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잘리는 분노와 슬픔의 응어리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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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민간인 학살 유족 채의진씨 ‘뜻깊은 삭발식’ 과거사법 통과 자축하며 ‘진혼’ 제물로 바쳐

 
그날이 오면/ 두둥실 춤을 추고/ 그날이 오면/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성대한 삭발식을 하리라/ 가신님들 영전에 자른 머리 바치고/ 비로소 목놓아 울어 보리라/ 50년간 메아리 없던 통한의 진혼곡을….”

고희를 앞둔 한 노인이 소주 잔을 앞에 두고 이렇게 흥얼거렸다. 이 비가의 주인공은 하루가 멀다하고 경상북도 상주에서 서울을 오가는 채의진씨(69)이다. 채씨는 지난 17년 동안 단 한번도 머리에 가위를 대지 않았다. 그의 용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긴 머리에 빨간 베레를 눌러쓰고 개량 한복 차림이다. 채씨가 오랜 세월 허리춤까지 내리뻗은 허옇게 센 머리를 고집하는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자르지 않은 그의 머리는 끔찍한 국가 공권력의 범죄에 대한 저항이자 국민의 양심을 상대로 한 강렬한 호소이다. 채씨는 19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달 마을에서 길가던 국군 부대가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당시 주민 86명과 함께 가족 9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 이르기까지 신생 국가 건립을 둘러싼 좌우 대립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차별 학살된 비무장 민간인은 약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문경 석달동 학살 사건도 그 범주에 포함되지만 유난히 특별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대체로 이 시기 학살 사건들에 대해 사상과 이념 대립이라든지, 보복 학살, 전시의 불가피한 사정 등을 들이댔다. 물론 아무리 전쟁 기간이라 해도 이데올로기나 보복 감정으로 비무장 자국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 범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경 석달 마을 사건은 그 어떤 궁색한 핑계조차 들이댈 수 없는 만행이었다. 1949년 12월 그곳은 전시도 아닌 평시였던 데다, 그 전에 군경의 작전에 협조했던 마을이었는데도 초토화 작전을 폈던 것이다.

역대 정권, 은폐·외면 일관

 
가해 부대는 국군 3사단 25연대 7중대 소속 2소대와 3소대 70여명이었다. 사단장은 이응준 소장, 연대장은 유희준 중령이었고, 가해 부대를 현장 인솔한 소대장은 유진규 소위와 김점동 하사(3소대), 안택효 중사(2소대)였다.
그러나 사건 직후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작 은폐했다. 사망자들의 호적에 공비가 출몰해 사살했다고 허위 기재하고, 그 책임을 물어 이의승 문경경찰서장과 이기용 산북면 지서장을 직위 해제했다. 학살 책임자인 유해준 중령 등은 보직 이동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무마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 진상마저도 1998년 11월 기자와 채씨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맥아더 사령부의 기밀 해제 문서를 입수하고서야 처음으로 파악한 내용이었다.

사건 당시 정부가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금기시했던 문경 석달동 학살 범죄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진 때는 1989년 말이었다. 당시 기자는 석달동 학살 현장을 방문한 뒤 채씨를 만나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고, 역대 정부의 은폐 공작에 관한 단서까지 잡아 처음으로 이를 보도한 뒤, 지금까지 <시사저널>을 통해 일곱 차례나 후속 보도를 계속해 왔다. 기자가 첫 보도를 내보낼 당시 26년에 걸친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직을 그만두고 서각 공예에 몰두하고 있던 채씨는 그때부터 용기를 내서 유족회를 결성했다. 학살 현장에서 형님의 시신 밑에 깔린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채씨는 그날 끔찍하게 희생된 영령들에게 항상 마음의 부채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 이후 채씨가 살아온 세월에는 인고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 늦게나마 진상 규명을 기대하고 국회에 진정서를 냈다가 이듬해 5·16 쿠데타가 나자 그는 혁명포고령 위반죄로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피신하자 군사 정부는 진상 규명 노력을 도운 친지들을 대신 잡아 가두었다. 이후 30여 년간 침묵을 강요하는 기나긴 군부 정권의 장벽에 눌려 채씨의 한은 깊어만 갔다. 문경 석달동 학살 만행은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덮고, 이후 역대 정권에서도 탄압과 은폐를 계속해 왔으니 현재진행형인 국가 범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19혁명 이후 채씨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수업 시간에도 불쑥불쑥 그날의 악몽에 시달렸다. 채씨가 교사를 그만두고 1980년대 말 서각공예가로 변신한 까닭이다. 칼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는 작업에 혼을 바치면 슬픔과 분노를 견딜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 결과 채씨는 국내 서각공예계의 대가가 되었지만 분노와 슬픔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서각 공예로 분 삭이며 진상 규명 ‘온힘’

 
역대 정부 아래서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한 입막음을 강요받던 채씨는, 국민의 민주화 염원이 첫 직선제 대통령을 만들어낸 다음해인 1989년 들어서야 비로소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날 이후 그는 민간인 학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죽는 날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는 각오로 17년간 국회와 정부의 문턱이 닳도록 뛰어 왔다. 2000년 9월7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상임대표 이이화)가 결성되자 채씨는 전국에 은폐된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 대표 자격으로 범국민위 공동 대표를 맡아 특별법 제정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그는 지난 5년 동안 상주에서 서울을 매주 세 차례씩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범국민위는 2001년부터 국회에 이 사건과 관련한 특별법 제정을 청원했다. 그러나 순수 인권 법안이라 할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특별법’은 지난 3년간 한나라당의 정치 공세 논리에 휘말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채씨에게 드디어 머리를 자를 ‘그날’이 왔다. 지난 5월3일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기본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이 법안에는 문경 석달동 학살 사건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은폐된 민간인 학살 실태를 조사하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채씨의 긴 머리는 현대사 비극의 상징이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난한 투쟁의 기록인 셈이다. 그래서 범국민위는 출범 5주년을 맞는 9월7일 서울 종각 네거리 보신각종 앞에서 채씨에 대한 삭발식을 국민적 퍼포먼스로 치르기로 했다. 특별법 통과를 자축하는 ‘과거 청산 전진대회’의 머리 행사이다. 이 날 삭발식에 대해 범국민위 이이화 상임대표는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에 일생을 바쳐온 채의진씨가 지난 17년간 길러온 두발을 그때 희생된 100만 원혼에게 진혼의 제물로 바치는 자리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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