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의 ‘북핵 진실 게임’ 왜 자꾸 꼬이나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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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의해 제시된 북한위협론은 10년 전부터 끊임없이 강조되며 왜곡과 과장이 거듭되어 왔다. 북한 핵의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미국의 주류 언론과 전문가들이 북한 핵 위협을 왜곡

 
북한이 핵 보유 및 6자 회담 무기한 연기를 선언한 이후, 북한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 회담 당사국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북한도 비록 핵 보유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조건이 맞는다면 6자 회담에 다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6자 회담은 2003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북한 핵은 당장 한국의 안보 상황과 직결된 민족 공동의 문제이지만, 미국이 짧게는 2000년 부시 1기 정부 출범 이후, 길게는 문제가 불거진 1993년 이후 북핵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려고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와 자격이 있다.
패권국으로서 세계 질서를 평화적으로 운영할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이 세계 평화와 안전에 중대한 논점이 되어온 북한 핵 처리 문제에 발벗고 나서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실패한 국가’의 핵 통제 어렵다?

북한 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또 있다. 북한은 비록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목하는 것처럼 ‘깡패 국가’는 아닐지라도, ‘실패한 국가’에 가깝다. 그것이 냉전 체제가 무너진 결과이든, 내부의 실책에 의한 것이든 북한은 오늘날 에너지와 식량의 대부분을 외부 원조에 의존하는 허약한 체제이며, 군의 비중이 필요 이상으로 높은 사회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 및 해체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허약한 체제가 가진 핵은 통제하기 어렵다. 유사시 허약 체제의 핵은 곧바로 확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무력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풀려 한다면, 지난 몇 년간 북한 당국에 대해 취했던 자세를 자성해야 한다. 북한 핵의 성격에 대한 미국측의 기본 인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특히 북한 핵의 위협에 대한 지나친 과장 또는 왜곡은 문제를 꼬이게 한다.

 
곧 파국이 닥칠 것이라는 식의 북한위협론은 이미 10년 전부터 끊임없이 강조되어 왔다. 1994년 제임스 울시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상원 청문회에 나가 ‘북한은 우리가 당면한 최악의 위협이며, 몇 년 안으로 심각한 군사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정권에서 미국 역대 부통령 가운데 가장 힘 센 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딕 체니는 국방장관으로 재직할 때인 1991년 11월 한국 국방장관과 비밀 회의를 갖고, 북한에 대한 ‘선제 공격’을 약속한 바 있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외교협회를 이끌었던 레슬리 겔브는 1991년 이라크 응징이 끝난 직후 북한을 ‘다음 이단 국가’로 지목했으며, 북한이 1993년 핵 비확산조약(NTP) 탈퇴를 선언하자 ‘북한 핵 활동은 또 다른 위기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미국 내에는 북한 핵의 성격과 관련해 크게 두 가지 가정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북한 당국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협상거리로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을 대변하는 미국내 인물로는 한반도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와 셀리그 해리슨이 꼽힌다.

다른 하나는 정반대 견해이다. 북한은 진정으로 핵을 개발하거나 보유할 야망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 전체의 안전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는 견해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북한의 김정일은 정권 유지를 위해 ‘벼랑끝 전술’을 동원하는 위험천만한 ‘깡패 국가의 독재자’이다. 이 논리에 따른 행동 방침은 자명하다. 깡패 국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며, 깡패 국가의 지도자와 협상하거나 대화하는 것은 훗날 화근을 키우는 ‘유화 정책’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과거 부시 1기 정권 시절 미국 외교 정책을 주물렀던 리처드 펄 등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이 이 계열의 대표 주자들이다.

“핵 프로그램,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와 관련”
대체로 위기는 어느 일방에 의해 증폭되지 않는다. 위기는 각각 불신감과 적대감을 가진 세력의 상호 갈등과 미러 게임의 결과이기 쉽다. 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관계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의 주류 언론들조차 상호 작용의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북한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데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가령 <뉴스 위크>는 2003년 10월 북한 핵 프로그램을 파헤친 특집을 내보냈는데, 당시 기사는 북한 핵 개발 의혹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북한은 1994년 합의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협상을 기만했다’고 단언적으로 기술했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1993년 미국이 한국과 실시한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91년 남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에는 잠시 화해의 훈풍이 부는 듯했다. 당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고, 한국에 있던 전술 핵을 철수했다. 그런데 클린턴 정부 출범 이후, 핵배낭까지 동원된, 즉 핵전쟁을 상정한 군사 훈련이 재개되면서 북한의 위기감을 촉발했던 것이다.

