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계단 오르는 ‘마술사’
  • 김세훈 (경향신문 기자) ()
  • 승인 2005.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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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연속 FIFA 선정 올해의 선수로 뽑힌 호나우딩요의 ‘축구, 삶, 미래’
 
가는 곳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립 서비스의 대가’ 펠레. 그리고 좀처럼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 ‘독불장군’ 마라도나. 세계 축구판을 뒤흔들었던 두 명의 대스타도 “현재 최고의 축구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똑같이 대답한다. 토끼 같은 앞니가 인상적인 브라질 출신 공격수 호나우딩요(25·스페인 바르셀로나)다. 호나우딩요는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전 세계 159개 축구대표팀 감독과 주장들이 투표한 결과 호나우딩요는 총 956점을 받았다. 잉글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미드필더 프랭크 램파드(306점·잉글랜드 첼시), 지난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득점왕 사무엘 에투(190점·바르셀로나)를 넉넉하게 따돌린 선두였다. 지난해에 이은 2년 연속 수상. 그가 명실상부한 세계 지존임을 재차 입증한 셈이다.

그의 수상에 대한 세계 언론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창조적인 발명가이며 기묘한 사기꾼이다.” 〈프랑스 ‘레퀴프’〉
“그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든다.” 〈이탈리아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그는 스트라이커로, 도우미로, 플레이메이커로 항상 엄청난 힘을 발산한다.” 〈독일 ‘키커’〉
“그는 바르셀로나의 재산이지만 그의 플레이는 전 세계의 것이다.” 〈스페인 ‘델 문도 데포르티보’〉
호나우딩요는 1980년 3월21일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호나우두 데 아시스 모레이라. ‘호나우딩요’는 ‘작은 호나우두’라는 뜻의 예명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 득점왕에 오른 브라질 출신 세계적인 공격수 호나우두(29·레알 마드리드)에 버금가는 선수라는 의미다.

호나우딩요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여느 브라질 선수처럼 빈민가 출신이라는 점과 그의 아버지와 형도 축구선수였다는 점뿐이다.
브라질에는 “아들에게는 축구를 시키고 딸은 댄서를 시켜라”는 속담이 있다. 브라질 빈민들이 출세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 축구 선수나 댄서가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대부분 브라질 아버지들이 아들의 첫돌 선물로 축구공을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세에 최연소 브라질 대표로 뽑혀

병기창고 용접공과 주차 관리요원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그의 아버지도 아마추어 축구단 선수였다. 형 호베르투 아시스도 브라질 프로 구단 그레미우에서 전도 유망한 공격수로 활약했다. 다만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일찍 접은 게 아쉬울 뿐이다.
‘사커 DNA’를 보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호나우딩요도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그가 해변에서 공을 차고 풋살 게임을 많이 한 것이 지금과 같은 화려한 개인기를 가질 수 있는 원천이었다. 호나우딩요는 열 살 전후 형을 따라 그레미우 유소년 팀에 입단,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국제 무대에 혜성과 같은 신고식을 한 것은 1997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였다. 그는 당시 득점왕과 MVP를 휩쓸며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다. 전 세계에 슈퍼스타의 탄생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1999년 호나우딩요는 최연소(19세)로 브라질 국가대표로 뽑혔다. ‘축구의 해가 뜨는 나라’인 브라질에서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1999년 멕시코 코파 아메리카(남미 국가대행전)에서 고국에 또다시 우승컵을 안겼다. 그가 절묘한 개인기로 수비수를 제친 뒤 GK까지 농락하며 넣은 베네수엘라전 골은 그가 ‘제2의 펠레’로 평가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그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득점왕과 MVP에 오르며 우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브라질 선수의 공통된 꿈은 많은 돈을 받고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1998년부터 그레미우에서 뛰던 호나우딩요도 스무 살이 넘자 유럽 구단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2001년 드디어 프랑스 명문 파리 생제르망으로 이적하며 유럽 진출을 이뤘다. 당시 이적료는 무려 1천만 달러(약 100억원)였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진출 초기 생제르망과 그레미우 간 이적료 분쟁에 휘말려 8개월간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했다. 게다가 생제르망의 루이스 페르난데스 감독으로부터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프랑스 언론으로부터는 ‘새벽을 즐기는 호니’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감독과의 불화와 언론의 비난 속에서도 틈틈이 경기에 나선 그는 당시 9골을 뽑아내 자신에 대한 온갖 논쟁을 일거에 잠재웠다.

“이제 나를 호나우두라고 불러라”

그는 간판선수를 뜻하는 배번 10번을 달고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그는 호나우두·히바우두와 함께 브라질의 공격을 이끄는 삼총사를 뜻하는 ‘3R’로 불리는 당당한 주전이었다. 그는 한·일 월드컵에서 브라질에 다섯 번째 월드컵 우승컵을 안겼고 그가 잉글랜드전에서 터뜨린 GK를 살짝 넘기는 35m짜리 절묘한 프리킥 골은 그의 천부적인 골감각과 절묘한 슈팅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그는 2002~2003시즌 생제르망이 유럽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자 다시 팀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세계 명문 클럽들은 이미 세계 정상급 선수임을 입증한 그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그는 결국 2천7백만 유로(약 3백50억원)의 이적료를 제시한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었다. ‘빅리거’가 된 호나우딩요는 스페인 데뷔 첫 시즌인 2003~2004시즌 바르셀로나를 리그 2위로 끌어올린 뒤 2004~2005시즌에는 사무엘 에투, 리오넬 메시, 헨릭 라르손과 함께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탁월한 스피드, 기묘한 슈팅력, 절묘한 어시스트 능력, 넓은 시야, 천부적인 골 감각, 강한 체력 등 호나우딩요는 축구 선수가 갖춰야 할 조건들을 대부분 갖췄다. 그는 또 최전방 공격수·처진 스트라이커 등 공격수는 물론 중앙 플레이메이커와 측면 미드필더까지 공격에 관한 모든 포지션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 플레이어다. 바르셀로나의 레이카르트 감독은 최근 “호나우딩요가 맘껏 제 기량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팀의 최고 전술이다. 그는 포지션에 상관없이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라고 칭찬했다.

‘볼의 마술사’ ‘연체인간’ ‘그라운드의 예술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현존 최고 선수’ 등 그를 극찬하는 표현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가 진짜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이런 화려한 닉네임들이 아니라 바로 그의 본명인 ‘호나우두’다. 그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선배 호나우두에게 잠시 빼앗겼던 그의 본명을 되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세계 축구팬들은 그를 호나우딩요가 아닌 호나우두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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