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역사 영역 침범했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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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성 이슈·뚜렷한 소신으로 역사 논란 진앙지 된 이영훈 교수

 
서울대 사회과학대 6층에 있는 이영훈 교수(54·경제학)의 연구실 풍경은 ‘첩첩책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출입구에서 창가에 있는 책상과 이어진 좁은 통로를 뺀 나머지 공간은 개가식 도서관처럼 온통 책장이 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방에서 책을 읽고 쓰거나, 답사를 떠나거나, 강의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거의 전부였다.

물론 지금도 그가 하는 일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날이 많아졌다는 것을 빼면. 그가 한 발언이나 글의 대부분은 학술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반응은 신문 사회면에 실리는 경우가 많다. 식민지 문제나 과거사 청산 같은 민감성 이슈들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에서 “위안부는 일본 국가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동원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 파문이 일자 그는 나눔의집을 방문해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에게 사과했지만, 그의 ‘소신’ 발언은 이후 계속되었다. 

지난해 11월에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쌀을 수탈했다는 국사 교과서 서술은 잘못이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는 이태진 교수(서울대·국사학) 등 국사학자들과 고종 시대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했다. 지난 4월29일 교과서포럼 주최 심포지엄에 나가서는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가 한국 경제의 모습을 잘못 서술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일제하 강제징집자 수가 부풀려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표 주자이다.

요즘 국내 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그는 요즘 국내 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진보적인 역사단체들은 그의 글이 발표될 때마다 반론이나 성명을 낸다. 교수가 된 후 20년간 책상물림으로 칩거하던 그가 갑작스레 ‘투사’로 변신한 이유가 뭘까.

“정치권에서 역사 영역을 침범했다.” 그의 첫 마디가 이랬다. 근대 역사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층성이 있는데, 정치권과 결탁한 일부 역사학자들이 단선적으로만 역사를 정의하려고 해 반발한다는 뜻이다. 그는 말하다 말고 일어서더니 책상에서 현재 읽고 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강제연행 강제노동 연구 길라잡이>라는 책이다. 책의 필자 중 상당수가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같은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학자들이다.

“과거사법이 통과된 뒤 현재 강제징용자 신고를 받고 있다. 국내 역사학자들은 6백만에서 8백50만명이 강제징용 당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7백94만명으로 나와 있다. 연인원이고 뭐고 아무런 표시도 없다. 그런데 1940년대 초반에는 20대 인구가 2백만명, 30대까지 합쳐도 3백20만명에 불과했다. 추측으로 역사를 쓰고, 피해를 서너 배 확대한다고 과거사가 청산될 수 있나?”

예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수치를 들며 새롭게 언급했다. “20만명이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교과서에 나온다. 당시 16~21세 여성 인구는 1백20만명, 그 중 70~80%는 기혼자였다. 그럼 결혼 못한 여자는 전부 다 위안부로 갔다는 말인가?”

이영훈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대학 시절 위수령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과거 마르크시스트였던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경제사를 전공했고, 1985년 <조선후기 토지 소유의 기본 구조와 농민경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한신대 교수가 된 그는 성균관대를 거쳐 2002년부터 서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는 이른바 ‘안병직 사단’으로 불리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가 1987년 경제사 전문 도서관 겸 공동 학술 연구를 위해 만든 낙성대연구실이 모태다. 1994년 사단법인 낙성대경제연구소로 확대되었다.

김낙년(동국대) 차명수(영남대) 이헌창(고려대) 김재호(전남대) 박이택(성균관대) 박 섭(인제대) 교수 등이 연구소의 주요 멤버다. 이들은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등 일본 강좌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과 함께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하고 있다. 이들은 연구 성과를 공유하며, 논문을 발표할 때 조율을 거치는 경우도 많다. 조선 후기 전공인 이교수가 식민지 시대는 물론 현대사 문제까지 발언할 수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낙성대연구소는 한때 진보적 경제사학자들의 산실로 통했다. 안병직 교수가 1980년대 중후반 일본 도쿄 대학 객원교수로 가 있는 동안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뒤부터 낙성대 팀의 색깔도 변했다. 이영훈 교수는 1996년 낙성대연구소의 한국 경제 데이터 베이스 구축 작업에 참여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 시작했다.

주위에선 오래 자초하는 소신행보 말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조선 후기의 경제 지표를 데이터 베이스화한 데 이어, 현재 일제 식민지 시대의 경제 데이터 베이스 구축 작업에 수년 째 매달려 있다. 당시의 통계 자료를 유엔이 권고하는 국민계정 체계에 맞추어 추계하고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이영훈 교수는 “데이터 베이스가 완성되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국제적인 비교 연구와 장기 분석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글이나 발언을 접한 언론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용기 있는 학자에서 뉴라이트 논객, 식민지 미화론자까지. 그는 “나는 실증주의자일 뿐이다. 정치적인 과잉 해석을 걷어내고 맨몸으로 역사를 보자”라고 말한다.

주변 인사들 중에서는 그의 행보를 우려하고 말리는 이들이 많다. 낙성대경제연구소 출신의 한 후배 교수는 “그의 발언이 본의와 상관없이 오해되고 있지만, 본인이 그럴 소지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분간 이런 행보를 계속할 참이다. 그는 중도·보수 학자들이 8월 말 펴낼 예정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총론을 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가장 아카데믹한 사회라 할 수 있는 서울대에서조차 조심스런 주목 대상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수년간 매달려온 프로젝트를 최근 완성해 <일제 식민지기 한국의 경제성장>이라는 제목으로 서울대출판부에 원고를 넘겼다. 그러나 책 제목 때문에 난관에 부닥쳤다. ‘식민지 경제성장’이라는 단어가 너무 튀었던 것. 결국 이들은 <한국의 경제성장:1911~1940>(가제)이라는 한참 에돈 제목으로 다시 출판 신청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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