외유중이라는 이유로 국방부가 임의 처리하라는 답변임. 한국군 실종자 수는 적어도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으면 국내외에 물의를 야기할 소지가 다분하므로 관계당국이 유기적 협조로 사후 대책을 조율해야 할 것임.’

 1973년 3월28일 외무부장관은 뒤늦게 주월 한국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긴급 훈령을 보냈다. ‘다음 사항을 포함한 현지 정세를 보고 바람. 1. 공산측이 아직 억류 중인 것으로 알려진 미군 월남군 포로 및 외국 민간인 수. 2. 미군과 월남군이 억류 중인 공산 포로의 수. 3. 공산측이 아직 억류 중인 포로 및 외국 민간인 중 대한민국 군인 및 민간인들도 포함됐을 수 있을 것인 바 이들에 대한 대책.’ 이에 대해 이틀 후인 3월29일 주월 한국대사는 외무부장관에게 답변을 보냈다. ‘1. 포로교환 후 미송환 실종자는 미국 1천3백명, 월남 주장 군인 2만8천명, 민간인 15만9천명, 월맹 주장 민간인 20명, .....4. 한국인 실종자 명단은 아직까지 공산측에 제시된 바 없으며 새로운 기구 발족 후 미국인 실종자 명단과 같이 제시할 계획이라고 하니 미국 대사관에는 차후 수색 업무에 도움이 될 첩보 자료를 제공해 주기를 희망함. 민간인 실종자 명단을 금주에 파우치로 송부할 예정인 바 군인 및 민간인 실종자의 모든 첩보를 수집해 송부해주기 바람’. 이렇게 해서 주월 한국대사관이 수집한 한국 민간인 실종자가 존재한다는 단어가 정부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외무부조차 국방부의 한국군 포로 및 실종자 문제에 대한 무성의했다는 점을 지적해주는 문서도 있다. 1973년 4월17일자 외무부 아주국장이 미주국장에게 보낸 대외비 협조문에는 ”실종자 송환 업무 관계로 국방부가 조치한 사항으로는 주월사령부가 철군 당시 실종자 7명의 명단을 주월대사관 무관에게 인계한 것 외에는 특별 조치 사항이 없었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외무부는 국방부에 실종 군인 명단과 사진·인적 사항 등을 요구해 주월 미국대사관에 넘겼다. 월맹 쪽과 아무런 채널이 없던 한국 정부는 포로 및 실종자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미국만 처다보아야 하는 형국이었다.

 정부 기록들에 따르면, 한국인 실종자 15명에 대한 신상 기록은 태국에 있던 미군실종자수색 센터(JCRC)로 넘어갔다. JCRC는 베트남 전쟁에서 실종된 미군의 행방을 탐색할 목적으로 미군이 운영하는 기구였다. 1973년 1월23일 사이공에서 창설된 이 기구는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태국 내 나콘파놈 공군기지로 옮겨 활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17일 태국 주재 한국대사는 외무부에 JCRC 회의 참석 보고서를 보냈다. ‘자료를 제출했더니 동 센터에서는 별첨과 같이 컴퓨터 처리된 상세한 한국인 실종자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이로써 한국 정부는 한국인 실종자 15명에 대한 처리 문제를 미군에 맡긴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 10월12일 주태국 한국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실종된 제3국인 행방 탐색에 대해 미국 대표가 성명서를 발표함. 내용 요약: 미측의 거듭된 요망 사항에 공산측 묵묵 부답. 미측은 공산측의 무성의와 비협조를 비난함’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베트남 전쟁 실종자는 역사 속에 잊혀 갔다. 정부 기록은, 월맹이 보관하고 있는 한양건설 현장 실종자 김승삼씨과 김흥모씨의 유해를 인수하는 일이 지지부진하다가 1981년 미국대사관의 통보로 다시 협상이 재개되었으나 흐지부지 끝난 것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한국 정부는 이처럼 처음부터 일부 자국민 실종자의 실태를 알고서도 국민에게 쉬쉬했을 뿐 아니라 이후 베트남과 수교하는 과정에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이 오늘도 베트남 전쟁 실종자를 찾아 수색을 벌이고 유해 발굴 작업을 하는 것과 대조된다.

 물론 <시사저널>이 확보해 처음 공개하는 이 기록이 베트남 전쟁 포로와 실종자의 전모를 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종자 문제를 숨기려고 하다가 종전 직후 유종철 일병이 포로로 송환되자 부랴부랴 짧은 기간에 파악한 내용이기 때문에 진실의 일부만이 드러났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찌되었든 최소한 정부가 처음부터 확실히 파악한 이들 한국인 실종자에 대해서마저 오늘날까지 소재 확인 및 송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국민에 대한 직무 유기가 아닐 수 없다.

  1994년 <베트남 전쟁쟁 동안의 한국군 포로와 실종자>라는 논문을 발표했던 전경수 교수(서울대·인류학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노이 군사박물관 사진 등을 증거로 삼아 한국군 포로 관련 논문을 발표하자 참전 간부들이 죽이겠다고 끈질기게 협박했다. 당시 나는 뉴질랜드로 6개월간 피신하고 미군 태평양사령부에 추가 자료를 요청했더니 베트남 전쟁 한국 민간인 실종자 명단을 보내주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한국 정부 기밀 해제 자료와 그 명단이 일치한다. 이 문제에 정부가 다시 관심을 기울여 실종자 생사 확인과 소재파악에 나서야 한다. 공개된 자료 자체가 베트남 전쟁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