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 적이 되 는가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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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 정국이 전·현직 대통령의 ‘권력 투쟁’으로 비화했다. 동교동계 전체가 들고일어날 태세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누가 내전의 승자가 될 것인가.
 
도청 정국이 김대중-노무현 전·현직 대통령 간의 내전 양상으로 비화했다. 지난 8월5일 국정원이 국민의정부 때인 2002년 3월까지 불법 도청이 있었다고 발표할 때만 해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확전이다.

국정원의 뜻밖의 자기 고백에 김대중 전 대통령측은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그래서 첫 반응은 유감을 표명하는 선에서 그쳤다. 하지만 이틀 만에 동교동 기류가 바뀌었다. 동교동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DJ가 이종찬 원장부터 신 건 원장에게까지 일일이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치밀하고 꼼꼼한 DJ가 그저 감정적으로 폭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같은 확인 작업을 거친 뒤에야 최경환 비서관을 통해 DJ는 불편한 심기를 쏟아냈다는 설명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간에 터진 갈등은 2003년 대북송금 특검에 이어 두 번째다. 대북 송금 특검을 노무현 대통령이 수용할 때만 해도, 동교동측은 대응을 자제했다. 억울하지만 속으로 삭인 셈이다. 동교동측 한 인사는 당시 분위기를 ‘숙명론’으로 설명했다. “새 정권이 출발하면서 전임 정권을 밟고 간다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다. 인내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DJ 역시 불편한 속내를 곧바로 드러내지 않았다.

특검에 대해 부당하다는 의견을 DJ가 처음 밝힌 것은 그 해 6월13일이었다. 3월14일 특검이 시작되었으니, 마무리되는 시점에서야 DJ는 불편한 심기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석 달 가까이 그는 침묵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DJ에 대해 상당히 배려를 했다. 청와대 참모진은 DJ에 대한 수사를 반대한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고, 노대통령은 특검의 수사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동교동측에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북송금 특검은 전·현직 대통령 모두에게 후유증이 컸다. 임동원·박지원 씨 등 DJ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측근들이 사법 처리되었고, ‘돈을 주고 노벨상을 받았다’는 야당의 비판에 DJ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지지 기반이 이탈하는 아픔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도 상당 기간 경색되었다.

그때 상처에 비해 이번에 DJ가 받았을 상처가 더 컸으리라는 것이 동교동측의 설명이다.  DJ의 불편한 심기가 이틀 만에 직설적으로 표출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최경환 비서관은 “그만큼 받은 충격이 크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대북송금 특검 때와 달리 청와대로부터 어떤 설명도 받지 못한 불쾌감도 작용했다.

청와대는 동교동과 조율할 내용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동교동측은 접근 방식을 문제 삼는다. 조율은 하지 않더라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반론권을 주는 차원의 성의는 보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대북송금이 정책 문제였다면, 도청은 DJ의 인격에 대한 문제이다”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어떤 증거도 내놓지 않고 발표만 하면, DJ뿐 아니라 국민의정부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내전은 8월10일 김 전대통령이 입원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동교동 주변에서 마음의 병이 원인이라는 말까지 돌면서, 범 동교동계 거병까지 거론되고 있다.
당초 동교동계는 8월13일 도쿄 생환 32주년을 맞아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리는 기념 미사에 대거 참석할 계획이었다. 동교동측 한 인사는 “만일 이 날 모였다면 자연스럽게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왔을 것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DJ 세력 버리고 영남 세력과 대연정?

그러나 DJ가 입원하는 바람에 모임은 취소되었다. 조만간 동교동계는 어떤 식으로든지 회동할 계획이다. 8월11일 DJ가 입원한 세브란스병원을 찾았던 동교동측 인사는 “모여야 한다는 데 이심전심이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대응 계획은 없다”라고 말했다.

이번 내전이 확전 양상으로 치닫는 데는 시중에 퍼져있는 음모론도 한몫 했다.  민주당이나 동교동계는 노대통령이 새 판 짜기에 나섰다는 의혹을 던지고 있다. 노대통령이 기득권을 내놓으며 한나라당과 대연정 카드를 꺼냈지만 시들해지자, 특유의 정면 돌파수를 띄운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호남에 기반을 둔 국민의정부 세력과 결별하고, 영남 세력과 대연정을 추진하려는 포석으로 도청 정국을 활용하려 한다는 시나리오이다.

음모론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동교동계나 민주당은 특검 이후 민주당을 깬 노대통령의 전과를 거론하며, 자신들에 대한 의도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 간의 내전에 열린우리당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DJ는 불법 도청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며 연일 ‘DJ 살리기’에 나서면서, ‘도청 원조당’이라며 한나라당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진상 규명을 통한 제대로 된 명예 회복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전남 지역의 한 의원은 “검찰이든 특검이든 하루빨리 진상을 밝혀 DJ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말했다.

당황한 청와대도 수습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8월11일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DJ를 찾아, 국정원 발표에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노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DJ도 노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처럼 양측은 더 이상 확전을 바라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확전으로 치닫게 하는 변수가 많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검찰 수사도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 검찰은 국민의정부 시절 국정원장들을 소환할 방침이다.

전·현직 대통령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 종전이 아니라, 휴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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