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긍휼한 눈길로 보라
  • 배병삼 (영산대 교수 · 정치학) ()
  • 승인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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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맹자>에는 무덤에 대한 인류학적 설명이 있어 눈길을 끈다. 원래 인간 사회에는 무덤이 없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시체를 그냥 내다버렸단다. 한데, 어느 날 산에 오르던 사람이 시신을 동물과 곤충이 뜯어먹어 흉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자식의 마음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솟아 얼굴이 붉어졌다. 아들은 곧장 집으로 돌아와 곡괭이와 삼태기를 가지고 산에 올랐다. 땅을 파서 시신을 갈무리하고 봉분을 만들었다. 이것이 무덤의 시초라는 것이다.

맹자는 이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얼굴이 붉어지는 마음’을 사람과 짐승이 갈라지는 분수령으로 본다. <맹자>라는 책과 이를 토대로 수립된 유교 문명은 바로 이 울컥하는 마음을 발견하고 배양하여 그것을 세상에 펼쳐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려는 체계나 다름없다. 그러니 무덤은 인간 문명의 꽃봉오리다. 맹자에게 무덤은 장엄하고, 장례는 장중한 것이다. 

조선시대 법률 분쟁의 대부분이 산송(山訟), 즉 산소를 둘러싼 다툼이던 것도 무덤의 이런 의미 때문이다. 또 매사에 느긋하고 유머가 풍부했던 연암 박지원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대목이 조상 산소 다툼 때문이었음도 무덤의 문명사적 맥락 위에서야 바로 이해된다.

아직 추석 명절의 뒤끝이이어서인지 장례법에 대한 논의들이 꼬리를 문다. ‘국토의 1%가 묘지’요, 이 비율은 ‘주거용지의 절반, 공업용지의 2.5배’에 해당하고, ‘여의도보다 넓은 땅이 묘지로 변한다’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통계 수치를 필두로 화장의 필요성을 논하는 것이 대표적인 논법이다. 또 전에는 화장한 뼈를 담아 모시는 납골당에 주목하더니 올해는 화장한 뼈를 나무 아래 뿌리고 거기에 고인의 이름을 달아두는 ‘수목장’이라는 방식이 선진국의 사례로 소개되기도 한다.

한데 매장에서 화장으로, 납골당에서 수목장으로 바뀌는, 권장하는 장례 방식 변화의 물밑에는 일관된 논리가 있다. 삶이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제한된 토지 문제와 환경 파괴’ 때문이고 또 납골당에서 수목장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시민들의 ‘혐오시설 기피’와 ‘자연보호’ 때문이라는 주장에서 그런 뜻이 잘 드러난다.

이런 논리 밑에는 죽음은 삶의 완성이기는커녕 삶의 끝 혹은 추락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아니 이 말이 지나치다면, 적어도 죽음은 가치가 없는 것(비경제적인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경제 논법대로 가치(삶)를 위해 몰가치(죽음)는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삶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죽음은 난데없이 삶을 끊어버리는 ‘사고’가 된다(사고는 미연에 방지해야 하므로, 오늘날 우리는 늙어도 늙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퍼붓는 것인가?).

삶에 집착해 죽음을 가볍게 처리하는가

이런 생각에선 장례도 삶의 완성을 추념하는 장중한 의례가 아니라, 쓸모가 사라진 몸뚱이를 처리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노자의 지적은 이 대목에서 적절하다. ‘사람들이 죽음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은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民之輕死, 以其求生之厚, 是以輕死)’.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생명의 실상은 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다. 이 진리 위에서라면 죽음은 결코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진 것이게 마련이다.

물론 매장에서 화장으로, 또 납골당에서 ‘수목장’으로의 변화는 인정해야 할 세태다. 아무리 죽음이 삶만큼 고귀하다고 하나, 좁디좁은 나라에서 방만하게 과거의 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분명 문제다. 유교 경전인 <중용>에서조차 ‘오늘에 나서 옛날의 방식을 따르려는 자에겐 재앙이 내리리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죽음을 대하는 눈길이다. 무덤과 죽음에 대한 예식이 죽은 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한 자락에서 피어난 꽃이듯, 지금 우리 사회에 정녕 죽어버린 것은 삶을 다 마친 저 몸뚱이에 대한 긍휼한 눈길이다. 주검을 두고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얼굴이 붉어지는 마음’으로 추념할 수 있다면, 화장이면 어떻고 수목장이면 어떻고, 또 새가 뜯어먹도록 들판에 내다버리는 조장(鳥葬)이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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