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비밀 안가’라니 유럽 자존심이 운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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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비밀 감옥 허용한 나라 제명할 방침

 
캐나다 시민권자인 아랍계의 마헤르 아라르 씨. 그는 지난 2002년 미국 뉴욕 케네디 공항을 경유해 제3국으로 가려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가 국제 테러 조직으로 ‘9·11 테러’의 주범으로 꼽히는 알카에다의 조직원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 당국에 의해 12일간 구금당한 그는 쇠사슬에 묶여 비행기에 실린 뒤 요르단으로 공수되었다. 다시 그곳에서 육로를 통해 시리아의 수도인 다머스커스로 끌려갔다. 거기서 그를 맞이한 사람들은 시리아의 고문 전문 보안 경찰이었다.

그는 시리아에 도착한 후 첫 2주간 전깃줄로 온 몸을 구타당한 뒤 높이 1.8m, 너비 90cm의 컴컴한 좁은 공간에서 약 10개월간 갇혀 지내야 했다. 최근 영국 BBC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함께 의혹을 자아냈다. 아라르를 테러 용의자로 몰아 시리아로 보낸 주체가 다름 아닌 미국 중앙정보국이 아니냐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에 관한 오도된 정보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빌미를 제공했던 중앙정보국이 이번에는 비밀 수용소 운영 문제로 국제적 비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중앙정보국이 동유럽 국가들을 포함해 최소 8개국에서 비밀 감옥을 운영하면서 이곳에 다수의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수용해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11월초 미국 워싱턴 포스트가 처음으로 폭로한 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외교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파장이 커지자 부시 행정부는 급기야 ‘미국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문을 용납하지 않는다’며 진화에 나섰으나, 한번 돌아선 국제 여론은 냉랭하기만 하다.

이라크 전쟁으로 틀어진 미국·유럽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최근 유럽 5개국을 순방했던 콘돌리사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순방 기간 내내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라이스 장관은 고문 불용의 원칙을 재천명하는 선에서 유럽 우방국의 이해를 끌어내고자 했지만 정작 유럽의 성난 민심을 돌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간 쿠바 관타나모 기지와 이라크 아브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미군 잔혹 행위로 국제 사회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들어야 했던 미국이 이번에는 고문이 횡행하는 ‘안가’를 곳곳에서 운영해왔다는 보도가 나온 후 국제 인권 단체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최초 워싱턴 포스트의 폭로 이후 주요 언론에 의해 잇따라 밝혀진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 수용소 운영 실태는 이렇다. 우선 백악관과 중앙정보국, 법무부 등 관련 부처 최고 수뇌부에게만 알려진 문제의 비밀 수용소는 이른바 ‘암흑의 장소’로 불린다. 또 이같은 시설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이곳에 누가 어떤 절차에 따라, 얼마나 수감되는지 역시 베일에 가려져 왔다.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경우 미국 정부는 국내법은 물론이고 국제법적으로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뿐더러, 국내외적으로 거센 비난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국내법에 따르면 비밀 수용소에 수감자를 격리 보호하는 것은 불법이다. 중앙정보국이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미국이 아닌 해외의 비밀 수용소에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지목된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강력 부인

 미국 중앙정보국은 동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여덟 국가에서 운영중인 비밀 수용소에 알카에다 핵심 조직원 100명 이상을 격리 수감시켰다. 또 이들 가운데 30여 명은 최고의 감호 수준을 요구하는 비밀 수용소에 보내지며, 수용소 운영도 중앙정보국이 직접 맡는다. 나머지 70여명은 테러에 직접 가담한 혐의가 덜하거나 정보 가치가 떨어지는 용의자들로 앞서 소개된 캐나다 국적의 아랍인 아라르처럼 시리아나 이집트, 요르단, 모로코 등의 정보 기관으로 넘겨져 고문 취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수용하는 시설은 수용소가 있는 해당국의 정보기관이 운영을 맡지만, 시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제공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이 비밀 수용소를 운영해왔던 곳들이 예외 없이 인권 유린 국가로 지탄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미국 국무부가 해마다 발표하는 연례 인권 보고서에도, 모로코와 요르단, 이집트 등은 만성적인 교도소 내 인권 유린 국가로 지목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나라들은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은 일절 없다며 부인하고 있다.
 
