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2005 정시 논술
  • 2006 논술 ()
  • 승인 200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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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제 및 제시문

다음 네 개의 제시문에 공통되는 주제를 말하고 제시문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시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 1 ) 우리가 가진 근본 욕구들 중에는 도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큰 조직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를 불가피하게 억압받고, 조직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규칙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었지만 인간 자체는 아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만들어졌어도 거기에는 ‘사람의 손길(human touch)’과 같은 유연성이 없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조직의 구성원은 도덕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행동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게 된다. “미안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제가 받은 지시 사항입니다.” 이처럼 큰 조직들은 아주 불량하고 부도덕하게, 또는 아주 어리석고 비인간적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는 그 구성원들이 본래 그래서가 아니라 그들이 조직의 크기에서 오는 하중을 받기 때문이다.

큰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지만 이런 비판은 마치 자동차가 배기 가스를 배출한다고 해서 운전자를 나무라는 것과 같다. 천사라도 공기를 더럽히지 않고 차를 운전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결국 잘못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있다기보다는 조직의 크기에 있는 것이다. 개인들로 하여금 도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가진 사회는 부도덕하다. 조직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거대주의에 의한 합리화’에 중독된 현대인들은 너무 커진 규모 속에?좌절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 2 ) 야구공은 큰 공인가 작은 공인가? 야구공은 탁구공에 비해서 크지만 축구공에 비해서는 작다. 강은 개울보다 크지만 바다보다는 작다. 야구공도 크다고 말할 수 있고, 강도 작다고 말할 수 있다. 개울만 보던 사람에게는 강이 커 보이지만,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에게 강은 작아 보일 것이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에 갔을 때, 우리는 모든 것들이 너무 작아 보여 깜짝 놀라기도 한다. 어릴 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대문이 이제는 작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어린이들의 그림에서는 종종 사람의 얼굴이 몸보다 크게 그려진다. 아떫?어린이의 심리적 경험 속에서는 얼굴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는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었다”고 갈파했고,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도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고 노래했다. 티끌이 곧 우주요 모래가 곧 세상이라면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오늘날 조그만 메모리칩 하나에 거대한 도서관을 담을 수도 있으니 그것이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치열한 극소화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 새로 개발된 메모리칩이 더 작아진 것인지 더 커진 것인지 말하기 곤란하다. 외형이 작아져도 용량은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조그만 나비의 날갯짓이 바다 건너 거대한 허리케인을 일으킨다는 ‘나비 효과’에 대해서 말한다. 또 원자보다 작은 극소의 세계와 우주와 같은 극대의 세계가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의상 대사와 블레이크가 노래한 바가 문학적 수사만은 아닐 것이다.

( 3 )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가나 민족은 물론 지역과 도시까지도 지나치게 크고 추상적인 조직체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오늘의 사회가 ‘잡히지 않는 전망’을 이룬다고 설명한 바 있다. 즉 오늘날의 사회에서 어떠한 사람이나 집단도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 의하여 제약을 받게 되어 있지만, 이 관계의 정확한 포착은 우리 손을 벗어나 계속적으로 도망가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제한하면서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 현대 사회의 기괴한 조직은 도시에서 잘 나타난다. 문화의 참 생명력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향상과 해방과 풍요화에서 온다면, 우리의 문화에 대한 생각도 ‘잡히지 않는 전망’을 넘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참으로 핵심적인 문화 공간은 민족이나 도시보다도 더 작은 집단이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가능한 집단, 사회학자들이 ‘대면 집단’이라고 부르는 사회 공간이 우리의 문화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 공간은 하나의 확정된 물리적 구획으로보다는 여러 집단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 속에 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대면 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한편으로는 개인적 자아의 내면 공간에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또는 도시로 번져나가고 국가나 민족 그리고 세계의 지평으로 둘러싸인다.

소집단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구체적 삶의 공간으로서 구체적 인간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지역이나 도시는 이 소집단에 다양성과 객관성을 부여하는 필수적 요인이 된다. 도시든, 지역이든, 국가든, 이러한 것들은 소집단의 구체성의 원리가 확대될 수 있는 것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테두리는 ‘잡히지 않는 전망’ 또는 제약으로서만 작용하는 조직이기를 그칠 것이다.

