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풍기는 오래된 악취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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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씨 ‘회고록 폭로’로 역대 정권 비자금 도마 위에

 
1989년 5월30일 저녁 8시50분. 상도동 김현철의 아파트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 김영삼 총재에게 20억원(신한은행 본점 영업부장 대리 박상섭, 서울 01-263009, 1억원짜리 수표 20매(라10750362~라10750381)과 여비 2만 달러를 전달했다. 김영삼 총재는 봉투를 받으면서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부담감을 느끼는데”라면서 “앞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혁명적인 일입니다”라고 화답했다.(417쪽)

1989년 12월20일 저녁 9시30분. 상도동 김현철 아파트 내실에서 김영삼 총재와 1시간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YS에게 노대통령의 연말 성의를 전달했다. 1000만원짜리 수표 100장으로 도합 10억원이었다(한국상업은행 제동지점장 대리 손기영, 1989년 12월4일자, 서울 01-2211135, 바가01339701,바가01339703~바가1339800, 바가01339558).  김영삼 총재는 “믿으니 받는 겁니다”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466쪽)

1990년 1월24일 저녁 9시30분. 상도동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 설 연휴를 앞두고 대통령이 전달하라고 한 10억원을 건네주었다. 김총재는 “대통령에게 감사드린다고 말씀을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485쪽)

‘친절한 박철언씨’ 수표번호까지 제시

 
박철언씨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나오는 YS의 ‘40억+알파’ 수수 부분은 이렇게 세 장면이다. ‘메모광’인 박철언씨는 수표 번호까지 꼼꼼하게 제시했다. ‘친절한 박철언씨’의 폭로에 YS측은 ‘너나 잘하세요’라는 반응이다.

상도동의 한 측근은 “금시초문이다. 앙숙의 발악이다”라고 말했다.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에 대해 “아이고, 날씨가 덥구만”(7월31일)이라며 동문서답을 했던 YS는 이번에는 아예 침묵하고 있다.

박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YS가 40억원을 받았다는 시점은 1990년 3당 합당 전후. 1990년 1월22일 YS는 노태우-김종필과 함께 ‘구국의 결단’이라며 3당 합당 기자 회견을 했고, 그 이틀 뒤 상도동 집에서 10억원을 받은 것이다. 박철언씨가 주장한 대로라면, ‘숭고한 구국의 결단’ 뒤에는 ‘추악한 검은돈 거래’가 있었다.

박씨의 회고록을 계기로 15년 만에 드러난 3김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 검은돈이 다시 화제다. 최근 정계·재계·검찰까지 엮인 X파일 정국과 맞물리면서 더욱 그렇다.

소문으로만 돌던 검은돈이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낸 것은 1995년. 바로 전·노 비자금 수사 때이다. 이 수사로 음지의 검은돈이 양지로 나왔다. 발단은 소문이었다. 그 해 8월 서석재 총무처장관이 전직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 보유설을 흘렸다. 서장관은 이 발언으로 장관 직에서 물러났고,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직 대통령의 돈으로 둔갑했다’며 촌극이라고 결론 냈다. 수서 택지 분양 사건(1991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1993년), 한양그룹 비자금 사건(1993년), 상무대 비리사건(1995년) 등 검찰은 매번 그랬듯이 권력과 연결된 검은돈을 피하기에 급급했다(이 사건들은 나중에 노태우씨가 모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불과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박계동 의원이 1백28억2천7백여만원이 예치된 계좌의 예금조회표를 흔들며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했다. 빅뱅의 시작이었다.

노태우씨 비자금 수사는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검은돈은 서로 통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전씨 비자금 수사로 이어졌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검은돈을 둘러싸고 물고 물리는 양상이 밝혀졌다. 당시 수사에 반발하는 전씨를 공략할 약점은 재임 기간에 축적한 비자금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단서가 없어 난감했다. 이때 검찰 수사 라인에 전두환 비자금 파일이 내려왔다.

16절지 30장 분량으로, 파일에는 ‘전 대통령이 88년 퇴임시 갖고 나간 비자금 1천4백억원’ ‘안현태·장세동·이원조 등이 비자금 조성’ ‘비자금 관리는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 김종상’ 등 전씨의 치부책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전씨의 청와대 금고지기였던 김종상씨가 관리하던 계좌번호·채권 번호·금액까지 워드프로세서로 정리되어 있었다. 당시 검찰 수사팀은 이 자료를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노태우·김영삼, 전임자 비자금 낱낱이 조사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파일을 만든 이는 노태우씨였다. 노씨가 집권 초반 안기부에 지시해 1년간 전씨 비자금을 파악한 결과였다. 원본은 사라졌는데, 당시 안기부에 남아있던 사본을 검찰 수뇌부가 구해 수사에 이용한 것이다.

이렇듯 권력자는 검은돈을 창과 방패로 삼는다. 1987년 전두환씨는 검은돈을 모아 노태우씨에게 대선 자금을 지원했고, 1992년  노태우씨 역시 YS에게 대선 자금을 지원했다. 둘 다 퇴임 후 자신을 보호할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노태우씨나 YS는 집권하자마자 전임자의 검은돈을 역추적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전임자를 공략할 창으로 삼기 위해서다. 노씨가 전두환씨 비자금을 캤듯, YS도 노씨의 검은돈을 추적했다.

