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들, 작품 속에 투신하다
  • 백지숙(미술 평론가) ()
  • 승인 2005.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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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을 미디어 삼아 작업하는 조 습·옥정호·송상희의 예술 세계

 
몰래 카메라 류의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요즘 한참 인터넷 게시판을 달구었던 연예기획사 대표와 소속 개그맨들이 등장해서, 문제의 그 기획사 대표인 선배 개그맨이 군기를 잡으려고 하자, 후배 개그맨 한 명이 강하게 반항한다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작가 조 습의 작업은, 이를테면 이런 설정과 나란히 간다. 나아가 그러한 설정이 나오게 된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적 맥락과 그 여파까지를 포괄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안공간 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묻지마>(5월31일까지, 02-735-4805)에서, 조 습은, 개그맨처럼, 자신이 설정한 상황에 직접 등장해 자기 신체를 소재이자 제재이자 매체로 삼아 사람들을 ‘웃긴다’.

물론 조 습은 공중파 방송에서 활동하는 개그맨에 비해 소재의 금기에 대한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다. 아니, 주로 공중파에서 검열하는 소재를 다룬다. 그동안 작가가 다루었던 사건이나 상황은 군사 문화와 가부장제의 악독한 결합에 의해서 탄생된 것들로,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권력과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기형화한 문제틀을 하나의 미장센 안에 뒤범벅해 구겨넣는다.

이런 그의 작업을 보고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거나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동시에 화를 내거나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은 관객을 도발하는 것이다.

조 습의 개인전은 1905년부터 2005년 사이의 주요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배치하는 연대기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4·19와 5·16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적 사건들 사이사이에 마릴린 먼로의 한국 공연, 연쇄살인범 김대두 사건, KAL기 폭파 주범 김현희, 마라토너 임춘애 등의 사회 문화적인 아이콘들이 끼어든다.

흑백과 컬러 사진을 교차시키며 필름 스트립 식으로 배열한 이번 작업은, 외견상 조습의 작업이 점점 더 영화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주변의 평가를 입증한다. 스케일도 커지고 출연진도 ‘화려’해졌을 뿐 아니라 의상이나 분장도 격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작품 규모 상 저예산 영화의 수준을 따라 가려면 한참 멀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화적인 접근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한국 사회 폐부 찌르는 풍자적 표현들

조 습의 작업에서 미디어는 영화 카메라보다는 몰래 카메라에, 그러니까 현실로 구성해본 가짜가 아니라 가짜로 구성해본 현실을 겨냥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통상적인 의미의 블랙 코미디가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 습의 작품 앞뒤에서 현실은 좀더 강하게 우리를 압박한다. 그것은 현실의 연장이거나 예측이다. 

 
인사미술공간에서 <옥정호 초대전>(5월29일까지, 02-760-4721)을 열고 있는 옥정호의 작업도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해 한국 사회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경우 찌른다는 표현은 비판의 대상이 갖고 있는 특징을 정확히 드러내 주는데, 조 습과 마찬가지로 옥정호도 부족한 것이나 비어있는 지점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가득 차 있는 것,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것들을 터뜨리자는 식의 비판어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옥정호는 어려서부터 우리가 학습해온 국민 국가의 온갖 기호들, 온 국토에 가득 차 있는 그 상징들을 찌른다. 그리하여 각양각색의 공공조형물, 위인이나 신화적 인물의 초상, 지방자치단체의 엠블럼이나 마스코트 등 시각적 지표뿐 아니라 교가, 고장가 등의 노래, 위인전이나 표어에 등장하는 텍스트들을 ‘드래그’하여 몽타주 해낸다.

조 습의 작업이 영화적인 어프로치를 취한다면, 옥정호의 비디오 작업은 방송 프로그램의 한 유형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옥정호는 초능력 마술사로 분해서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이순신 장군상과 뉴욕에 있는 자유의여신상을 맞바꾸는 ‘세기의 대 초능력 쇼’를 보여주는데, 그 구성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류의 재연 방식과 유사하다.

영화산업의 첨단 컴퓨터그래픽일랑 완전히 무시하는 투로, 로테크 기법을 써서 눈속임 기술과 장치를 용감하게 비틀어버리고, 여기에 실제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을 편집한 후, 현장 중계 방송 형식까지 동원하여 그럴듯한 패러디물 하나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금기와 대적하려면 더 웃겨야 한다”

조 습과 옥정호의 작업을 놓고 엄숙주의자들은 작품의 재미 때문에 내용의 의미가 반감된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오히려 더 재미있고 더 기발하고 더 웃겨야 한다. 달리는 자본으로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금기와 홀로 대적할 작정이면 더욱 그렇다.

신체를 미디어로 하는 작업들이니만큼 이런 경향의 작업에 젠더의 특성이 반영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말 전시회를 가졌던 여성 작가 송상희의 작업은 앞의 두 작가와 달리 유머러스하다기보다는 자못 비장한 감이 있다. 2001년 개인전에서 ‘착한 딸이 되기 위한 몸짓’을 숙련하게 해주는 각종 신체 보정기를 창안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이 작가는, 2004년 전시에서 심사임당, 육영수 여사, 피에타 등 동서고금의 현모양처 아이콘으로 변신했다.

그 과정에서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동상의 표면을 흉내 내어 작가의 전신에 황금 칠을 함으로써 과장된 우상성을 드러낸다든지, 아니면 투명 랩으로 전형적인 포즈의 동상을 캐스팅하여 각종 스테레오 타입의 표피성을 드러낸다든지 하는 작업 방식을 보여주었다.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는 사건을 재연하는 송상희의 비디오 작업을 ‘아버지’ 박정희가 피살당하는 10·26 사건을 연출한 조 습의 사진 작업에 겹쳐놓고 볼 때, 그 성차의 구조는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아들을 잃어버린 피에타를 통해 여신의 의미를 재구성한 송상희의 작업 옆에, 동상 앞에 ‘호호호’라는 팻말을 들고 서있는 여신을 설정해 놓은 옥정호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여성 작가 송상희의 관점은 한층 부각된다.

특히 송상희의 작업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든 아니면 신화나 설화를 기초로 하든 간에, 코믹하고 불쾌하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 괴이하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위대한 인물이나 기호화한 도상을 다루는 작품보다 평범한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작업에서 강하게 부각되는데, 버스 안내양 복장을 하고 인천 바닷가에 서있는 작가를 멀리서 잡은 <푸른희망> 연작의 한 장면이 바로 그렇다. 자주색 유니폼을 입은 이 작가의 한쪽 소매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것은 갑자기 호러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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