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웅’을 발굴하라
  • 최원모 (비교신화학 박사) ()
  • 승인 200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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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시원은 판타지의 보고…민족주의 극복은 과제

판타지가 세계 대중 문화의 한 흐름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무한한 가능성을 무엇에서 찾을 것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을 대표하고 세계 판타지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판타지 코드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먼저 판타지와 동일한 태생적 기원을 갖는 영웅 서사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웅 서사시가 여러 신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신화에 비해 더 대중적인 성격을 지향하듯 판타지 또한 신화적 요소를 많이 차용하고 있으며, 대중의 인기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웅 서사시의 어떤 점을 주목할 것인가? 영웅 서사시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거기에 따른 여러 부류의 영웅이 등장한다. 전투에 능한 전투 영웅, 새로운 문물을 가져오는 문화 영웅, 도덕적 이념에 충실한 도덕 영웅 등등. 이 중 전투 영웅과 문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서사시는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비교적 유사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다.

한국형 판타지에는 문화영웅이 제격

 
따라서 이들 영웅을 소재로 한 판타지 코드를 만드는 것이 효용성이 있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특성이 잘 드러나면서 세계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역시 문화 영웅 쪽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제주도의 <세경본풀이>는 자청비라는 여성 문화 영웅을 내세워 곡물의 기원을 설명한, 즉 우리가 어떻게 오곡을 얻어서 경작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 서사시이다.

또한 이 서사시에서 자청비는 천상적 존재와의 결연에 능동적일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도 전사로서의 용맹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문화의 기원, 애정에 기반을 둔 남녀의 결합, 전투 세 가지 요소이다. 즉 곡물과 같은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기 위해서는 남녀의 결합이 필연적이며, 그것은 때로는 전투를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판타지 코드로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문화의 기원 코드’라고 정리하면 어떨까? 특히 인간의 근본적 욕구와 생활을 충족해 주는 의식주의 구성 요소들이 어떻게 마련되었는가를 판타지로 풀어내는 쪽으로 정리하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문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시가 흔히 그렇듯, 이들 각종의 구성 요소는 남성 또는 여성으로 형상화하는 정령이며,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문화 영웅은 여러 테스트, 전투 등을 거쳐 마침내 그 정령을 손에 넣게 된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문화 습득이란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대상과의 결합이 필수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민족주의로만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볼거리가 화려한 전쟁 코드의 판타지에 견주어 볼 때 스펙터클한 요소가 적으니 흥행에 밀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토리를 얼마나 흥미 있게 구성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는 판타지 코드인가 여부이다.

한국 판타지가 민족주의로 가는 것은 나름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판타지 코드로 성장하기는 어렵다. 앞으로의 판타지 코드는 민족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문화의 기원’이라는 판타지 코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근래에 판타지 소설, 판타지 영화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판타지가 마치 21세기 문화의 화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지칭하는 명칭만 다를 뿐 판타지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우리의  신화와 설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온고지신’을 통해 오늘날 대중 문화의 핵심 코드로 자리 잡은 판타지코드를 우리 것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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