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해법 은 공동체적 협력”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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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동반 성장 전략’ 미공개 보고서 단독 입수/이정우 전 정책기획위원장 등 특별 연구팀이 작성

 
노무현 대통령·이해찬 국무총리·열린우리당이 최근 일제히 하나의 화두를 꺼내들었다. ‘양극화’라는 화두였다. 참여정부 반환점을 통과한 시점인 8월25일 전후로 이들은 양극화 해소에 ‘정면 대응’ 혹은 ‘집권 후반기 최대 과제’ ‘국정 최우선 과제’ 등의 지위를 부여하며 한목소리를 냈다. 연정과 임기 단축 같은 폭발력 큰 정치 이슈에 묻혀 언론의 주목도가 덜하기는 했지만, 노무현 정부가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올인’하겠다는 의지를 재차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이미 노대통령은 올 신년사와 1월13일 신년 기자회견, 2월25일 국회 국정연설 등에서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혀 왔다. 그는 ‘동반 성장’으로 요약되는 처방전도 제시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첨단 산업과 전통 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그리고 상·하위 계층의 소득 격차라는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동반성장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경기가 좋아진다 해도 경기 회복의 온기와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될 뿐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의 동반성장론이 어느 날 갑자기 급조된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날로 심해져온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더 지속된다면 성장 잠재력과 사회 통합의 기반마저 크게 훼손되리라는 위기 의식은 지난해부터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 일부 참모들이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동반성장 연구팀, 기존 정책 전면 재검토 강조

지난 2월 중순 완성된 ‘참여정부, 동반 성장의 길’이라는 비공개 보고서는 양극화에 적극 맞서려는 이들의 첫 시도였다. 당시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장이 지휘했던 ‘동반성장 연구팀’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참여정부의 총체적 처방전 성격을 띠고 있다. 그동안 양극화에 대한 정부와 국책 연구소와 학계의 논의를 집대성했으며, 구체적인 정책 제시와 실행 계획까지 담았기 때문이다(이 보고서는 지난 6월 <양극화 해결을 위한 동반성장 전략 개발>이라는 책으로 묶여 연구 용역을 의뢰한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장에게 공식 제출되었다).

 
청와대 비서관과 산업연구원·금융연구원·노동연구원 박사 등 10명으로 구성된 동반성장 연구팀은 이 연구를 지난해 11월 ‘경제의 양극화 추세가 시장 기능에 의해 자동 조절될 것인지, 아니면 정부의 정책 전환이 필요한 것인지를 검토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했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11월5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우천식 박사팀이 낸 ‘한국 경제의 구조 변화와 양극화’라는 보고서를 ‘인상적으로’ 읽은 후 이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한국개발연구원 비공개 보고서의 결론은 성장 주도 정책을 견지하되, 구조 조정 과정(경쟁)에서 밀려난 약자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좀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시장 기능에 의한 자동 조절’에 무게를 둔 것이다. 지난 1월28일 나온 후속 보고서에서도 한국개발연구원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기조를 유지`강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재확인했다. 양극화 현상은 구조 조정 과정의 부작용일 뿐이며 오히려 현재의 구조 조정을 확대`심화해야 극복 가능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반면 동반성장 연구팀은 기존 정책 틀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거의 정반대 결론을 도출했다. 이들은 현재의 정책 기조를 지속·강화하는 한 생산 차원에서의 양극화(부문별 성장 격차) 현상이 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재분배 차원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비용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고 인식한다.
 
이런 인식은 성장을 통해 파이를 키워야 분배할 수 있다는, 한국 경제의 ‘성장→분배 메커니즘’ 이른바 ‘적하(滴下) 효과(trickle down effect)’가 약해져 있다는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다. 좋은 예가 수출 호조가 내수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인데, 국내 산업 간의 연관성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은 재분배 기제가 취약해 성장의 상생 메커니즘도 기대할 수 없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성장하면 자연히 분배도 가능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양극화의 원흉은 세계화다. 1980년대 이래 본격적으로 진행된 세계화 흐름은 노동 시장 유연화와 글로벌 경영을 확산시켰고, 이것이 대기업·중소기업간,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양극화로 나타났다. 한국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단기간에 급진적 방식으로 세계화에 전면 노출되었다. 결국 세계화가 불러들인 구조 변동의 최종 결과가 양극화인 셈이다.

