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으로 탈북 문제 보았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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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택 감독 인터뷰/“아시아 관객도 겨냥”

 
블록버스터 영화 감독의 어깨에는 다른 감독보다 몇 배 큰 부담이 얹어진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한 편 실패할 때마다 영화 투자자들이 움츠려서 영화계 전반이 돈 가뭄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기지개를 켜던 한국영화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아 유 레디> <예스터데이> <튜브>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등이 연거푸 실패하면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메가폰을 잡고서 시나리오 집필 때부터 개봉까지 ‘블록버스터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곽경택 감독을 만났다. 

- 아버님이 실향민이라고 들었다.
밥상머리에서 고향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8남매 중 두 형제만 월남하셔서 애틋한 정서를 가지고 계시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북한에 관심이 많아 북한 관련 서적을 많이 보았다. <남북의 창> <통일전망대> 같은 프로그램도 즐겨 봤다.

- 어떤 영향을 미쳤나?
아버지의 고향 얘기와 반공교육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었던 것 같다. 간첩이 되어서 나타난 삼촌을 두고 고발해서 착한어린이상을 받을지, 아니면 숨겨줄지 고민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 아버님이 영화에도 조예가 있다고 들었다.
시나리오를 작성할 때 아이디어를 많이 주셨다. 남매가 상봉했을 때 누나가 돈뭉치를 건네면서 ‘너는 보고만 있어라, 흥정은 내가 할 테니’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버님이 힌트를 주신 것이다. 다시 봐도 울림이 있는 장면이다.

- 탈북자를 소재로 택한 이유는?
탈북자 문제를 물 위로 드러내고 싶었다. 중국의 홍수 소식이나 동남아의 지진 소식보다 북한 용천 폭발사건을 우리는 더 애절하게 느낀다. 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 탈북자들을 만나 보았나?
많이 만났다. 한 탈북 청소년을 만났는데, 물 냄새가 무섭다고 했다. 6명이 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넜는데 건너고 나니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 순간 강을 건널 때의 공포스러움이 소스라치게 다가왔다.

- 특별히 모티브가 된 사건이 있었나?
한국 아이들을 향해 그림엽서를 그려 보냈던 길수 이야기가 출발점이었다. 탈북 가족을 담은 한 영상물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탈북 가족을 보았다. 그 노래를 부르는 아이의 눈동자가 너무나 불안해 보였다. 그 아이의 시선으로 탈북문제를 바라보고 싶었다.

 - 아이의 입장이 되어서 탈북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느 날 밤 부모님은 탈북을 감행하기로 하고 잠든 아이를 깨워 옷을 주섬주섬 입혔을 것이다. 한참을 걷고 강을 건너서 어렵게 대사관에 들어왔는데, 받아주지 않는다. 과연 어떤 기분이겠는가?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 대통령·국정원·해군 등이 모두 긍정적으로만 그려져 있다. 촬영 협조를 위해서 내적 검열을 거친 것 아닌가?
전혀 아니다. 신파적일지 모르지만 그런 모습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아시아의 관객에게 우리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류가 한창인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볼까 싶어 강행했다. 미국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런 것들이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이 영화를 통해 우리 영화계가 얻은 것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 등 기술의 진보다. 이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만은 장담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권 프로젝트의 제작 노하우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밖으로 나가면 가능한 경우가 많다. 구축함이나 헬기 장면은 전부 태국에서 태국 군대 장비를 빌려서 찍었다. 국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한류의 진행 속도에 비해서 아시아권 프로젝트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그렇다. 한국 영상물에 대해 아시아가 난리인데, 우리는 너무 안만 바라보고 있다. 밖을 볼 때가 되었다. 앞으로 한국영화의 덩지를 키워 할리우드에 한 번 진출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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