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 기록 유산이 우리 드라마 살린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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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안기록·실크로드 개척사 등은 상상력 보고

 
때는 조선 후기, 피해자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칼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칼은 깨끗이 씻겨져 도저히 혈흔을 찾을 수 없었다. 관아의 실력자와 줄을 대고 있는 범인은 계속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과연 수사관들은 조각칼에서 혈흔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또 다른 사건.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위장된 시체가 보인다. 그러나 맞아서 죽거나 혼절한 상태에서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목을 맨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몸에서 멍자국을 찾아내야 하는데, 죽은 지 너무 오래 되어 이를 찾을 수가 없다. 수사관들은 멍자국을 다시 보이게 할 수 있었을까?

답은 모두 ‘가능했다’이다. 칼에서 혈흔을 찾는 것은 칼을 달구어 식초를 부으면 된다. 멍자국을 다시 보이게 하는 것은 대파의 흰 부분인 총백을 얇게 펴서 바르고 그 위에 초지게미를 얹으면 된다. 조선 시대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과학 수사가 가능했고, 이를 실천했다. 범인을 곤장으로 족쳐서 자백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수사를 선호했다.

MBC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은 바로 이런 조선 시대의 과학 수사를 소재로 한 시리즈물이다. 이 시리즈는 살인 사건을 엄격히 판결하기 위해 초검·재검·삼검에 사검까지 거쳐서 검시하고, 방대한 탐문과 심문으로 유죄와 무죄를 가리는 조선 시대의 수사를 드라마로 재현했다.

조선시대 검안기록 자료 덕분에 프로그램 완성도 높여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 제작이 가능했던 것은 한 벤처 기업이 제작한 ‘조선시대 검안기록을 재구성한 수사기록물 문화 콘텐츠’ 덕분이었다. 상세하게 기록된 조선 시대의 살인 사건 수사기록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엠에이컴의 박종영 대표는 이를 디지털 콘텐츠로 제작했다. 그는 사망한 사람의 시체 검사 소견서를 포함해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한 조사기록을 묶은 검안 기록 5백31건과 황해도 감영의 수사 기록 27건을 요약하고 이 중 50건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자료를 제작했다.

검안 기록을 최초로 발굴한 사람은 김 호 박사(경인교대 강사)였다.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하던 그는 규장각 지하 서고에서 방대한 양의 조선 시대 살인 사건 수사 기록을 발견했다. 조선 시대에는 살인 사건의 경우, 중앙 정부에 수사 결과 보고서를 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자료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세했다. 해외 학회에도 보고되었는데, 중국과 일본에도 비슷한 기록이 없는 소중한 자료로 판명되었다.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 제작진을 도운 또 하나의 기록은 조선 시대 법의학 지침서였다. 원나라의 <무원록>을 세종대에 최치운이 새롭게 주를 단 <신주무원록>과, 다시 이를 보완하여 정조대에 편찬된 <증수무원록>은 참고서 노릇을 해주었다. 검시 방법을 비롯해 각종 수사 기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이 책은 고증할 수고를 덜어주었다.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은 재벌 2세와 신데렐라의 사랑 이야기만 자기 복제하는 트렌디 드라마에 편중된 텔레비전 드라마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출을 맡은 김흥동 PD는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이 소재와 주제를 다양하게 해주어서 전문 드라마를 개척할 여지를 열어 주었다”라고 말했다.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은 올해 추석 연휴 기간에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되고, 이후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될 예정이다.

드라마 <다모>로 새롭게 퓨전 사극의 영역을 개척한 정형수 작가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계획 중이다. 정작가는 “현재 세계적인 드라마의 트렌드는 미스터리물과 각국의 고유한 문화를 보여주는 드라마 위주로 팔린다는 것이다. 이 두 조건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투자사와 배급사 모두 이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후반기에 대본 작업에 들어가 2006년 상반기에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활용 가능한 문화원형 디지털 컨텐츠 무궁무진해

그러나 <다모><혈의 누> 등 드라마와 영화에서 조선 시대 수사물이 연이어 성공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콘텐츠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콘텐츠를 개발한 엠에이컴의 박대표는 “드라마 제작사와 영화 제작사를 만나 수없이 설득했지만 콘텐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흥행을 위해 유행만 추구하는 그들은 이 콘텐츠의 진면목을 볼 안목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박대표가 조선 시대 검안 기록을 디지털 콘텐츠로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 디지털 콘텐츠화 사업’ 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은 2002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이 사업을 실시하고 연간 100억원 안팎의 지원금을 우리 문화의 원형을 디지털 콘텐츠로 제작하는 작업에 투자했다. 

연간 40여 가지의 문화 원형이 디지털 콘텐츠로 제작되고 있는데, 조선 시대 검안 기록 외에도 다양한 자료가 드라마와 영화 제작에 활용되고 있다. ‘고구려 백제의 실크로드 개척사 디지털 복원’ 자료가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며, ‘조선 후기 한양 도성 복원을 통한 디지털 생활사’ 자료가 영화 <왕의 남자>에 활용되었다. 이외에도 게임과 캐릭터 산업 등에 복원된 문화 원형이 이용될 예정이다.

문화콘텐츠진흥원 김기현 문화원형사업팀장은 “5년간 총 5백억원이 투입되는 이번 사업을 통해 중요한 우리 문화 원형에 대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이를 적극 활용하려는 곳이 많지 않아서 아쉽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콘텐츠가 대중 문화에 적극 활용되기 위해서는 원재료를 매력적인 2차 자료로 가공해서 제작자를 끌어모으는 ‘콘텐츠 디벨로퍼’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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