연구팀은 이 구조적 원인을 치유하는 새로운 정책 기조가 필요하며 그러한 비전을 ‘동반 성장의 길’로 요약했다. ‘동반 성장론 10인 기획자’가 제시한 키워드는 ‘공동체적 협력에 의한 동반 성장’과 ‘참여경제 해법’이다.

 
 공동체적 협력이 동반 성장의 원리가 되는 까닭은 ‘피의자(죄수) 딜레마’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임금 협상 같은 이해 관계가 뚜렷이 대립하는 경우, 장기적으로 고임금과 고생산성이라는 ‘높은(좋은)길(High Road)’로 이동하는 것이 노사 모두에게 유리하지만, 현실은 저임금과 저생산성이라는 ‘낮은(나쁜) 길(Low Road)’로 나타난다. 불신하고 있어 당장 유리한 것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참여는 생산성 향상(혁신)과 사회적 포용(통합)에 의한 동반 성장을 표현하는 전략 개념이다. 참여는 기회 부여와 기회 활용을 동시에 의미한다. 교육 같은 기초재에 대한 접근성을 사회가 보장하고 나아가 그 기회를 활용해 개인 및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도록 제도화하는 것이다.

임금 격차 해소 방안으로 ‘연대 임금제’ 제시

연구자들이 공동체적 협력과 참여 해법에 따라 제시한 주요 대안들은 부문 별로 정리되어 있다. 금융 분야의 경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의 지역재투자법(CRA) 같은 제도 도입이다. 지역 주민으로부터 예금을 받은 금융기관이 그 지역 개발과 저소득층·중소기업 지원에 적극적 역할을 하게 하는 이 법은 지역의 문제 해결을 지역 스스로 모색하는 해법이다. 한국의 경우 국영 금융기관인 우체국이라는 인프라가 있지만, 우체국 활용 방안은 우체국에 대출 기능이 없고 감독 문제 등 난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연구자들이 우체국 해법을 제시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민감하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교육 소외를 막기 위한 신용보증 방식의 새로운 학자금 대출 제도와 중소기업 전문 신용정보기관 설립 같은 시장 해법도 눈에 띈다.

지역재투자법과 유사한 제도가 ‘빈민은행(Micro Credit)’이다. 사회 구성원의 참여에 의한 기부금이나 정부 보조금을 재원으로 하여 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된 계층에게 창업 자금을 제공하는 제도다. 민간이 주도하느냐 민관 합동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방글라데시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빈민 은행을 통해 농촌 빈곤 여성과 게토 지역 청년층, 신용불량자 같은 금융 시장에서 탈락한 계층을 돕고 있다.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근로소득보전세(EITC) 제도도 근로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이들이 자립하도록 돕는 대안이다. 이 제도는 현재 정부가 구체안을 짜고 있어 그 어느 대안보다 추진될 공산이 높다. 

 기업간 양극화 해소 해법은 기본적으로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서 시작해 산업 클러스터 활성화와 지역 혁신 체제 구축으로 완결된다.  산업 클러스터의 핵심 구성 요소는 집적과 네트워크. 연관된 독립 기업·대학·연구소·지역 금융기관을 비롯한 비즈니스 서비스 기업 등이 집적하여 수평적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상승 효과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산업 클러스터에 지역 단위 거버넌스 체계(지자체·지역 노사정협의회 등)가 형성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협력과 신뢰 기반이 갖추어지면 그야말로 지역 혁신 체제가 구축될 수 있다. 스웨덴의 시스타, 핀란드의 울루,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은 세계 주요 클러스터들은 공통적으로 지역내 제반 경제 주체들이 협력적 네트워크와 참여적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해 지역 전략 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연구자들은 현대자동차가 자리한 울산이 자동차산업 클러스터로 유망하다고 보고 있다.

