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뚱맞은 ‘뒷북치기 검증’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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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유효일 국방부 차관 5·18 진압 전력 뒤늦게 조사해 ‘파문’

 
유효일 국방부 차관의 경력을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 2월17일 한 방송사가 ‘5·18때 진압군의 대대장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보도한 것이 불씨였다. 2월18일 참여연대가 ‘유효일 차관을 즉각 경질하라’는 성명서를 내고, 청와대 김완기 인사수석이 부랴부랴 사실 확인 조사에 나서겠다면서 파문이 일었다.

그런데 음모론이 퍼졌다. 유차관의 5·18 진압군 경력이 이미 알려진 사항이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뒤늦게 검증에 나선 것은 군 인사 비리 수사 과정에서 군 검찰과 대립했던 유차관을 낙마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유차관이 5·18 진압군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번 보도되었다. 지난해 임명 당시 짤막하게나마 하나회 출신 진압군이라는 보도가 있었고, 지난해 12월8일자 <일요신문>과 지난 1월10일자 <시사저널>(제795호)도 유차관이 5·18때 진압군 대대장이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때 유효일 차관이 비상기획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았다. 1급인데, 당연히 검증된 인물로 받아들였다”라고 말했다. 사실을 몰랐다기보다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2월17일 방송 보도 역시 초점은 부실한 청와대 인사 시스템이었다. 참여연대 이재근 간사도 “생뚱맞은 건 오히려 음모론을 펴는 쪽이다. 유효일 차관 전력과 함께, 청와대의 부실한 인사 시스템도 지적했다”라고 말했다.

재탕 보도 후 확인 작업에 ‘음모론’까지 불거져


유차관의 전력이 언론에 오르내린 것은 1993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를 꾸려 중령 이상 진압군 핵심 지휘관 명단을 공개했다. 모두 35명이었는데, 당시 김동진 육참총장을 비롯해 유효일 육군대학 총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상조사특위는 이 가운데 유효일 육군대 총장을 비롯한 16명이 하나회 소속이고, 12명이 장군으로 승진했다고 폭로했다. 그때 민주당 특위를 이끈 위원장이 당시 최고위원이던 김원기 국회의장이다. 당시 간사를 맡았던 정상용 전 의원은 “이해찬 총리도 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다”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유효일 차관의 전력에는 5·18 진압군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1994년 5·18 단체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을 검찰에 고소하면서 그도 포함했다. 민주당 조사 결과를 근거로 유씨를 포함한 현역 군인 12명도 함께 고소한 것이다. 형식적이나마 군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1995년 수사를 맡은 군 검찰은 국방부 동원국장이던 유씨를 그의 사무실에서 조사했다. 당시 수사기록을 검토한 군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5·18 단체가 유씨를 고소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광주교도소에서 가혹 행위를 한 혐의와 외곽 경비를 서다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혐의다. 둘 다 지휘 책임이다. 당시 조사에서 유씨는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

1995년 7월 수사를 끝낸 군 검찰은 검찰과 똑같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 해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섰다. 군 검찰도 재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검찰은 일선 지휘관에 대해서는 사법 처리를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던 일선 지휘관 에 대해 법리적으로 내란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1996년 대법원은 5·18 단체가 낸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법적 논란이 마무리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5·18 진압에 나섰던 현역 군인을 퇴진시키라고 요구할 때마다 유씨의 이름을 거론했다.
1997년 유효일씨는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대선 직전, 충남 공주가 고향인 그는 자민련에 입당했다. 이른바 DJP 연합이 이루어진 뒤였다. 그는 자민련 몫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군복을 벗기려 했던 쪽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것이다. 1998년 5월 그는 비상기획위원회 기획운영실장을 거쳐 이듬해 사무처장(1급)에 올랐다. 참여정부가 검증된 인사라고 여긴 1급 발탁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는 국방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난해 8월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시민단체가 문제를 삼자, 청와대는 뒤늦게 확인 작업을 벌였다. 기무사와 국방부 법무관실을 통해 당시 수사 자료를 넘겨받았다. 검토한 결과 별다른 내용은 없는 것으로 결론 냈다고 한다. 2월23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김우식 비서실장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경질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실장은  국방부 내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직은 유차관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유효일 차관은 1980년 당시 20사단 62연대 3대대장(중령)이었다.
1980년 진압군의 공식 기록으로는 13대 국회 광주특위(1988년)에 제출된 ‘20사단 충정작전 보고’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광주에 투입된 20사단은 60연대(정수화 대령), 61연대(김동진 대령, 전 국방부장관), 62연대(리병인 대령) 전체 4천7백66명이었다. 유중령은 62연대 3대대를 지휘해, 5월21일 오전 2시30분 서울 용산역을 출발했다. 오전 8시58분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했고, 10시에 상무대에 주둔했다. 그날 그에게 맡겨진 주요 임무는 시 외곽 봉쇄였다. 저녁 6시55분 유중령은 부대원 4백여명을 이끌고 송정리 비행장 입구와 서창다리에 투입되었다. 그날 저녁 9시를 기해 전투교육사령부는 발포를 허용했다.

5월22일 오전 7시22분 유효일 중령은 송정리 비행장 입구에서 시위대와 처음으로 대치했다. 기록에는 ‘교전 무’(교전이 없었다)로 나와 있다. 오전 10시35분 전차 2대를 지원받아 송정리 일대 외곽 경비를 섰다. 오후 5시에는 62연대 2대대가 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교전을 치러 시민 3명이 사망했고 부상자 10명이 발생했다.

5월23일에는 부대 배치 조정 명령을 받아, 24일 유중령이 속한 62연대는 광주교도소로 이동했다. 당시 교도소에는 18일 전남대 주변 시위자를 비롯해 100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이 구금되어 있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 있었던 김재언 광주교도소생존자동지회 회장(61)은 “지독하게 두들겨 팼던 3공수에서 20사단으로 바뀐다고 해서 안도했다. 그런데 20사단도 공수부대 못지 않게 시민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오후 5시에 취침을 시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무자비하게 구타한 그때 그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5월27일 20사단은 마지막 도청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62연대 전투 결과 보고에는 사살 3명, 포로 2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압군 경력이 논란이 되자 유효일 차관은 “시민군과 교전은 없었고, 5·18 진압으로 상훈을 받은 적도 없다”라고 해명했다. 당시 진압 작전으로 지급된 상훈은 모두 79개였다. 사단장인 박준병 소장이 충무무공훈장(3급)을 받았고, 62연대 2대대장 이종규 중령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지급된 상 가운데 단체상도 있다. 유효일 차관이 속한 20사단은 공수부대인 육군특전사령부와 함께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는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에 들어가 2년 남짓 대통령비서실 교육담당비서관을 지냈으며,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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