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밴 ‘386 증후군’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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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복수의 사회학:<오로라 공주>

 
배우 방은진씨의 감독 데뷔작 <오로라공주>는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제작된 영화이다. 복수심이 발생하는 원인이 아이를 유괴당한 것이고, 에누리 없이 복수로 끝난다는 설정은 이미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에서 익히 반복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유괴에 대한 복수라는 모티브에서 출발한 영화 <오로라 공주>는 후발 주자의 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오로라공주>는 특히 <친절한 금자씨>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 유괴에 대한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여배우 원톱 영화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그래서 좋든 싫든 <친절한 금자씨>와 비교되곤 한다. 두 영화는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와 남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라는 제작상의 차이, 한 명이 여럿에게 복수하는 영화와 여럿이 한 명에게 복수하는 영화라는 구도상의 차이 외에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오로라공주>와 <친절한 금자씨>의 결정적인 차이는 복수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에 대한 성찰을 주로 담고 있는 것에 반해 <오로라공주>는 복수 자체에 탐닉한다. 그래서 전자가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반면, 후자는 복수를 실행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즉,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에 대한 최소공배수를 찾는 영화라면 <오로라공주>는 복수에 대한 최대공약수를 찾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복수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 때문에 주인공이 복수하는 과정도 다르게 그려진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이영애 분)가 햄릿형의 은근한 복수를 하는 반면, <오로라공주>의 정순정(엄정화 분)은 돈키호테형 막무가내식 복수를 한다. 명확한 적 한 명을 처리하는 데, 법에 맡길지 함께 처리할지를 토론하고, 그 방식을 합의하고 순서를 정하며 어렵게 풀어가는 금자씨와 달리, 정순정은 주적을 맞으러 가는 길의 거치적거리는 적까지 직접 단칼에 베어버린다. 

<친절한 금자씨>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라공주>에서도 관객은 유괴범에 대한 복수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가족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자식애’는 잔혹한 복수를 수긍하게 만든다. 금자씨를 수사했던 형사가 금자씨를 돕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을 공범으로 유도하는 박찬욱 감독과 마찬가지로 방은진 감독도 형사인 정순정의 남편이 복수를 돕는 모습을 통해 관객도 자연스럽게 공범이 되도록 이끈다.

그러나 정순정의 복수는 조금 과한 측면이 있다. 의붓딸을 학대하는 계모, 까탈스러운 옷가게 여주인, 여색을 밝히는 예식장 사장, 불친절한 택시운전사, 다혈질의 고깃집 주인 모두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그들이 그토록 비참한 죽음을 맞을 이유도 없다. 감독은 이들의 불의에 대한 정순정의 심판이 사실 딸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공감을 얻어낸다. 

비정한 도시를 응징하는 여주인공

정순정이 살인을 통해 사적 정의를 이루어가게 되는 이유를 감독은 비정한 도시에 돌린다. 영화 중간에 아이가 이들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 결국 유괴범에게 납치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죽음을 설명한다. 애타게 도움을 요청한 아이를 외면한 비정한 어른들에게 냉정한 심판을 가함으로써 정순정은 비정한 도시에 인간의 법도를 알린다. 그리고 그 징표로 오로라공주 스티커를 남긴다.

 
감독이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오로라공주>는 ‘386 증후군’이 진하게 배어 있는 영화다. 독재 정권에 저항해 지고지순의 가치인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화염병을 들었던 386세대처럼 정순정도 비정한 도시를 단죄하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들이댄다. 사회가 바뀌어서 이제 더 이상 마이너리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리의 전사’를 자처하는 386세대처럼 정순정도 정당한 법 절차를 버리고 사적 응징을 택한다.

<오로라공주>는 살인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녀는 복수의 과업을 달성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코너에 몰린 적을 놓아주지 않고 마지막까지 복수에 매달리는 정순정을 보면 루쉰의 ‘물에 빠진 미친개는 두들겨 패야 한다’라는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보수세력과 끝내 화하지 못하는 386 세대의 자화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오로라공주>의 외연을 살펴보면 영화의 흐름이 왜 이렇게 흐르는지를 좀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제작사인 이스트필름은 전 문화관광부 장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를 제작했던 곳이다. 제작사 대표인 명계남씨와 영화의 또 다른 주연인 문성근씨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핵심 멤버였다. 이쯤 되면, 정순정이 왜 자신만의 정의에 집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당원인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친절한 금자씨>와 견주어 봄으로써 관객은 진보의 서로 다른 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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