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이태일 (중알일보 야구전문기자) ()
  • 승인 2005.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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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WBC 대표팀 감독의 ‘리더십과 삶’/믿음과 기다림의 미학 ‘압권’

 
‘이 사람에게 뭐가 있을까?’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됐을 때, 초대 감독으로 선임된 김인식 감독을 만나러 갔다. 전주 효자동의 한 아파트. 김인식 감독은 그곳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겨울이었고, 길 군데군데에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 순백의 눈을 밟고 찾아가는 동안 머리 속으로 김인식이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저렇게 그려보고, ‘뭘 물어볼까’ ‘초면인데 어떻게 대해주려나’ 생각하며 걸었다.

아파트 앞에 이르러 전화를 했다. “감독님이십니까, 이태일입니다.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대답은 짧았고, 말은 느렸다. “어…. 올라오슈. 지금 하드 먹고 있는데, 그거나 같이 먹읍시다.”
하드? 아이스케키란 말인가? 40대 후반의 프로야구 감독이 혼자 사는 집에서, 혼자 하드를 먹고 있다고? 속으로 ‘다소 엉뚱한 데가 있는 분이군’이란 생각을 하는 동안 발걸음은 현관까지 왔다. “똑,똑”

아는 척 안하고 나서지도 않는 ‘꽉 찬 사람’

김인식 감독은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와요”라고 거실로 안내했다. 첫 만남이었다. 그곳에는 소파와 텔레비전, 그리고 테이블에 하드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때 시선을 잡아 끈 것은 텔레비전 속의 화면. 그 화면에는 메이저리그 야구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전신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내 방송사에서 메이저리그 중계를 시작하기 전이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김 감독은 어디서 그 비디오 테이프를 구했던 것이다.
“그냥 심심해서 야구 보고 있었어. 같이 봅시다.” 또 짧은 한마디. 그리고 침묵. 둘이 나란히 앉아 야구를 봤다.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고 놀런 라이언이 던지고 있었다. 오가는 말도 없이 그저 야구를 봤다. 하드를 쪽쪽 빨면서.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게 화면속의 공통된 화제와 관련된 말이 오갔다. 다행히 메이저리그를 조금 알고 있었기에 김 감독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김감독도 그 질문이 가상해서(?)인지 조리 있는 설명을 해줬다. 그렇게 서로를 알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 감독에게서 느끼는 한결같은 감정. ‘아는 척을 안 한다’는 거다.

김인식 감독은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 해박하다. 경기 전 감독실에서 혼자 해외 야구를 보며 공부도 하고, 스포츠 전문지 해설위원을 할 때는 메이저리그 서적도 손에 들고 다녔다. 이 선수 저 선수 얘기가 나오는 대로 대답하고, 가르쳐 준다. 그런데 남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먼저 하는 법이 없다. 야구뿐만 아니라 생활이 그렇다.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흘러가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자신의 말투처럼 차분하고 느리게 간다. 대신 옆으로 새는 법이 없다. 곧게 흐른다.

1998년 시즌을 앞두고 프로야구는 일대 변화를 맞았다. 외국인 선수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구단이 알아서 선수를 뽑는 게 아니고 한 곳에 다 모여서 드래프트를 했다. 이른바 ‘트라이아웃’. 김인식 감독은 그때 OB 베어스 감독으로 선수를 뽑으러 갔다. 그때 OB의 선택은 내야수 에드가 캐세러스와 외야수 타이론 우즈. 캐세러스는 워낙 깔끔한 플레이를 했고 수비가 뛰어났다. 그런데 우즈? 테스트 경기에서 헛방망이질이 일쑤였고, 수비도 큰 메리트가 없었다. 다른 기록 좋은 외야수들이 많았다. 우즈는 개막과 함께 선발로 뛰기 시작했지만 계속 헛스윙만 해댔다. 4월 한 달이 다 지나갔다. 타율이 2할도 안 됐다. 그런데도 3번 우즈, 4번 김동주. 타순은 바뀔 줄 몰랐다.

“우즈 때문에 타선의 흐름이 끊기는 것 아닙니까?” 기자들의 지적이 시작됐다. “우즈는 변화구에 너무 약하지 않나요?” 여기저기서 비난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김인식 감독은 특유의 시골 아저씨 같은 인자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다려 보라’는 의미였다. 그 뒤 우즈는 어떻게 됐을까. 우즈는 한국 투수들의 바깥쪽 변화구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엄청난 파워를 앞세워 홈런을 펑펑 터뜨렸다. 그리고 결국 당시 장종훈이 보유하고 있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41개)을 깨고 42개의 대포를 날려 당당히 시즌 홈런왕에 올랐다. 김인식 감독의 믿음과 기다림. 그 특유의 스타일은 그해 우즈로 시작해 올 시즌 한화에서 재기의 기지개를 켠 조성민까지 이어지고 있다.

뇌졸중 이기고 한화 부활시켜

2001년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두산 베어스는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 우승이 결정되던 날 선수단 전체가 모인 뒤풀이 자리에서 김인식 감독은 단상에 올라 신나는 리듬에 맞춰 ‘허슬’로 불리는 댄스를 선보였다. 그는 아들뻘 되는 선수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맞출 줄 안다. 무조건 점잔을 빼는 것이 위엄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안다. 그렇다고 전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한 가지. 1999년 시즌 두산은 플레이오프 한화와의 경기에서 무승 4패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기력한 패배였다. 전력상 우세가 예상됐던 승부였기에 감독으로서는 집중력 없이 경기를 펼친 선수들에게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런데 4차전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에 모인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였지만 김인식 감독은 별 말이 없었다. 오히려 시즌 중의 한 경기가 끝난 것처럼 담담했다. 그는 그날 선발 투수였던 강병규에게 “병규, 오늘은 이런 것, 이런 것이 좋지 않았다. 다음에는 잘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라고 차분히 지적할 뿐이었다. 선수들은 그런 김인식 특유의 리더십에 마음을 열고 더 분발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2003년 시즌을 끝으로 두산 베어스를 떠난 그는 1년 동안 아마야구 육성위원장을 맡아 아마추어 야구 발전을 위해 일했고 2004년 11월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프로야구에 복귀했다. 그때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감독 부임이 결정된 뒤 곧바로 선수단을 이끌고 일본 전지훈련을 다녀왔고 선수들의 결혼식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바쁘게 뛰던 그가 오른쪽 팔다리에 마비증상을 느껴 병원에 입원했다. 뇌졸중 초기 증세였다. 그때부터 즐기던 술, 담배를 모두 끊었다. 성경을 머리맡에 놓고 지내기 시작했고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재활은 자기와의 싸움. 그는 이겨냈다. 모두가 ‘건강 때문에 감독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는 엄청난 자기 절제와 몸 관리를 통해 보란 듯이 약체로 꼽히던 한화를 4강으로 이끌었다. 지연규, 김인철 등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고참들이 재기했고 문동환, 이도형 등 한물 간 것으로 여겨졌던 베테랑들이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

또 한번 그의 리더십이 야구계의 화제가 됐다. 그리고 그는 내년 지구촌 야구인의 축제이자 최고수를 가리는 국가대항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의 한국대표팀 사령탑이 됐다.
그는 지금도 혼자 유니폼을 입는 데 10분이 걸린다. 동작이 자유롭지 못해서다. 그래도 절대 내색하는 법이 없고, 주위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누가 봐주길 바라지 않고, 누가 알아주길 기대하지 않는다. 야구인생 50년. 성공과 좌절과 그 수 많은 승부의 갈림길에서 그는 인생의 뭔가를 깨달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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