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웬 만리장성?”
  • 부에노스 아이레스 · 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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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미국의 ‘국경 이중 장벽’ 계획에 강력 반발

 
미국 정부가 멕시코 국경 지역에 멕시코 방면으로부터 밀입국을 막기 위해 추진 중인 장벽 건설 계획이 멕시코는 물론 남미 국가들의 반미 감정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순 미국 하원은 약 3천4백km에 달하는 멕시코와의 전체 국경선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1백30km에 3m 높이의 이중 담장을 건설하기로 한 내용이 담긴 수정 이민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수정 법안은 오는 2월 의회 상원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하원의 표결 직후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 일부 언론이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미국 이민 관련 전문가들은 상원 통과를 낙관하고 있다. 현재 미국 상원 쪽에서 이 법안에 대한 거부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은 티후아나(멕시코 국경 도시 중 하나)와 샌디에이고 사이 국경 통로에 철책을 세웠다. 현재 계획 중인 국경 담장이 계획대로 건설되면 이는 중국 만리장성을 빼고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 경계물이 된다. 이는 중남미 불법 입국자 및 체류자를 통제하려는 고육책에서 나왔으나, 멕시코는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들로부터 크게 반발을 사고 있다.

멕시코 폭스 대통령은 이 계획에 대해 ‘위선적인 대남미 정책’ ‘인종 차별’ ‘수치스러운 짓’ 따위 온갖 수사를 동원해 비난을 퍼붓고 있다. 또 1989년 민중 봉기로 붕괴된 베를린 장벽을 들먹이며, 미국의 계획을 ‘구세기적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멕시코는 남미의 전통적인 ‘반미 국가’인 쿠바나 베네수엘라와는 달리 친미 정책을 펴왔다. 그런데 이번 문제에 관해서는 거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폭스 대통령은 반미 감정을 갖고 있는 모든 라틴 국가의 여론을 동원해 국제적 압력을 형성하는 한편, 당장 실질적 피해를 입게 될 중미 국가의 회합을 추진하고 있는 미주기구(OEA) 회의에도 이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할 계획이다.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 문제와 직결

폭스 대통령의 ‘결단’에 대해 그동안 멕시코측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어왔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모처럼 반색하고 나섰다.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남미 정상 회담에서 멕시코의 폭스 대통령을 ‘미국의 강아지’로 호되게 비난하는 등 서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미국에 저항하는 멕시코측의 움직임에 적극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온두라스와 과테말라도 미국 비난에 가세했다. 과테말라 오스카르 베르헤르 대통령의 비난은 매우 강경했다. “이민 억제는 불가능한 일” “친구와 동반자를 찾는 미국 정부가 모든 라틴 국가를 모독하고 있다”라는 따위의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미국 정부의 불법 이민 단속 정책은 단순한 인권 차원뿐만 아니라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 문제와 직결되어 있어 반발의 강도는 더 셀 수밖에 없다. 과테말라의 경우, 가족 송금이 2005년 한 해에 약 30억 달러에 달해 국가 경제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엘살바도르의 경우는 약 28억 달러, 멕시코 역시 2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인은 1천1백20만명에 달하고 이 중 5백90만명(57%)이 불법 체류자들로, 캘리포니아 주나 뉴욕·시카고 등 대도시에 살고 있다. 이들은 주로 건축업이나 서비스업, 제조업 분야에 종사하거나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불법) 이민자들이 미국 경제 후퇴의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는 멕시코 폭스 대통령의 발언도 이같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 미국은 노동력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담배·목화 등 주요 작물의 추수기에는 밀입국을 완화하거나 방치하다가 추수철이 지나면 단속을 강화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 또한 ‘미국판 만리장성 계획’에서 남미인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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