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찍히면 가난 못 면한다
  • 정문호 통신원 (워싱턴) ()
  • 승인 2005.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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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포위츠 세계은행 총재 지명자, 빈곤 퇴치 지원금 ‘미국 입맛대로’ 쓸 듯

 
미국의 이라크 전쟁 ‘설계사’로 지목되어 그간 미국 안팎에서 지탄을 받아온 폴 월포위츠 미국 국방부 부장관(61)이 세계은행 총재에 지명된 직후,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는 최근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전통적으로 미국 몫인 세계은행 총재 자리에 지명된 이래, 부정 일변도의 평가에 시달렸다.

월포위츠 부장관은 부시 행정부 안에서 이라크 전쟁을 가장 강력히 주창했고, 중동에 이른바 ‘미국식 가치’의 전파를 최우선 과제로 주창해온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의 선봉장이었다. 그런 그가 세계은행 총재에 오를 경우, 연간 2백억 달러를 세계 최빈국들에 지원하는 이 기관을 네오콘의 ‘전초 기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영국의 유력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그가 이끄는 세계은행은 미국의 힘과 우선 순위에 따라 정책을 구현하는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며 신랄히 비판했다.

신임 총재에 대한 염려는 앞으로 5년간 새 총재와 함께 동고동락해야 할 세계은행 직원들이 특히 심하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세계은행 본부 직원들은 월포위츠가 과거 이라크 전쟁의 전비와 관련해 허황된 논리를 펼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e메일로 주고받으며, 그가 총재를 맡기에 부적합하다고 항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동영상에서 그는 의회 청문회에 나가 ‘전후 이라크 재건이 이라크 전쟁 자체보다 비용이 더 들 것 같지는 않다. 이라크의 원유 판매 수입은 앞으로 2~3년 내에 5백억~1천억 달러에 이를 것이며, 그 수입으로 전후 복구 작업을 비교적 신속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라크는 전후 복구 사업이 2년째 들어선 지금까지 원유 수입은 고사하고 미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당시 발언은 실상을 한참 빗나간 오판이었다.

 물론 월포위츠 총재 지명에 대한 평가가 100%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저명한 국제 문제 전문가인 파리드 자카리아 <뉴스 위크> 편집장은 “총재 직을 맡기에는 전문성이 부족하고 미국식 일방주의를 내세우는 이념론자라는 단점은 있지만, 그가 세계 빈곤 퇴치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가진 공화당 우파를 대표한다는 사실은 다행스럽다”라고 평가했다. 또 민간 연구기관인 국제개발센터의 낸시 버드샐 총재도 “그가 총재를 맡게 되면 앞으로 세계은행의 무게 중심이 개발 원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다”라며 반겼다. 일부의 이런 후한 평가는 그러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비판적 시각에 비하면 ‘모기 목소리’이다.

 자신을 둘러싼 곱지 않은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월포위츠는 총재에 지명된 직후 잇단 기자 회견을 통해 “앞으로 전세계 빈곤 퇴치를 위한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자신에 대한 비판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한 프랑스의 르 피가로와 인터뷰하면서는 “내가 세계은행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제발 믿어 달라”고까지 호소했다. 그는 또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얼마 전 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 피해 복구 현장을 돌아보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일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월포위츠가 1980년대 인도네시아 대사를 지내며 개발도상국에 대한 세계은행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꼈다는 점, 그리고 1990년대 존스 홉킨스 국제대학원(SAIS) 학장을 지낸 ‘국제파’라는 점을 들어, 무조건 그의 자격을 문제삼을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총재 직에 취임할 경우 세계은행을 어떤 식으로 끌고 갈지에 대한 관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세계은행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월포위츠의 잇단 다짐은 서서히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거세게 반발했던 유럽이 유화적 자세로 변하고 있다. 유럽의회 외무장관들은 지난 3월23일 전체 회의를 통해 월포위츠를 세계은행 총재 직의 ‘진지한 후보’로 평가함으로써, 별 반대 없이 추인할 뜻을 내비쳤다.

