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명품’ 하버드 한국에서도 막강 위력
  • 이철현 기자 (leosisapress.comkr)
  • 승인 2005.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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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교육기관으로 통하는 하버드 대학 출신자들의 영향력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될까. 그들의 현주소를 추적했다.

 
미국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역작 <파워엘리트(The Power Elite)>에서 ‘미국에서는 정치·경제·군사 요직을 독점한 소수 파워 엘리트들이 서로 연합하여 정점연합(頂點聯合)을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는 ‘과두제의 철칙’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소수 파워 엘리트가 요직을 독점하는 현상은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 출신들이 끈적끈적한 학연으로 뭉쳐 서로 밀고 끌어주며 요직을 차지해 권력 집중과 위화감 조성이라는 폐해가 발생했다.

지금 한국 사회 정점연합의 최상층을 차지한 집단은 세계 최고 고등 교육기관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하버드 대학 출신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에 자리 잡은 하버드대학 교정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수학하고(학위 취득이나 기간과 상관없이) 하버드 출신이라는 소속감을 가진 국내 한국인은 1천73명(하버드 한국동창회 추산). 김우찬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하버드 대학이 워낙 장사를 잘해 온갖 하버드 학위를 취득한 한국인이 많다”라고 꼬집었다. 

케네디스쿨 출신이 가장 많아

국내에서 하버드 대학 ‘성골’인 학부를 졸업한 이는 82명. 세계 최고의 전문 대학원이라고 자부하는 로스쿨(HLS·법과대학원)과 비즈니스스쿨(HBS·경영대학원) 출신은 각각 1백85명과 1백73명이다. 케네디스쿨(KSG·행정대학원) 출신은 1백97명으로 가장 많았고 디자인스쿨(GSD·디자인대학원)과 아트앤드사이언스스쿨(GSAS·문리대학원)이 각각 74명과 83명이었다. 이밖에 30명 안팎인 의과대학원 출신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고위경영자과정(AMP)처럼 단기 교육과정 출신자가 다수다. <시사저널>은 대한민국 ‘최정점연합’인 하버드 대학 출신들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최홍건 대통령 직속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1983년 케네디스쿨 1년 과정인 경력자행정학석사(Mid-career Master in Public Administration)를 취득했다. 최위원장은 업무 추진 과정에서 의문이 생길 때마다 케네디스쿨 동기인 이우철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수시로 자문해 깊이 있는 정보를 얻는다. 또 케네디스쿨 후배인 유지창 산업은행 총재에게 중소기업 자금 지원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는데, 산업은행이 중소기업 지원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최위원장은 “동문 사이 협력 관계는 공공 영역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 조건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 부회장과도 편하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와 기존 정부 부처 사이는 불편하다. 부처 공무원들은 기존 부처를 ‘구정부’라고 하고 위원회 조직을 ‘신정부’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을 백안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위원장은 재정경제부를 비롯해 관련 부처와 업무 진행에서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재경부와 조율할 일이 생기면 동문 수학한 한덕수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장관(하버드 대학 경제학 석·박사)과 허물없이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에도 동문 수학한 케네디스쿨 선후배가 12명이나 있다.

케네디스쿨은 네 가지 석사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2년 과정인 공공정책석사(MPP), 행정·국제개발석사(MPAID), 행정학석사(MPA)와 1년 과정인 경력자행정학석사(MCMPA). 국내 케네디스쿨 출신자들은 MCMPA와 MPA 과정이 다수다. 조지프 나이 케네디스쿨 학장은 ‘케네디스쿨은 리더십 훈련과 정책 관련 문제 해결 능력을 개발해 민주주의 정부를 운영할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라고 정의한다. 갖가지 직업 출신인 20~60세 학생들이 한곳에 모여 공부하고 졸업한 후에도 정치·국제기구·시민단체·투자 은행·언론·컨설턴트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으로 진출한다.

국내에서는 전·현직 공무원 출신이 가장 많이 케네디스쿨에 진학한다. 정부가 1981년 말부터 공무원 국제화 작업의 일환으로 해마다 공무원 수 명을 케네디스쿨에 연수를 보내고 있다.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을 비롯해 감사원·금감원·국무조정실 산하 고위 공무원들이 재교육 차원에서 케네디스쿨을 다녀왔다. 케네디스쿨 동문회장이기도 한 최홍건 위원장은 “전·현직 공무원이 70% 가량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은행 관계자와 언론 종사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케네디스쿨 출신으로 유명한 이로는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김광림 전 재경부 차관·박 진 국회의원·유지창 산업은행 총재 등을 꼽을 수 있다. 