 양극화를 누그러뜨리는 해법이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지만 노동 시장 양극화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힌다. 성장한다 해도 아예 고용이 창출되지 않거나 사람을 덜 쓰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에서 보듯이 일자리의 질도 나빠만지고 있다. 일자리가 생긴다 해도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일단 최저임금제 수준을 높이고 비정규직 보호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당장 근로 빈곤층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을 동반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뉴페러다임이 확산되는 것도 기대를 걸고 있다. 유한킴벌리 사례에서 보듯이 고용·기업 성장·노동자의 건강을 동시에 달성하는 해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등이 모범을 보이고 있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 전략도 더 손질할 필요가 있다. 부처간 경쟁적으로 나열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낮았던 것이다. 연구자들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낮지만 성사된다면 매우 고무적인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은 연대임금 제도 도입이다. 정부가 활성화되도록 지원할 수는 있지만, 이 사안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다.

‘협력’ 강제할 방법 없는 것이 옥의 티

 최근 ‘8·31 부동산 대책’이 나왔지만 부의 불균형 문제도 심각한 양상이다. 연구자들이 자산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는 대안으로 앞세운 것은 우리사주제도 활성화다. 이미 1970년대부터 우리사주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성공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종업원의 재산 증식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업원들이 자사주 보유를 통해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생산성 향상도 도모할 수 있다.

이 연구에 참여한 한 연구자는 “나름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지만, 중요한 것은 참여와 합의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과거처럼 정부의 동원 체제에 기초한 성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이해 당사자의 참여에 기초한 성장 전략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한국은 스웨덴·네덜란드·아일랜드처럼 사회적 합의에 성공한 유럽 국가에 비해 합의의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지도 않다. 아일랜드는 1987년 이후 네 차례 사회협약을 통해 임금 안정과 저소득 노동자 보호, 조세를 통한 소득 보상, 노동 시장 적극 확대 정책을 펴는 데 성공했다. 아일랜드의 사회적 협의 모델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한국의 노·사·정이 사회 협약을 이끌어내는 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연구자들은 모든 정책을 무력화하는 사회와 정치적 함정에서도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모든 사안을 차기 대선 이슈화하는 정책의 이데올로기화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언론과 학자들은 성장·혁신과 분배·통합을 대립적 개념으로 설정해 이데올로기적 문제로 바꾸어 버렸다.

 
연구자들은 이런 정책 환경으로 볼 때 전면적 전환은 극단적 이데올로기 투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부분적으로 참여 해법을 시행해 ‘작은 성공 사례’를 늘려 가며 신뢰를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 협약도 소규모 혹은 특정 지역이나 업종에서의 협약 체결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면 산업 전체, 나아가 나라 전체에서의 협약 체결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에서 전체로, 전면적에서 점진적 추진이 이들이 내세운 실천 전략인 셈이다. 

이 동반 성장 보고서가 가진 옥에 티라면 그들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제시한 ‘협력’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해법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협력 게임이 비협력 게임에 비해 게임 당사자 모두에게 이득을 안겨준다는 것은 상식의 영역일 뿐더러 경제학적으로도 증명된 명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해 당사자들을 어떻게 협력 대열로 이끌고 이탈하지 않게 구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힘을 가진 쪽을 협력 대열에 끌어들일 수 있는 방책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는 ‘세계화라는 조건 속에서 공동체적 협력에 의한 동반 성장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 구체적인 정책은 무엇인가?’ 에 대해 치열한 고민과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지난 2월 중순 노대통령은 온라인으로 보고된 이 보고서를 여러 화급한 사안이 많아 한 달여가 지난 3월 말에야 보았고, ‘잘 만든 보고서다. 몇 가지 사안은 빨리 추진하라’는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후다. 이 보고서 성안을 주도한 이른바 개혁 그룹이 청와대에서 대거 이탈한 것이다. 일부 대안을 국정과제위원회가 추진하고 있으며 청와대 정책실이 총괄하고 있다지만,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 추진체를 상실함으로써 추진 동력을 떨어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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