미국의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도 전후 맥락을 생략하기 일쑤다. 북한 미사일 문제(66~67쪽 딸린 기사 참조), 2002년 10월 제기된 고농축 우라늄 문제(64~65쪽 딸린 기사 참조)에 대한 미국내 대다수 전문가들의 논평에서는 북한의 행동만 지적될 뿐, 미국의 행동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었다.
1998년 벌어진 이른바 ‘대포동 위기’가 그렇다. 대포동 미사일 위기는 1998년 8월31일 북한이 광명성 1호를 일본쪽 상공을 향해 시험 발사하면서 벌어졌다. 이후 한국·미국·일본은 온통 대포동 쇼크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이 일이 있기 두달 전, 즉 1998년 6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장거리 핵 공격 시뮬레이션을 비밀리에 실시했다는 사실은 4년 뒤에야 폭로되었다.

 
한스 크리스텐슨은 1998년 미국 군사 당국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세이모어 존슨 공군기지에서 F15E 전폭기를 발진시켜, BDU-38로 북한을 선제 공격하는 모의 핵공격 실험을 했다고 2002년 폭로했다. 또 1998년 7월 당시 야인으로 있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북한 미사일 위협’을 전제로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라고 권고하는 보고서(럼스펠드 보고서)를 작성했다. 게다가 미국은 기본 합의서에 따른 ‘대북 중유 공급’ 일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북한으로부터 의구심을 사고 있었다. 셀리그 해리슨이 1998년 5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이 그에게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고 전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2002년 10월 이후부터 최근 북한 핵 보유 선언이 있기까지의 과정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집권 과정에서 전임 정부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들어 알고 있던 미국의 부시 정부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새삼 제기한 때는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반을 훌쩍 넘긴 2002년 10월이었다. 2002년 10월은 북한과 ‘순치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의 정권 교체기였다.

“이라크 전쟁 수행 위한 ‘쐐기’로 북핵 거론”
중국은 더욱이 부시 1기 정부가 벌이고 있던 ‘테러와의 전쟁’에 전적으로 협조한다고 밝힌 상황이어서 고농축 우라늄 문제에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국면의 주도권은 완벽하게 부시 정부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반면 ‘보통 국가’를 꿈꾸는 일본에게 고농축 우라늄 문제는 호재였다. 일본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2003년 2월, 당시 일본 방위청 장관이던 이시바 시게루는 “북한이 미사일 공격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자위 차원에서 일본은 선제 공격할 권리가 있다”라며 일본판 선제공격론을 제기했다. 이처럼 북한을 한바탕 흔들고 난 미국은 2003년 3월, 마침내 부시 1기 숙원 사업이던 사담 후세인 제거에 나섰다. 2002년 10월에 제기된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문제는 이라크 전쟁 수행 기간에 북한으로 하여금 준동하지 못하게 하는 ‘쐐기’ 구실을 한 셈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반도 전문가 거번 맥코맥은 지난해 펴낸 <북한 과녁(Target North Korea)>에서 북·미 대결에 ‘상당수의 근본적인 오해’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북한이 항상 대결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이 핵 국가가 되려는 단호한 의지를 아무런 대가 없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다. 셋째 북한은 정상 국가와 달리 협상은 하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협박(blackmail)만 일삼으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맥코맥은 ‘진실은 좀더 복잡하며, (대결의) 책임은 좀더 넓게 공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시 2기 정부가 진정 외교으로 북한 핵 문제를 풀고자 한다면, 과거의 대응 방식이 효과적이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한국·미국·북한의 북핵 해법 어떻게 다른가

2004년 6월 23~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3차 6자 회담을 끝으로 6자 회담은 현재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당시 한국·미국·북한의 제안 골자이다.

한국안:모두 6개 항목이다. 핵심 중 하나는 제3항 ‘동결 작업이 시작될 때, 다른 당사국들이 북한의 안전 보장을 확약한다’는 것이다. 미국안과 다른 점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 해체 및 사찰을 수용한 대가로, 에너지를 지원할 때 그 대상을 비핵 에너지만으로 제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한국안의 경우 북한의 비핵화를 미국·일본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 작업과 연계하는 반면, 미국안은 관계 정상화를 비핵화 문제와는 별개로 다루고 있다.

미국안:모두 6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쟁점이 될 만한 제안 내용은, 북한이 비핵화를 선언할 때의 조처로 ‘완전 보장’을 확약하지 않았다. 미국은 또 3항 제안에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핵무기ㆍ핵무기 부품ㆍ원심 분리와 관련 부속ㆍ핵 분열 물질과 연료봉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대북 제재 해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완전히 핵 해체 작업을 완료했을 경우 ‘논의하겠다’고 유보안을 내놓았다. 미국은 또 대북 관계 정상화를 인권 문제 개선·생화학 무기 프로그램 중단·미사일 및 관련 기술 확산 중단 조처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북한안:핵 폐기 대신 ‘동결’을 주장했으며, 그 대상(사찰 포함)도 영변의 5MW급 원자로 가동 중단으로 국한했다. 재처리 시설과 재처리 물질에 대한 사찰 및 조처 여부는 미국의 태도에 달렸다고 주장했으며, 기본 합의서에 약속한 에너지 지원 재개가 협상의 기본 전제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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