로스쿨 출신자들 대부분 학력 밝히기 꺼려

케네디스쿨은 로스쿨이나 비즈니스스쿨보다 격이 조금 떨어진다. 하버드 로스쿨이나 비즈니스스쿨은 세계 최고의  전문 대학원으로 손꼽힌다. 하버드 로스쿨은 세계 최고의 법과대학원 자리를 놓고 예일 대학과 다툰다. 학생 수준이나 교육 과정은 예일 대학이 낫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하버드 로스쿨은 미국 대법관 5명을 배출할 만큼 미국 법조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예일 대학이 소수 정예(1백50명 안팎)를 선발해 최고의 법률가로 키우는 것과 달리 하버드 로스쿨은 해마다 5백명 가량을 배출한다.

국내에서도 하버드 로스쿨 출신자가 갖는 영향력은 크다. 2002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강용석 변호사는 “국내 법조계에서 엘리트 가운데 엘리트로 인정받으려면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를 충족해야 한다. 서울법대를 수석 졸업하거나 사법고시를 수석 합격하든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해야 한다.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이는 아직 없다”라고 말했다. 이영애 전 춘천지방법원장은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인물이다. 여성 최초로 법원장에 오른 이변호사는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하고 하버드로스쿨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변호사는 지금 하버드 총동문회 부회장과 로스쿨 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국내 최대 법률법인(로펌)인 김&장법률사무소에서 로스쿨 출신자 상당수(29명)가 일한다.

 
로스쿨 출신자들은 케네디스쿨 출신자와 달리 상대적으로 하버드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기를 꺼린다. 거듭된 인터뷰 요청을 고사하며 이영애 로스쿨 동문회장은 “(로스쿨)회원들과 상의해보니 하버드 출신이라는 사생활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보수적 색깔이 짙은 법조계 특성도 있기는 하지만 하버드 로스쿨이라고 내세우기에 쑥스러운 학위 탓일 것으로 짐작된다. 하버드 로스쿨이라고는 하지만 정규 석사 과정이 아니라 학습 기간이 1년에 불과한 비정규 석사 과정이다. 하버드 로스쿨 정규 과정은 3년으로 JD(Judiciary Doctorate) 학위를 수여하는데, 국내 하버드 로스쿨 출신들은 1년 과정인 LL.M. 학위이다.


 
국내에서 JD 학위를 가진 이는 양준영 변호사와 조현문 효성 전략본부 전무에 불과하다. 양준영 변호사는 미국 유명 법률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후 김&장 법률법인에 들어가 국제 소송을 맡고 있다. 조전무는 조석래 효성 회장의 둘째 아들로 1999년부터 국내에 들어와 경영 수업을 하고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은 해마다 경영대학원(MBA)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해마다 발표하는 경영대학원 순위에서 하버드는 3년째 1위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졸업자의 5년 뒤 연봉은 19만5천 달러(지난해 기준)나 된다. 미국 주립 대학 경영대학원 출신들은 10만 달러를 받지 못한다. 미국 시사 주간지 <유에스 앤드 월드 리포트>도 올해 경영대학원 순위에서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을 가장 위에 올려놓았다.

국내에서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을 졸업한 이는 1백70명 가량이다. 비즈니스스쿨 MBA(경영학 석사)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다. 주로 전략 컨설팅 업체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이가 많다. 매킨지와 배인앤컴퍼니에서 각각 24명과 11명이 일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비즈니스스쿨 출신자 7명 가량이 삼성글로벌전략그룹에서 근무하고 있다. 삼성글로벌전략그룹은 삼성전자 산하에 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자문 조직이다. 이회장이 글로벌 경영과 관련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삼성글로벌전략그룹 소속 하버드 MBA 출신들은 자료 조사나 자문에 응하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민선식 YBM시사영어 사장이 비즈니스스쿨 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민사장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MBA를 취득하고 하버드 대학에서는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부 출신들 결속력은 약해

2002년 로스쿨을 졸업한 강용석 변호사는 "하버드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은 학부 출신이다“라고 말했다. 학부 출신들은 국내 대학을 다니지 않고 일찍 미국으로 유학해 현지에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속력은 탄탄하지 않다. 하버드 법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모두 취득한 양준영 변호사는 “국내에서 하버드 학부 졸업생들과 따로 만나는 일은 없다. 한국에서 하버드 대학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 삼아 내세우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하버드라는 이름이 아니라 실력이 중요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데이지 웨이드먼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라(Remember Who You Are: Life Stories That Inspire the Heart and Mind)>라는 저서에서 하버드 대학 강의실에서 행해진 마지막 강의를 선별해 엮었다. 이 책에서 웨이드먼은 데이비드 벨 하버드 대학 마케팅 학과장의 유명한 말을 인용했다. 벨 교수는 5년마다 열리는 모교 방문 행사에 절대 가지 말라고 말했다. 동창회를 의식해 옛 급우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생각하며 살다 보면 ‘짧은 시간에 자신의 이력을 돋보이게 해줄 일이나 순식간에 떼돈 벌 일’을 고르게 된다. 지식과 재능이 넘치던 인재들이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직장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올해 12월3일 하버드 총동문회 연말 정기 모임이 있다. 혹시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으나 떼돈 버는 직장에 다니는 하버드 대학 출신들이 옛 급우에게 자랑거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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