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내 탓이오” 의원들 “네 탓 맞소”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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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청와대 나 홀로 행보에 ‘쿠데타’ 당헌·당규 개정 논의→노선 갈등 전면화 가능성

 
노무현 대통령이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당초 열린우리당에 불어닥친 재·보선 후폭풍을 잠재울 청와대의 복안은 이랬다. 문희상 체제로 정기국회를 이끌어가고, 연말이나 연초에 당·정·청 쇄신용 개각을 한 다음, 내년 2월 전당대회를 치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와대는 지난 10월27일 이례적으로 재·보선 패배를 ‘내 탓이오’라며 자인하고 나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만수 대변인을 통해 ‘열린우리당은 동요하지 말고 정기국회에 전념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4·30 재·보선에서 23전23패를 당하고도 청와대가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것도 노대통령이 철칙같이 지켜온 당·정 분리 원칙을 깨면서 ‘내 탓이오’를 자인하고 나선 터라 더 이례적이었다.

노대통령이 ‘당분간 문희상 체제 유지’라는 카드를 내민 것은 산적한 민생 법안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정기국회에 상정된 8·31 부동산 대책 후속 법안이나, 쌀협상 비준 동의안, 국방개혁안, 양극화 해소 법안 등 국정 운영에 중요한 법안들이 당내 분란에 묻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대안부재론’도 이같은 복안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막상 비대위를 꾸린다고 하더라도 적임자가 마땅치 않은 데다, 계파별 안배니 뭐니 해서 분란만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면서 문희상 체제에 힘이 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의원들은 달랐다. 급한 불을 끄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오히려 불을 질렀다. 특히 재·보선 현장을 발로 뛰었던 의원들일수록, ‘그래 네 탓이 맞다’며 강경하게 돌아섰다. 이처럼 여당 의원들이 강경 기조로 돌아선 데는 그동안 청와대가 보여준 ‘나홀로’ 행보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바로 연정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다. 재·보선 현장을 뛴 의원들이 밑바닥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되지도 않는 연정 이야기냐’는 핀잔이었다고 한다.

재야파가 ‘선도투’에 나서면서, 의원들 사이에서 청와대 책임론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책임을 지려면 ‘말 대 말’ 수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행동 대 행동’ 수준까지 보여야 한다는 강경 분위기가 퍼진 것이다.

10월28일 국회의원·중앙위원 연석회의는 당 지도부와 청와대 성토장으로 변했다. 이런 기세에 밀려 문희상 체제는 결국 출범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 날 청와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일부 참모진은 “레임 덕이 시작된 것 아니냐”라며 말을 아꼈다. 대통령의 ‘의지’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지도부 사퇴로 이제 관심거리는 김근태·정동영 장관등 대선 주자들의 당 복귀와 차기 지도부 선거로 옮겨갈 조짐이다.

분당에 가까운 내홍에 휘말릴 수도

하지만 이번 사태는 지도부만 사퇴하고 비대위를 꾸리는 단순한 인적 쇄신으로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이 기회에 아예 당내 시스템까지 바꾸자는 요구가 거세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이 중앙위원 동반 사퇴논란이다. 당헌 당규상 최고 의결기구로 되어 있는 중앙위원회 위원까지 동반 사퇴시키자는 주장도 터져 나왔다. 이는 이번 참에 당헌 당규를 고치자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동안 열린우리당 안에서는 기간당원제나 공직 선거 후보자 선출 방식 등을 좀더 현실적으로 바꾸자는 요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유시민 의원을 중심으로 한 참정연(참여정치실천연대)의 반대에 부딪혔다.

지난 10월28일 연석회의에서도 시스템을 바꾸자는 의견에 유시민 의원은 “당이 깨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일부 의원은 “정당 개혁을 할 사람은 나가서 하고, 우리는 정권 재창출을 하자”라며 맞받았다.

이번 사태는 그동안 잠복해 있던 당헌 당규 개정 논의의 물꼬를 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당내 노선 갈등의 전면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서, 열린우리당은 또 한번 분당에 가까운 내홍에 휘말릴 수 있다.

이래저래 여권에 불어 닥친 10·26 재·보선의 후폭풍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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