세계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과 함께 탄생한 기구로, 전통적으로 국제통화기금의 수장이 유럽 몫이었던 반면 세계은행 총재 직은 미국인에게 돌아갔다. 유럽의 반발이 별반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2기 들어, 지난 1기 시절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소원해진 유럽과의 관계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의 이같은 움직임은 고무적이다.

 현재 세간의 관심은 하고 많은 저명 인사 가운데 부시 대통령이 왜 하필 월포위츠를 지명했느냐에 쏠려 있다. 더군다나 그는 국방부 차원의 이라크 전후 복구 작업을 총지휘하는 실무 책임을 맡고 있어, 이런 궁금증은 더하다. 국방부 출신 인사가 현직에서 바로 세계은행으로 자리를 옮기기는 1960년대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 이후 두 번째다.

부시는 월포위츠가 멋진 일을 해낼 수 있는 정열적인 사람이며, 개발 문제에 헌신적이라고 말했지만, 왜 이 시점에서 그를 갑작스레 세계은행 총재로 ‘전직’시키려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미국 정치분석가들은 부시 대통령이 월포위츠를 지명하기 직전, 미국 행정부 강경파의 핵심 인물인 국무부의 존 볼턴 군축안보 담당 차관보를 유엔대사 직에 지명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볼턴과 월포위츠를 국제적인 협조가 더없이 요구되는 유엔대사와 세계은행 총재에 각각 지명한 것은, 앞으로 유엔과 세계은행이라는 거대한 국제기구를 미국 입맛대로 요리하겠다는 신호나 다름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부시가 미국 대외 정책 면에서 강경파의 대표 격인 두 사람을 국무부와 국방부에서 각각 차출한 까닭은, 자신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외교 행동의 반경을 넓혀주려는 각별한 ‘배려’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설득력은 약하다. 설령 두 사람을 빼더라도 미국 행정부 안에는 언제든 라이스 장관을 제압할 수 있는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딕 체니 부통령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월포위츠의 총재 지명 배경과 관련해 네오콘의 대부 격이자 영향력 있는 보수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의 편집장인 윌리엄 크리스톨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월포위츠야말로 각국의 개발 원조를 통해 민주주의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네오콘의 소신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적임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표면적인 구실이다. 월포위츠는 원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미국의 핵 전략을 입안하면서 관료로 입신한 전략가이다. 즉 그는 1950년대 미국의 핵 전략 이론가 앨버트 울스테터의 수제자로서, 현재 부시 정부가 추진 중인 미사일방어(MD) 계획의 원조 격인 ‘미사일요격체제(ABM)’ 예산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한 실무를 맡아 두각을 나타낸 이력이 있다. 월포위츠는 또 중동의 핵 확산 방지책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이래 오랫동안 이 분야의 실무를 관장해왔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미국 국무부 정책실장 폴 니체가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과 손발을 맞추며 소련 봉쇄론을 골자로 한 냉전 체제를 세웠듯이, 폴 월포위츠는 ‘선제공격론’을 내세워 탈냉전 시대 미국 대외 정책의 판을 다시 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그가 민주주의와 함께 내세워온 핵심어는 ‘폭정 종식’으로, 지난 2월 2기 부시 정부 출범 때 부시 대통령이 이 용어를 직접 언급함으로써 대외 정책의  ‘표어’로 채택되었다.

세계은행 총재는 중동을 포함한 제3 세계 빈곤국들에 원조 자금을 어떻게, 얼마나 배분할지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갖고 있다. 이같은 권한을 행사할 때, 월포위츠의 평소 신념과 사고 방식이 적용된다면, ‘개발’ 또는 ‘빈곤 퇴치’ 구호는 차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미 충분한 근거도 마련되어 있다. 세계은행의 설립 취지 가운데는 ‘정부 서비스 개혁을 통한 개발 원조국의 빈곤 퇴치를 돕는다’는 대목이 있다. 월포위츠가 이를 근거로 미국의 입맛에 따라 원조 우선 순위를 정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특히 그가 내심 총재 취임 후 ‘개혁 대상 1호’로 지목한 부패국 또는 폭정의 나라에 대한 원조는 어떤 식으로든 중단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월포위츠 체제의 세계은행은 한층 더 강해진 미국의 지도·감독 아래 놓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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