( 4 ) 북녘 바다에 곤(鯤)이란 물고기가 있다. 그 몸집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 물고기가 화(化)해서 새가 되는데, 이름 하여 붕(鵬)이라 한다. 붕의 몸집 또한 몇 천 리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런데 이놈이 한 번 화가 나서 날았다 하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을 가린 구름처럼 모든 것을 뒤덮는다. 괴이한 이야기만 적어 놓은 <제해(齊諧)>라는 책에서는, “대붕(大鵬)이 남녘 바다로 날아가려면 물 위를 삼천 리나 달려야 비로소 날아오르게 되고, 그런 뒤 다시 날개로 바람을 치면서 구만 리를 올라가서야 항로를 잡는다. 그러고는 그대로 육 개월을 날아 목적지인 남녘 바다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몸집이 크면 그를 받아들일 공간도 커야 하고 정신이 위로 비상하려면 그 경지 또한 높아야 한다. 바람의 공간이 넓지 않으면 큰 새가 날 수 없다. 대붕이 바람을 치며 구만 리 창공을 날아오르는 것도 그래야만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아무런 장애 없이 남녘 바다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치를 모르는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뽕나무 그늘에서도 얼마든지 힘껏 날 수 있고 잠깐 사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구만 리나 날아올라서 남쪽으로 가는 것일까? 불과 두어 길 되는 공간에서도 뛰놀 수 斂?쑥대밭 사이에서도 자유로이 날 수 있으니, 이 또한 최대의 소요(逍遙)가 아닌가? 어째서 대붕처럼 날아야만 제일이란 말인가?”라고 한다. 작은 지혜(小知)는 큰 지혜(大知)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시간(小年)은 긴 시간(大年)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밤과 새벽을 알 리 없고 여름벌레가 눈과 얼음을 알 리 없는 것이다. 이것이 큼(大)과 작음(小)의 차이이다. 새끼 비둘기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

유의 사항    
- 답안에는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을 쓰지 말 것.
- 논술문의 제목은 쓰지 말 것.
- 제시문을 단순히 요약하거나 옮겨 쓰지 말 것.
- 분량은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총 1600±100자가 되게 할 것.


해설

■ 문제 분석
문제에서 요구하는 사항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네 개의 제시문에 ‘공통되는 주제’를 서술하는 것이 첫 번째 요구 사항이며 2 제시문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두 번째 요구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3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라는 것이 세 번째 요구 사항이다.
이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논술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시문의 요지를 파악해서 공통된 주제를 찾아내고, 다음으로 각 제시문 간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논리적으로 추론한 다음 그 내용을 서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공통 주제에 대한 각 제시문들의 논지를 바탕으로 자신을 견해를 서술하면 된다.

■ 제시문 요지
( 1 )
우리에게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려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큰 조직에서는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는 조직의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 속의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현상은 옳지 못하다. 거대한 조직 속에서 현대인들은 무기력해진다.