노태우 비자금을 수사할 때도 검찰 수사팀은 비밀 파일을 받았다. 재계 인사들을 소환하기도 전에 담당 수사 검사들은 노란색 표지의 봉투를 받았는데, 파일에는 기업인들이 노씨에게 건네준 돈의 액수와 시기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1994년 대검 중수부는 노태우 비자금과 관련된 재계 인사들을 내사해둔 상태였다. YS 역시 노씨의 비자금이 터지기 전에 어느 정도 그 규모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1995년에 불거진 DJ의 ‘20억+a’

그러나 창과 방패는 한 번도 부딪치지는 않았다. 사용하지 않을 때 오히려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박철언씨 회고록에 나오듯이, 전두환씨측은 이순자씨를 비롯해 전씨 측근들이 여러 번 폭탄 선언을 하겠다며 노씨측을 압박만 했다. 1995년 비슷한 처지에 놓인 노태우씨도 중대결심설을 흘렸지만, 끝까지 YS에 대한 대선 지원금은 함구했다. 검찰 역시 수사의 마지노선인 현직 대통령의 정치 자금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때 수사를 주도한 이는 당시 안강민 중수부장이다. ‘불독’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그는 수사진을 다그쳐 이건희·정주영·김우중 등 내로라 하는 재계 인사들을 압박했다. 이것이 악연이 된 것일까? 최근 불거진 삼성의 X파일 녹취록에 나오는 떡값 제공 검찰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도한 YS는 재임 기간에 자신은 한푼도 안 받았다고 큰소리쳤다. 그러자 검은돈은 거산(巨山;YS의 아호)으로 통하는 지름길인 홍인길씨와 소산(小山김;현철)에게 몰렸다. 1997년 결국 둘은 한보 사건으로 사법 처리되었다.

검은돈이 실체를 드러낸 1995년에는 DJ 비자금도 일부 공개되었다.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베이징에서 스스로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실토한 것이다. 금기로 여겨지던 정치 자금을 스스로 밝힌 김대중 총재는 두고두고 ‘20억+а’ 논란에 시달렸다.

YS가 40억 받았다면 JP는?

1992년 노태우씨로부터 DJ에게 20억원을 전달한 이가 김중권씨다. 김씨가 수필집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에서 밝힌  돈 전달 과정은 이렇다.

‘1992년 11월 예쁘게 포장한 리본까지 달린 와이셔츠통을 가지고 목동 처제 집에 있던 김대중 총재를 찾았다. 말을 꺼내기 어려웠지만, 대통령이 전달해 달라고 했다고 말했고, DJ는 정색을 하면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어색한 순간이 흘렀고, 김총재가 최재승 비서관을 불러 그 자리에서 풀었다. 100만원짜리 수표 100개를 묶은 20다발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나중에 권노갑 의원이 고맙다고 하더라.’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중권씨는 국민의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DJ는 1997년 신한국당이 폭로한 DJ 비자금 파일로 곤욕을 치렀다. 동교동계로 정치에 입문한 강삼재 의원이 DJ 저격수로 나서, 이회창의 병풍(兵風)을 덮을 DJ의 금풍(金風)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DJ 비자금 폭로는 신한국당에 부메랑이 되었다. 김태정 검찰총장이 수사 유보를 결정하자, 이회창측은 YS-DJ 연대론을 주장하며 자중지란에 빠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통추 멤버였다. 유인태·원혜영 등이 참여한 통추는 ‘검찰의 철저한 진상 규명이 선행되어야 하고, 사실로 판명되면 DJ도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목소리를 냈다. 

DJ가 당선된 뒤, 김태정 총장 체제에서 검찰은 DJ 비자금과 관련한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DJ가 취임하기 하루 전이었다. 뻔한 수사 결과였지만, 노태우씨 돈 3억3천만원이 평민당 계좌로 입금된 것이 밝혀졌다. 이를 두고 야당은 플러스 알파가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영원한 2인자 JP의 정치 자금은? 1980년대에 정치에 복귀한 이래 JP의 정치 자금은 소문만 무성했을 뿐 좀처럼 양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JP도 2003년 안대희 중수부장의 칼을 비켜가지 못했다. 불법 대선 자금 수사 과정에서 JP가 2002년 6월 삼성으로부터 15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재판부는 고령인 점을 감안해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지난 8·15 때 특별 사면 복권되었다.

박철언씨 회고록에 JP의 비자금과 관련된 대목이 한 군데 나오는데, 1989년 현대 정주영 회장의 말을 빌려 “5대 그룹 총수가 JP에게 25억원, YS에게 10억원을 제공했다”라고 밝혔다. 박철언씨는 노태우씨가 자신을 통해 3당 합당 분위기 조성을 위해 YS에게 40억원을 제공했듯, JP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검은돈이 제공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3김 시대의 검은돈에 얽힌 역사는 흘러간 과거사가 아니다. 안기부의 X파일 정국으로 정치권의 시계는 1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2백74개에 달하는 불법 도·감청 테이프가 어떤 식으로든 공개된다면, 검은돈을 둘러싼 2차 빅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내용의 일부만 공개되었는데도 거세게 몰아친 후폭풍을 볼 때, 다가올 빅뱅은 10년 전의 그것과 비교도 안될 만큼 폭발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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