 
가히 ‘완벽 보안’으로 무장한 수용 시설에 수감된 30여명의 알카에다 핵심 간부들은 외부 세계와 완전 격리된 채 어두컴컴한 지하 감호 시설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변호사로부터 조력을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은 물론, 미국 중앙정보국 관계자 이외의 누구도 허가 없이 이들과 대화하거나 접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대부분의 시설들이 미국 의회가 승인한 예산으로 건설되고 운영되어 왔다는 사실에 미국인들도 놀라고 있다. ‘비밀 감방’이 미국 납세자의 돈으로 운영되었다는 말이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악관은 중앙정보국에 대해 이같은 사실을 상·하원 정보위 의장 외에는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말도록 요청한 사실까지 드러난 상태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애초 언제부터 비밀 감옥을 입안·실행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미국 언론들은 ‘9·11 테러’ 발생 직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테러가 발생한 지 정확히 6일 뒤 부시 대통령이 중앙정보국에 대해 알 카에다 조직 와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을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는데, 바로 이를 근거로 중앙정보국 법무실이 행동 지침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은 생포한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원래는 공해상의 미국 선박에 수감하려 했으나 보안상의 이유로 포기했다. 또 아프리카 감비아의 카리바 호수에 있는 섬들처럼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무인도에 이들을 수용하는 방안도 한때 검토되었지만 이 안도 보안 유지의 어려움을 이유로 기각되었다.

 결국 궁리 끝에 중앙정보국은 태국과 동유럽의 일부 나라에 비밀 감옥을 확보하는 쪽으로 결론냈다. 이에 따라 중앙정보국은 지난 2002년 중반 알카에다 작전부장인 아부 주바이다를 검거해 태국 모처의 비밀 감옥으로 이송했고, 같은해 하순에는 9·11 테러 모의자 중 한 사람인 램지 비날시바를 역시 태국의 한 비밀 감옥으로 공수했다. 그러나 2003년 여름 태국 내 비밀 감옥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중앙정보국은 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이를 폐쇄했다. 

중앙정보국이 동유럽 일부 국가로 눈을 돌려 비밀 감옥 운영 건에 관해 타결을 본 시점이 바로 2002년 말 또는 2003년 초였다. 현재 중앙정보국 해외 안가가 설치된 장소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나라는 폴란드와 루마니아인데, 양국 정부는 비밀 감옥의 존재 자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현재 불똥이 옮겨붙은 쪽은 논란 많은 동유럽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유럽연합측이다. 유럽은 자체적으로 강력한 인권 보장 규약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프랑코 프라티니 유럽연합 법무담당 집행위원은 “회원국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 수용소를 자국 내에 허용한 사실이 밝혀지면 투표권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한 상태다.

유럽평의회는 회원국들에 대해 내년 2월21일까지 불법 억류 여부 등에 대한 답변서를 내도록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 스위스의 딕 마티 상원의원은 지난 12월13일 유럽평의회 인권위원회에 출석해 “미국 중앙정보국이 유럽에서 일부 테러 용의자들을 유괴해 법적 보호조처 없이 이들을 다른 나라들로 불법 이송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의문을 제기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그의 발언이 사실이면, 문제의 회원국은 유럽평의회의 인권 의무 조항을 위반한 것이어서 제재를 받게 된다.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을 정점으로 크게 뒤틀렸다가 최근에 와서야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에는 최근 미국 라이스 국무장관의 유럽 순방도 한몫 했다. 하지만 유럽은 이미 미국 중앙정보국의 불법적인 비밀 수용소 운영 문제로 들끓기 시작했다. 여기에 마티 의원의 발언 내용까지 사실로 밝혀질 경우 대서양 양안 관계는 또 한번 격심한 진통 국면으로 빨려들 공산이 높다. ‘인권의 절대적 보장’ 문제에 관한 한, 유럽은 과거 미국 못지 않게 명분을 중시해왔다. 따라서 ‘정치적 고려’라는 유연성이 작동하는 현재로서는 매우 어려운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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