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세대 벽 허문 50대와 10대의 ‘설복 있는 우정’
  • 許匡畯 기자 ()
  • 승인 199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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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주차관리원 김남철씨와 고등학생 정태원군 “우리는 영원한 친구”

지난 1월말 춘천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한 고등학생이 목욕탕에서 자기 등을 밀어주지 않는다고 60대 노인을 폭행했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바닥까지 떨어진 이 시대의 인륜을 개탄했다.

 그러나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빌딩에서 주차관리원으로 일하는 김남철씨(57)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요즘 젊은이들이 아직은 건강하고 듬직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씨는 최근에 새로 사귄 ‘젊은 친구’ 때문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만난 지 두 달이 채 안됐지만, 마치 몇 년을 사귄 것처럼 정겹고 친근하다. 김씨의 새 친구는 김씨보다 무려 39년 아래인 고등학생 정태원군(18․서울고등학교 2년)이다.

 김씨가 정군을 만난 것은 지난 1월 중순이다. 그는 관리인으로 있는 빌딩이 주택가 입구에 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많은 학생들이 김씨의 빌딩 옆을 지나다닌다. 길가로 난 작은 부스형 사무실 창을 통해 이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김씨의 습관이다. 그 중에서 매일 아침 씩씩하게 가슴을 펴고 등교하는 정군이 김씨의 눈에 띄었다.

 바람이 쌀쌀하게 불던 어느 날 저녁, 김씨는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정군을 불러 세웠다. 사무실로 다가온 정군은 똑바로 서서 한 말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였다. 김씨가 정군에게 ‘반한’ 것은 이 짧은 한마디였다. 그 또래의 청소년이라면 문고리를 잡고 고개를 들이민 채 “왜요?” 하기가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정군과 젊을 때부터 운동이라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는 김씨는 그 다음 일요일에 야구 연습장에 가서 공치기 내기를 하기로 약속했다. 약속은 했지만 혹시나 했는데, 정말 일요일에 정군은 집에서 멀지 않은 김씨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탁구장에서 첫 ‘친선 경기’를 가졌다. 운동이 끝난 뒤 목욕탕에도 함께 가 서로 번갈아가면서 등도 밀어주었다.

 50대와 10대인 두 사람은 근처 피자집에서 치즈가 듬뿍 얹힌 피자 한 판으로 출출해진 배를 채웠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자기가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평소 젊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정군에게 들려 주었다. “공부도 중요하고 친구 사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첫째는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어려운 게 아니라 귀가했을 때나 아버지가 퇴근하셨을 때 손목 한번 잡아드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것이 김씨가 어린 친구에게 들려준 말이다. 며칠 뒤 그가 확인해 보니 정군은 쑥스럽지만 조심스럽게 김씨가 가르쳐 준 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김씨와 정군 손목에는 은으로 만든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김씨는 “예로부터 새로 친구를 사귀게 되면 정표를 만들어 그 친분을 증명했다. 어떤 것이 좋을지 네가 생각해보라”라고 제의했다. 정군이 고심하다 생각해 낸 것은 팔찌를 만들어 하나씩 차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반지나 목걸이도 좋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팔찌를 선택했다. 팔찌 겉면에는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남태지교(男太之交)라고 한글로 새기고(위 사진), 안쪽에는 孝․仁․德이라고 새겨 넣었다.

 두 사람은 이제 흉금을 서로 털어놓는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세상을 오래 산 김씨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것이 많다. 며칠에 한번씩 ‘心身如水 男兒一生不惑’ 같은 글귀를 써오도록 숙제를 내주기도 하고, 상체가 약한 태원이를 단련시키기 위해 운동도 같이 한다. 김씨의 빌딩 67계단은 매일 저녁 두 사람의 왕복 달리기 코스가 된다. 김씨는 손수 나무를 깎아 야구방망이를 만들고 축구공과 야구 글러브도 마련해 두었다. 일요일에 근처 한강 고수부지에 나가 공을 차거나 달리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자기보다 마흔 살이나 많은 늙은 친구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정군은 “가끔씩 세대 차이를 느끼는 경우가 아주 없진 않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처럼 든든하고 많이 배울 수 있어 정말 좋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는 또래 친구들이 두 사람의 사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들 부러워한다고 자랑했다. 물론 정군의 부모도 두 사람의 사귐을 알고 적극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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