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권력과 동일시하기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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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형사 느와르:<미스터 소크라테스> <6월의 일기>

 
올해 이미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둔 영화들을 한번 살펴보자. <혈의 누> <박수칠 때 떠나라> <형사 duelist> <이대로, 죽을 순 없다> <강력 3반> <오로라공주> <미스터 소크라테스> <6월의 일기>. 이번에는 기획되고 있거나 촬영하고 있는 영화를 보자. <야수><데이지><사생결단><흡혈형사 나도열><강적><형사 공필두><조용한 세상>.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주인공 또는 주요 등장 인물 중 한 명이 반드시 형사라는 것이다.

어림잡아도 15편이다. 최근 3년간 한국 영화의 연간 평균 제작 편수가 80편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편애’다.  이 중 최근 개봉해 비교적 선전하고 있는 <미스터 소크라테스>는 냉정하게 보아 범작 수준을 넘지 못하는 영화이지만,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영화 (하위)장르사의 한 지류를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인공 구동혁(김래원 분)은 고등학교를 뛰쳐나온 ‘양아치’다. 스크린의 조폭시대를 열었던 <친구>나 잘 만든 학원폭력물 <말죽거리 잔혹사> 그 어디쯤에서 시작한 셈이다. 3류 깡패이던 구동혁은 폭력 조직의 ‘재교육’을 받아 ‘인간 개조’된다. 과외 선생님이 또래의 여대생이라면 애틋한 로맨스가 피어오르는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되겠지만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잔인무도한 교관 혹은 감시-처벌자라는 점에서 <실미도>나 <올드보이> 쪽이다.

악덕 기업가, 비리 권력층과 연계된 범죄 조직은 사육된 주인공을 경찰 조직에 투입한다. 첩자다. 하지만 도덕 교과서에 철저히 세뇌된 주인공은 마지막 순간 범죄 조직의 명령과 경찰로서의 임무 사이에서 갈등한다(이 과정에서 잠시 주인공의 동생이 적으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형은 아우를 위해 몸을 던진다. 형제애로 회귀, <태극기 휘날리며>?). 결론은 뻔하다.  

일종의 과장 혹은 과잉 독해를 한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 조폭에서 형사로 중심 이동, 깡패에서 경찰로 시점 변화다. 왜 구동혁은 결정적인 순간 ‘깡패’라는 호명에 침묵하고 ‘경찰’이라는 부름에 응답했을까. 한때 어깨에 잔뜩 각을 잡고 스크린을 평정했던 조폭들은 어디 가고 형사가 판을 치게 되었을까.

범죄에 연루된 형사(탐정), 범죄 세계와 다르지 않은 공적 권력을 그리는 것은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의 오랜 전통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 영화 장르의 전개를 볼 때 조폭에 상상적 일체감을 느끼던 관객들이 형사의 시점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조폭 혹은 깡패는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지위다. 공적인 법체계와는 상호 부정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반면 형사는 아무리 근본적인 속성이 조폭과 같게 그려진다고 해도 ‘권력이 인정한 지위’이며 ‘사회 시스템에서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존재’다. 따라서 이 변화에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와 관련한 미묘한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쇄 살인범이 여자·엄마인 까닭

 
공적 사회 체계를 부정하는 존재인 조폭이 한때 관객들의 정서와 욕망을 대리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근저에는 두 가지 ‘정치적 사실’이 놓여 있다. 먼저 민주화 진전과 정권 교체 경험은 이전까지 ‘절대 선’으로 받아들여졌던 정치권력이 ‘통째로 부정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대중의 뇌리에 각인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가 근대화 이후 철저한 ‘두사부 일체형’ 구조를 적어도 최근까지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가족에서 출발해 학교-기업-정부까지 크건 작건 공식적인 체계를 관통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구조, ‘보스 중심의 시스템’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딜레마가 발생하는데, 공식적인 ‘아버지의 질서’로부터 이탈한 조폭 또한 공적 권력의 폭압적이고 권위적인 위계 구조와 똑같은 깡패 조직에서 다시 약육강식·상명하복의 게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폭이 된다는 것은 거대한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또 다른 아버지 되기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늘 예정된 실패의 길을 걷는다. 이 비극은 주인공이 늘 ‘시다바리’이거나 ‘넘버 3’일 수밖에 없다는 비유로 나타난다. 조폭 영화의 선조 격이었던 <게임의 법칙> 이후 이어진 <초록물고기><넘버3><친구>에서 소년은 아버지를 열망하지만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반면, 정권 교체 후를 특징짓는 것은 ‘아버지와 동일시하기’ 혹은 ‘아버지로 오인하기’이다. 정치권의 갈등이 종종 집권한 개혁 세력과 밀려난 수구 독재 세력과의 대결로 표상된 이후 대중은 정치권력을 통째로 부정하기보다는 정치 권력 혹은 개혁 세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관점에 지배되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개혁이 늘 그렇듯 형사 역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 형사는 때로 무능하거나, 잘못을 범하거나, 범죄자에게 연민과 공감을 갖거나, 심지어 연대하기도 한다.

‘왕따’라는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연쇄 살인 스릴러 <6월의 일기>에는 남녀 두 형사가 등장한다. 특이한 것은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공주>와 마찬가지로 <6월의 일기>에서도 연쇄살인범이 모두 여자이며 엄마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 역시 ‘엄마 되기의 피곤함’이 무의식적이지만 노골적으로 토로되고 있다. <6월의 일기>는 ‘억압받고 착취당한 여성성의 사후 복수’와 ‘여성성을 모성에만 가두어 두려는 남성적 시선’의 묘한 균형 속에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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