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은 법의 외피를 쓴 야만”
  •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 승인 2005.09.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 특별 기고/“한국의 공권력은 전형적 사이코패스”

 
지난 9월12일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와 임종인·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과 노회찬 민노당 의원이 공동 주최한 국가보안법 청문회가 열렸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국가보안법을 진단하다’라는 이색 제목으로 열린 이 청문회에서는 실제 조작 간첩 사건으로 국보법의 피해를 본 박동운씨와 허현씨가 증언대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법리 논쟁에 그쳤던 국보법 폐지의 당위성을 피해자의 처지에서 들여다보자는 새로운 시도였다. 이 청문회를 위해 여러 차례 박동운씨를 면담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국보법이 얼마나 한 인간과 가족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고발하는 글을 보내왔다.

1950년대 어느 날, 마을에서 아이 하나가 사라졌다. 점쟁이에게 그 행방을 물으니 ‘절반은 먹고 절반은 남았다’는 점괘가 나왔다. 사람들은 마을 외곽에 살고 있던 한센인(일명 문둥이라고 불리던 나병환자)들을 잡아다가 사실대로 실토하라고 집단 린치를 가했다. 눈이 빨간 사람은 ‘아이를 먹어서 그렇다’며 더 끔찍한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모집에서 발견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세월 한센인 수백 명이 빨갱이나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되어 학살을 당했다. 근거 없는 편견과 사회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책임 전가가 그 이유의 전부다. 힘겹게 살아 남은 한센인들은 아직도 그때의 고통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지금도 여전하다. 한때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일컫던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이유도 없이 빨갱이로 몰려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던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는 읽는 이의 가슴을 때린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가는 길....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천형의 절망과 슬픔을 읊조리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피울음이 배어 있다. 천형이란 개인의 의지나 저항과 상관없이 불가항력의 절대적 힘에 의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조작 간첩 사건에 연루된 이들 또한 ‘천형의 피해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홍구 교수의 말처럼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도 될 수 있는 게 간첩’이었다. 그 중심에 조작 간첩 사건 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이 겪은 공포와 고통과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세월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이 지니는 살벌하고 끔찍한 의미를 떠올린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빨갱이 낙인의 악몽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면 그것은 천형이 틀림없다.

 
1981년, 일명 ‘진도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8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박동운씨도 ‘천형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다. 농협 진도군지부 예금계장으로 근무하던 박동운씨는 어머니, 동생, 숙부, 고모, 고모부, 숙모 등 일가족 6명과 함께 자다가 영문도 모른 채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 63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간첩임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그의 아버지 때문이다. 박동운씨는 다섯 살 이후 아버지를 본 적도 없는데 수사관들은 박동운씨가 아버지를 만나 북한에 다녀온 이후 간첩 활동을 한 ‘스토리’를 만들어 그를 간첩으로 옭아매었다. 그 짐승들은 박동운씨에게 “만약 네가 시인하지 않으면 네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를 너와 같이 옷을 벗겨 통닭같이 매달아 놓겠다”라고 협박했으며, 어느 날은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권총을 들이대며 안기부 밖으로 끌고 나가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는 등 극한의 공포감을 주어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진술하게 만들었다. 결국 박동운씨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허위 자백을 했고 간첩죄로 18년간 옥살이를 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영역에서 볼 때, 나는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사이코 패스’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과장한 것이 아니다. 원래 ‘사이코 패스(psychopath)’란 정신병질자(精神病質者)라는 의미로, 반사회적 성격의 소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겉으로는 일상 생활을 잘 하고 멀쩡해 보여 심지어 가족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제심·양심·도덕성 등 통제 기제가 미약해 순간적인 충동으로 반도덕적·반사회적 행위를 저지른다. 유영철과 같은 연쇄살인범들의 대표적인 공통점 중 하나가 사이코 패스다. 미국의 경우 연쇄살인범의 90% 이상이 사이코 패스라고 알려져 있다. 사이코 패스는 피해자에 대한 죄의식이나 후회도 없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을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느껴 어떤 잔혹한 행동을 해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지난 세월 특정 집단의 정권 유지를 위해 국가보안법이라는 미명으로 수많은 개인들의 몸과 마음을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잔혹하게 짓이겨놓고 아직까지도 국가 보위와 법률의 엄정성을 큰소리로 되뇌는 대한민국 공권력은 사이코 패스와 무엇이 다른가.

“박동운씨는 현재 심리적으로 서른다섯 살”

출소한 지 7년이나 되었지만 박동운씨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후유증도 그렇지만 극단적인 사회적 고립이나 부적절한 죄의식으로 고통받는다. 아내와 자식들까지 그를 외면해 월세 6만원짜리 집에서 홀로 산다. 그의 사연을 듣고 앞에서는 ‘참 안됐다’고 공감을 표하지만 뒤돌아서면 ‘아무리 그래도 나라에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18년 간이나 빨갱이죄로 가두어 놓았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대인기피증에 걸려 있기도 하다. 명백하

 
게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끝없는 죄의식을 갖고, 그로 인해 자신을 비난하는 심리로 인해 이중 고통을 겪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함께 시급하게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박동운씨처럼 국가공권력에 피해를 당한 개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노대통령이 밝힌 것처럼 ‘국가 공권력의 도덕성은 무한대’여야 하므로 국가 공권력 남용에 의한 개인의 상처는 반드시 국가가 책임지고 치유해 주어야 한다.

박동운씨는 나와의 개인적 면담에서 수줍게 입양 소망을 밝힌 적이 있다. 나이도 환갑에 이르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으니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서너 살짜리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싶다는 것이다. 아이를 팔베개해서 재우고 얼굴에 묻은 것을 닦아주고, 자라면 학교에도 데려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란다. 그가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의 아이들이 다섯 살, 세 살이었다. 그는 지금 그 또래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한다. 박동운씨는 심리적으로 서른다섯 살,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안기부에 끌려가 정상적인 삶이 정지해버린 그 시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괴물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일상성을 갈가리 파괴했다. 국가보안법은 야만과 폭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법이었다. 법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법이 아닌 것이다. 폐기해야 마땅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