( 2 ) 크고 작다는 것은 단지 상대적일 뿐이다. 따라서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극소와 극대는 모두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 3 )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너무 커서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파악할 수가 없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작은 집단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작은 집단 간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에 의해서 우리는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대한 사회는 이러한 소집단이 존재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 4 ) 곤이란 물고기가 화하여 붕이란 새가 되는데 그 움직임이 불가사의하다. 몸이 크면 머물 공간도 커야 하고 정신이 비상하려면 경지도 높아야 한다. 작은 곳에 머무는 작은 새들이 대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제시문의 공통 주제
제시문들의 공통 주제는 큰 것과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제시문들의 관계
제시문 1은 큰 조직을 움직이는 규칙은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도덕적 욕구를 억압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큰 조직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제시문 3은 이러한 제시문 1과 같은 맥락에서 큰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해결하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제시문 3에서는 지나치게 커서 추상화되어 버린 큰 사회보다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상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소집단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본다. 그래서 큰 사회는 바로 이러한 소집단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작은 것의 가치를 옹호한다.
제시문 4는 제시문 1, 3과는 반대 입장에서 큰 것의 존재 의미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즉, 큰 것과 작은 것은 그 존재 방식이 다르므로 작은 것의 눈으로는 큰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대붕과 작은 새의 비유를 통해서 말하면서 큰 것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제시문 1, 3과 제시문 4는 서로 대립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인식의 관점이 일치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제시문 2는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 자체를 부정한다. 제시문 2에서는 큰 것과 작은 것은 단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극소와 극대는 서로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자기 견해 서술의 방향 설정
논제의 요구 사항은 제시문들의 공통된 주제를 찾고 연관 관계를 설명한 후 이에 대한 자기 견해를 논술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공통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한다고 해서 논술의 제한 영역이 없는 자유로운 논술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막연하게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기보다는 제시문들의 연관 관계를 하나의 테두리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논술 영역을 확정한 후 자신의 견해를 전개하는 것이 좋다.

위 제시문들의 연관 관계를 살펴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큰 것과 작은 것이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제시문 1과 3은 큰 것과 작은 것을 큰 조직 혹은 큰 사회와 작은 조직 혹은 소집단으로 구체적으로 대비시켜 놓고 있다. 제시문 4는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고, 제시문 2는 추상적인 측면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제시문 1과 3에서 다루고 있는 구체적인 큰 것과 작은 것(큰 사회와 소집단)을 논의의 중심에 놓고 제시문 2와 4를 참고하여 논술하는 것이 적절한 제한 영역 설정이 될 것이다.

■ 전체 개요 
1 큰 것과 작은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2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큰 것과 작은 것을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도 옳지 않다.
4 큰 것과 작은 것을 상호 조화의 입장에서 파악해야 한다.

예시 답안

위 제시문들의 공통 주제는 큰 것과 작은 것이다. 제시문 1은 큰 조직을 움직이는 규칙은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도덕적 욕구를 억압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큰 조직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제시문 3은 이러한 제시문 1과 같은 맥락에서 큰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해결하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제시문 3에서는 지나치게 커서 추상화되어 버린 큰 사회보다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상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소집단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본다. 그래서 큰 사회는 바로 이러한 소집단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한다고 주장하며 작은 것의 가치를 옹호한다. 제시문 4는 제시문 1, 3과는 반대 입장에서 큰 것의 존재 의미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즉, 큰 것과 작은 것은 그 존재 방식이 다르므로 작은 것의 눈으로는 큰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대붕과 작은 새의 비유를 통해서 말하면서 큰 것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제시문 1, 3과 제시문 4는 서로 대립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인식의 관점이 일치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제시문 2는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 자체를 부정한다. 제시문 2에서는 큰 것과 작은 것은 단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극소와 극대는 서로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큰 규모의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작은 공동체에도 속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동시에 속해 있는 큰 조직과 소집단은 제시문 1, 3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 다른 원리에 의해서 운영되고 이에 따른 문제점도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가 큰 것과 작은 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립하는 것은 큰 조직과 소집단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를 부정하는 제시문 2의 견해는 옳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은 분명히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우리에게는 상대적인 차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눈앞에 놓여 있고 이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래서 단지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를 부정하기만 한다면 이는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별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큰 것과 작은 것을 대립적인 관계로만 파악하는 것도 문제는 있다. 제시문 1, 3, 4에서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고 어느 한 쪽의 가치가 더 우월한 것으로 보게 되면 크고 작은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은 파악할 수 있지만 해결 방안은 서로 공유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크고 작은 차이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본다면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되고 큰 것 안에는 많은 작은 것이 있다는 상호 유기적 관계를 놓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큰 것과 작은 것을 상호 조화의 입장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는 마치 우리 몸이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독립적인 생명인 세포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공통의 목적인 생명의 유지를 위해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큰 것과 작은 것은 각각 서로 다른 원리에 의해 움직이지만 공통의 목적을 위해 상호 작용을 한다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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