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좋은 ‘권위주의 체제’
  • 고종석 (소설가) ()
  • 승인 2005.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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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유사 파쇼 체제를 ‘권위주의 체제’라고 부르는 것이 최근 10여 년 사이 학계와 저널리즘의 유행이 되었다. 이 말은 그 전에 흔히 쓰던 ‘군사독재 체제’나 ‘군부독재 체제’라는 말보다 한결 ‘학술적’이고 ‘객관적’으로, 요컨대 세련되게 들린다. 본디 권위주의라는 말을 학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치학자들이 아니라 사회심리학자들과 사회철학자들이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성격(에리히 프롬)이나 권위주의적 인격(테오도르 아도르노)에 대한 1940~1950년대의 탐구는 나치즘과 반유대주의가 어떻게 태어나 작동했는가에 대한 탐구의 일부였다. 그러니까 권위주의 연구는 인간 내면에 숨겨진 파시즘의 씨앗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궁금증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권위주의적 성격이나 인격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탐구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탐구로 이행하면서, 권위주의라는 말은 크게 휘었다. 우선 이 말은 파시즘과의 직접적 관련을 끊어냈다. 더 나아가, 권위주의 체제가 동의보다는 억압에 바탕을 두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비록 참다운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산주의보다는 한결 나은 체제로 인식되었다. 당연히, 정치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이 말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은 우파에, 그것도 주로 극단적 우파에 속했다.

권위주의 체제=‘거시기 체제’인가

레이건 정권 시절 미국의 유엔 대사를 지내고 9·11 이후에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론적으로 풀무질한 진 커크패트릭은 반공독재 체제를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로 ‘미화’한 가장 유명한 보수주의자일 것이다. 그녀는 냉전 시기 제3세계 반공독재 체제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합리화하기 위해 권위주의 체제는 전체주의 체제(냉전 시기에는 고전적 의미의 파시즘은 거의 사라졌으므로 이 말은 공산주의 체제를 뜻한다)에 비해 더 불안정적이고(다시 말해 쉽게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고), 이웃 나라에 대한 전염성(흔히 도미노 이론이라고 불렸던)도 작다고 강변했다. 더 나아가 권위주의 체제는 국민의 행동만을 통제할 뿐이지만, 전체주의 체제는 선전과 세뇌와 재교육과 비밀 경찰과 대중 동원을 통해서 국민의 사상까지를 통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체제는 (1980년대 시점에서) 앞으로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지속되리라는 것이 커크패트릭의 생각이었다.

1990년 이후 공산주의 체제는 순식간에 무너져 그것이 수십 년 수백 년 가리라던 커크패트릭의 예측은 우스개가 되었지만, 그녀는 거기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런 전제 아래 강경 노선으로 치달은 레이건 행정부의 대소련 정책이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권위주의 제체라고 불렀던 반공독재 체제에는, 그녀가 전체주의 체제라고 불렀던 공산주의 체제와 달리, 선전과 세뇌와 재교육과 비밀 경찰과 대중 동원이 없었던가? 이른바 권위주의 체제는, 커크패트릭이 주장한 대로, 국민의 사적 영역에는 간여하지 않는가?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일상을 아직 망각하지 않은 한국인이라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은 너무 물렁물렁해, 순정 민주주의와 순정 전체주의 사이의 모든 체제를 지칭할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은유적으로는, 권위주의적 대통령 드골이 통치했던 시절의 프랑스를 가리킬 수도 있다. 권위주의 체제는 일종의 ‘거시기 체제’인 것이다. 서양 우익 담론의 예를 좇아 한국의 군부 독재를 권위주의 체제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이 바로 여기서 솟아날 것이다. 이 말에서는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고문실이, 민간인 학살이,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의 재교육 캠프가, 반공궐기대회와 빨갱이 사냥이, 조작 간첩 사건들이, 시민들 서로 간의 일상적 감시가 대뜸 연상되지 않는다. 그 권위주의 체제의 두목이었던 박정희와 전두환을, 경제적 효율의 밑바탕이었다고 주장되는 그 권위주의의 우두머리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욕조에 머리가 처박히거나 고압 전류로 온몸이 망가진 자신을 상상하며 그 그리움의 윤리성을 한 번쯤 점검해 보는 것도 민주공화국 시민에겐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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