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인 '위대한 사투'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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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 2세 김형률씨 타계...병마와 싸우며 국가 차원의 건강검진 등 이끌어내

 

지난 5월29일 ‘원폭 2세 환우회’ 김형율 회장이 세상을 등졌다.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곳곳에서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자는 행사들이 진행되는 와중이어서 그의 죽음은  역사 청산 작업이 너무 겉치레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김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보건복지부와 국회의 문턱이 닳도록 오가며 원폭 피해자 2세들이 겪고 있는 희귀 질환과 말못할 고통들에 대해 정부가 대책을 세워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복지부는 ‘일본에서도 공식으로는 아직 방사능 유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며 피폭 2세들이 호소하는 고통을 외면해 왔다. 그나마 지난 2월15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김형율씨 등의 진정을 받아들여 원폭 피해자 2세 건강 실태를 조사해 발표한 것이 미흡한 대로 성의 표시로 꼽을 만했다. 하지만 그뿐 정부는 아무런 후속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2002년에 피폭자 2세로는 처음 커밍아웃

  원폭 2세 김형율 환우회장이 살아 생전 걸어온 길은 가장 밑바닥에 팽개쳐진 일제 식민지 침탈 피해자들이 처한 환경을 그대로 대변한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어머니를 둔 김형율씨는 그동안 모체 유전성 질환이라고 알려진 ‘선천성 면역글로블린결핍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아왔다. 김형률씨가 자기 병이 방사능 유전과 연관이 있다는 단서를 잡은 것은 2001년이었다. 

1995년 폐렴 증세가 심해졌을 때 부산의 한 종합 병원에 입원해 검사와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김씨의 희귀병은 의료진에게도 연구 대상이었다. 피폭자 어머니를 둔 가족력과 김씨 질환의 상관관계에 주목한 의료진은 김씨를 대상으로 연구를 해 <면역글로블린 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글로블린 결핍증 1례>라는 제목의 의학 논문을 작성해 학계에 보고했다.

 이렇게 해서 자기 병의 단서를 찾아낸 김씨는 이후 번민에 휩싸였다. 피폭자 유전병 환자가 자기 문제를 공개 제기한 사례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2002년 3월15일 피폭자 2세로서 최초로 커밍아웃했다. 당시 김씨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불쌍한 피폭 2세 환우들도 숨어서 다들 죽어갑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김씨가 커밍아웃한 뒤에도 한국 정부는 냉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김씨는 관심을 일본으로 돌렸다. 인터넷을 통해 일본인 피폭자 2세 모임에 자기 사연을 담은 메일을 수시로 보내자 일본에서 반응이 왔다.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시민회)라는 민간단체가 2002년 5월23일부터 1주일간 김씨를 초청한 것이다.

김씨는 자기를  상대로 한국 의료진이 비밀리에 제출한 연구보고서와 방사능 유전 관계 자료들을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국원폭 2세 환자의 일본 방문과 커밍아웃은 그무렵 일본 언론에도 널리 보도되었다. 시민회는 김씨의 질환에 대해 히로시마 대학 의과대학에서 혈액내과 전문의의 정밀 진료를 주선했다.

  자기 병의 뿌리를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에서 찾으려고 애쓰던 김형률씨는 일본인 원폭 연구가 이치바 준코 교수가 쓴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일본어 책 두 권을 손에 넣었다. 김씨는 이 책의 저자와 e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한국어판으로 국내에 소개하자고 설득했다. 2003년 7월 이렇게 해서 한국어판 <한국의 히로시마>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피폭 2세 유전병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뛰는 김형율씨의 투혼에 감복한 이치바 준코 교수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의 용기의 원천이자 본서가 한국에서 출판된 원동력은 부산에 사는 피폭 2세 김형률씨이다. 그는 내게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 피폭자에게 안겨주었던 피해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피해가 한국의 피폭 2세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김형률씨는 스스로의 병고와 불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졸저를 만났다.

그러한 열정이 한국 역사비평사 김백일 사장의 마음도 움직였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의 출발점은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에 있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는 일본과 한국 역사를 바로 인식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다.’

 김형률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의 각 시민·인권 단체 문을 두드렸다. 그 결과 2003년 봄 인권운동사랑방·건상세상네트워크·평화만들기·아시아평화인권연대 등 8개 시민·인권 단체가 뭉쳐 ‘원폭 피해자와 원폭2세 환우회를 돕기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꾸렸다. 공대위는 김형률씨의 주장과 뜻을 받아들여 국가인권위원회에 원폭 2세 환우들을 위한 건강검진 실시를 촉구했다.

특별법 제정에 열정 쏟다 피 토하고 쓰러져

 김형률씨는 이때부터 초인적인 나날을 보냈다. 공대위 회의가 주로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한 달에 한두 차례씩 아버지나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서울을 오가야 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천리길도 김씨에게는 10만리 길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고통스런 여정이었지만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김형율씨가 목숨을 걸고 세상과 사람들을 감동시켜 움직여낸 결과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주관하는 원폭 2세 건강검진이었다. 인권위는 국가기관 최초로 2005년 2월14일 원폭 피해자 2세에 대한 기초 현황 및 건강검진 실태를 조사한 뒤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원폭 2세들은 같은 나이의 일반인에 비해 빈혈·심근경색·협심증 등 만성 질환과 우울증·정신분열, 각종 암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의 원폭 2세 가운데 1천2백26명에 대한 우편 설문조사 결과 남성은 일반인에 비해 빈혈 88배, 심근경색 및 협심증 81배, 우울증 65배, 정신분열증 23배, 천식 26배, 갑상선 질환 14배, 위십이지장궤양 9.7배, 대장암 7.9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폭 2세 여성의 경우도 심근경색 협심증 89배, 우울증 71배, 유방양성종양 64배, 천식 23배, 정신분열증, 18배, 위십이지장궤양 16배, 간암 13배, 백혈병 13배, 갑상선 질환 10배로 높게 나왔다.

 김형율씨는 이후 공대위와 함께 원폭 피해자 및 2세 환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김씨는 숨지기 열흘 전인 5월18일, 국회에서 이 특별법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하기도 했다. 또 5월22일부터 사흘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과거청산을 위한 국제 연대 협의회’ 주최 심포지엄에 참여해 발제를 한 뒤 5월24일 귀국했다. 생애 마지막이 된 일본 행사에서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

“지난 60년 동안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2세 환우들의 참혹한 삶을 국가와 사회가 외면했습니다. 이제 이들에 대해 법적으로 생활 원호와 의료 원호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런 특별 입법을 통해 핵무기의 잔혹함을 후세에 기억 계승시켜 그 위협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인권과 평화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김씨는 결국 이런 활동과 절규로 생애 마지막 나날을 불꽃처럼 태우고는 닷새 만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뒤 영영 일어서지 못했다.

“김형율씨는 60년 동안 묻혀왔던 역사를 혼자서 3년 만에 캐내느라 자기 삶을 다 소진했습니다. 이제 그를 보내주고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결실해야 합니다.” 5월30일 부산 영락공원 납골당에 잠드는 김씨에 대한 조사에서 장례위원장을 맡은 강주성 공대위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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