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를 지킨 사람들 2- 방한암 스님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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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는 적멸보궁이 있는 곳이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이곳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 법천사 등과 함께 이곳은 불교 신자들에게 5대 적멸보궁으로서 영험이 있는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고 청량선원이 개설되어 있어 수행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문수보살 성지,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병을 고쳐 원찰로 삼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국보 221호 상원사 문수동자상, 국보 36호 상원사 동종, 국보 292호 상원사 중창권선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이 문화재들이 자칫하면 한 줌 재로 변할 뻔 했다. 이것을 지켜낸 사람이 있다. 바로 방한암 스님(1876-1951)이다. 1925년부터 이곳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했던 한암 스님은 1941년 조계종이 출범하면서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 한국불교의 큰스님이다.

유엔군이 중공군의 1월 대공세에 밀려 1·4 후퇴를 한 1951년 초. 소개령이 내려져 오대산에 있는 거의 모든 스님들은 피난을 갔다. 그러나 한암 스님과 시자 희찬 스님 그리고 한암 스님의 공양을 맡았던 평등성보살은 끝까지 사찰을 지켰다. 월정사를 비롯한 산내 모든 암자와 사찰을 소각하던 국군 수십명이 들이닥쳐 사찰을 소각할 것이니 모두 떠나라고 명령했다. 1951년 1월2일, 3일 일이었다.


 
 
한암 스님은 가사장삼을 입고 법당으로 가 좌정한 뒤 조용히 말했다. “나야 어차피 죽으면 다비를 할 것이니 내 걱정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당황한 국군이 스님을 법당 밖으로 끌어내려 하자 스님은 다시 “당신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이, 나 또한 승려의 본분으로 이 절을 지켜야 하니 나는 마지막까지 승려의 위치를 지키다 죽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스님의 법력에 감화된 부대지휘관은 상부의 명령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한암 스님이 계신 방을 제외한 모든 전각의 문을 뜯어다가 불사르고, 사찰을 소각하고 왔다는 증표로 옻칠을 한 까만 죽비를 받아가지고 철수한다. 유엔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오대산내 월정사를 비롯한 사찰과 민가 문화재가 모두 불탔지만 상원사는 한암 스님의 법력으로 소각 위기를 벗어났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오대산이 수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1년 3월21일 한암 스님은 아침으로 미음 한공기와 꿀물 한 잔을 드신 다음 가사와 장삼을 갖춰 입은 뒤, 평소 공부하던 그 자세 그대로 조용히 입적했다. 76세, 출가한 지 55년 되던 해였다. 이 때 평소 한암 스님을 흠모해 왔던 국군 8사단 정훈장교 김현기 대위가 작전지역인 오대산에 왔다가 한암 스님이 입적한 모습을 목격하고는 사진을 촬영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이 사진을 월정사에 전달해 오늘날까지도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암 스님을 다비하자 검은색 사리가 수없이 나왔으나 계곡물에 모두 흘려보냈다고 한다. 이후 8사단 정훈장교 김현기와 육군사관학교 동기이며 인접 3사단에서 정훈장교로 복무하던 선우휘가 이 이야기를 듣고 단편소설 ‘상원사’를 펴냄으로써 한암 스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한암 스님과 함께 끝까지 상원사를 지켰던 평등성보살은 1968년 울진삼척 공비침투사건 때 무장공비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녀는 출가자는 아니었지만 수행력이 남달랐던 보살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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