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하자는데 말이 많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11.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11 이후 급조된 미국 ‘애국법’ 연말 만료…연장 놓고 정계 양분

 
당신이 도서관에 가서 어떤 책을 빌렸는지, 누구와 어떤 전화 통화를 했는지, 혹은 인터넷에서 어떤 내용을 접했는지 등을 수사기관이 당신 모르게 감청하거나 뒷조사를 벌인다고 상상해보자. 과연 이런 일이 민주국가에서 그것도 백주에 가능할까? 그렇다. 세계 최고의 인권국임을 자처하는 미국에서 지금 버젓이 벌어지는 일이다. 지난 2001년 9월11일 뉴욕과 수도 워싱턴에서 벌어진 사상 초유의 테러사건으로 3천여명이 희생된 직후 한 달만에 급조된 소위 ‘애국법’(Patriot Act) 덕택에 가능한 것이다.
테러활동 감시와 예방이란 이름으로 제정된 342쪽에 달하는 애국법에 따라 미국에서 사는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일반 미국 시민도 수사기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언제든 감청이나 비밀 압수수색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태다. 그뿐인가. 미국내 외국인 유학생, 특히 중동계 학생들의 경우 개인 신상정보가 적나라하게 수사당국에 노출됐는가 하면 테러 수사의 명목으로 용의자에 대한 체포와 구금, 가택수색, 감청과 도청, 심지어는 사생활 전반에 대한 감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처럼 4년 전 탄생 직후부터 인권 유린과 민권 침해의 주범이란 논란에 휩싸여온 애국법이 올 연말 시효 만료를 앞두고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연방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핵심 쟁점은 재연장 여부. 부시 행정부는 개인의 사생활 침해 등 각종 인권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문제의 애국법을 무기한 연장하겠다는 방침이고, 공화당 지도부도 이에 적극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인 민주당, 나아가 범민주계로 분류되는 미국내 각종 민권단체들은 애국법의 독소조항을 인권침해의 주범으로 규정하고 현행 그대로의 연장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공화, 민주 양당의 상원 의원 각 3명으로 이뤄진 초당파가 독소 조항으로 가득찬 기존의 애국법을 절대 연장하지 않겠다며 공개 기자회견까지 갖는 등 이 문제를 놓고 미 정국이 크게 술렁댄다.

현재 애국법 연장 여부에 관한 의회의 기류를 살펴보면 이 법 가운데 14개 조항은 항구적으로 연장하되 문제의 소지가 있는 2개 독소 조항은 완화하거나 엄격한 조건을 달아 운용에 신중을 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선 하원은 이 법을 앞으로 10년 더 연장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상원은 4년을 선호한다.

때문에 상하원 양측이 합의한 절충안은 연장 기한을 7년으로 잡은 상태다. 백악관은 무기한 연장을 주창했으나 일단 의회의 기세에 꺽여 이런 절충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절충안 통과의 열쇠를 쥔 알렌 스펙터 상원 법사위원장은 “연장 기한을 못박은 것은 법 집행 당국이 제대로 법을 준수하고 있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색영장 대체한 국가안보장, 매년 3만 건 발부

현재 공화, 민주당를 막론하고 많은 의원들 사이에 특히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독소 조항은 수사기관에 의한 사생활 침해 대목이다. 애국법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제215항이 그것이다. 쉽게 말해 이 조항은 연방수사국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테러수사와 관련해 개인의 도서관 열람기록이나 보건기록, 은행계좌의 입출입 내역, 전화도청, 사업거래 내역, 인터넷 사용 내역은 물론 집주인이 없는 상황에서도 용의자의 집을 언제든 수색할 수 있다. 과거 같으면 당연히 판사로부터 수색영장을 발부받아야 이런 일이 가능했지만 애국법은 이를 무력화했다.

연방수사국은 수색영장 대신  판사의 승인이 필요없이 자체적으로 발부한 ‘국가안보장’(National Security Letter)만 제시하면 시민의 사생활 기록을 무차별로 캘 수 있으며, 대상자는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절대 관련 사항을 대외에 공개해선 안된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연방수사국은 9.11 테러 이후 매년 평균 3만건 이상의 국가안보장을 발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독소 조항과 관련해 현재 의회는 연방수사국에 대해 단서를 붙였다. 테러수사와 관련해 특정인의 사생활 기록을 얻고자 할 때는 그런 행위가 실제로 수사와 연관돼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서관 열람기록 등을 요구할 경우 그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사법부의 판단을 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그간 인권 침해의 주범으로 꼽혀온 국가안보장 남용에 대해서도 의회는 제동을 걸었다.

앞으로 수사기관으로부터 국가안보장을 접수한 사람은 이를 곧바로 변호사에게 알려서 사법부의 판단을 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백악관과 강경파 공화당 지도부는 수사기관에 이런 제한을 가할 경우 테러와의 전쟁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애국법 재연장 여부의 첫 관문인 상원 법사위원회의 알렌 스펙터 위원장은 “이같은 조치야말로 국가안보장의 악폐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크게 환영하고 있다.

사실 의회가 문제의 215 조항에 그토록 예민한 데는 이 독소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1조를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민권단체들의 끈질긴 주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대표적인 민간 민권옹호 단체인 미국민권연맹은 지난 2003년 7월 이 조항과 관련해 위헌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쉽게 말해 정부가 어깨 너머로 누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어떤 내용을 접속하는지를 몰래 들여다본다면 누구라도 그런 행위를 자제할 수밖에 없는데, 이거야 말로 표현의 자유를 묵살한다는 것이 이 단체의 논리다. 미국민권연맹의 자밀 제프 변호사는 “당국의 감시를 허용한 애국법은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제1조의 직접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올해 말로 시효가 만료되는 애국법의 운명은? 현재로선 올 연말까지 재연장이 현실화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와 관련해 특히 눈여겨 볼 것은 공화, 민주 상원 의원 6명으로 이뤄진 애국법 투쟁 핵심 멤버들이다. 이들의 좌장격인 민주당 소속의 러셀 파인골드 의원은 “애국법이 미국인의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보호한다는 보장이 없는 한 결사 반대할 것”이라며 최악의 경우 필리버스터를 한다는 배수진을 치고 나섰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의사진행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는 방식으로 특정 법안의 표결을 무력화를 기도하는 상원의 전통적 제도다. 현재 기존 형태의 애국법의 연장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공화당 15명과 민주당 38명을 합쳐 무려 53명에 이른다.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려면 최소 60명의 의원이 필요한데 이미 53명이 반대 쪽에 선 상황이라 부시 행정부로선 여간 낭패가 아니다.

때문에 필리버스터 출현을 막기 위해서라도 백악관은 결국 의회의 절충안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문제는 현재 막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애국법 독소조항 개정에 대한 절충 협상이 어떤 모습을 띠느냐 여부다. 문제의 독소 조항들이 희석되거나 제거됐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애국법은 6인의 초당적 투사들과 동조 세력이 꺼내들 필리버스터란 무기 앞에서 표류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