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삼씨의 국정원 8년 체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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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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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3년 1월 10일, 한창 추운 겨울날 오후 안기부 30기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이문동 청사에 첫 출근했다. 우리들은 양지관이란 기숙사를 배정받아 입소했는데 훈육관은 “너희들은 03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입사한 정규 30기다”라고 말했다. 우리 동기는 남녀 100여 명이 3개 반으로 나뉘었는데 신분증 대신 노란 명찰이 주어졌다. 나는 동기들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다.


안기부 정규과정 교육은 크게 전반기 과정과 후반기 과정으로 나뉜다. 전반기 과정은 정보 요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품성을 기르는 데 주안을 둔다. 주로 기본 교양과목과 함께 국내 정세와 국제 정세, 북한 정세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희귀한 자료를 접할 기회도 있다. 우리는 김정일이 연 비밀 파티에서 기쁨조가 캉캉춤을 추고 있는 영상물을 본 적도 있고, 한총련의 비밀 대의원 회의를 찍은 비디오를 본 적도 있다. 이런 것들은  실무 부서에서 입수한 자료들이었다.

전반기 교육 기간은 체력 단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하이라이트는 공수와 해양 훈련이었다. 공수 훈련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특전사 훈련장에서 3주간 실시했다. 
공수 훈련은 엄청난 휴유증을 남겼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네 차례 점프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구 점프 1회, 헬기 점프 1회 그리고 비행기 점프 2회였다. 그런데 기상이 좋지 못해 기구 점프는 몇 명만 실행하고 포기했다. 헬기 점프는 그런대로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야간 비행기 점프 때 운이 좋지 못했다. 불행히도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었다. 동기들 중 몇몇이 바람에 밀려 산을 넘어 멀리 날아가 버렸다. 어떤 동기는 바위에 부딪혔고, 일부는 나무에 걸렸다. 다음 날 주간 낙하 때도 사고가 이어졌다. 두 번의 낙하 훈련에서 부상자가 열 명 이상이나 나왔다. 단순히 발목을 삔 정도는 부상 축에도 끼지 못했다. 대부분 다리뼈가 부러졌다. 그나마다 평생 불구가 된 동기는 없었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 전 해에 교육받은 선배 중에서는 공수 훈련을 하다 다쳐 평생 불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후반기 교육은 각자 보직하게 될 업무 위주로 소규모 반이 새로 짜였다. 국내정보반, 해외정보반, 북한정보반, 공작반, 수사반, 심리전반, 통신반 등으로 나뉘었다. 나는 국내정보반에 배속되었다. 모두 15명으로 구성된 우리 반의 교육은 주로 현장실습 위주의 교육이었다. 예를 들면, 면담 유출 기법을 실습하기 위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사를 접촉하여 특정한 정보를 알아내 오는 과제가 부여되기도 했다. 그 밖에 미행 감시하는 요령이라든가, 공작원을 접촉하는 방법, 공작망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방법, 카메라나 녹음기 등 채증 장비를 사용하는 요령 같은 것을 실습했다.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1994년 1월 초부터 국내 정보 수집 부서인 대공정책실로 발령받아 남산으로 출근했다. 명칭대로라면 간첩을  잡기 위해 정책을 세운다거나, 간첩 잡는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국내 정치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였다.


나는 윤 아무개라는 동기와 함께 대공정책실 신문과에 배치되었다. 두 사람이 신문과에 배치된 것은, 신문과의 이○○ 기획관이 정보학교까지 찾아와 직접 선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는 1980년대 말부터 진행된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해 언론의 힘이 점차 커지고 있던 때였다. 예전처럼 언론에 직접 위협을 가할 수도 없고, 협조를 받아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언론을 담당하는 수집관이라도 학연이 받쳐주는 직원으로 뽑으려다 보니 서울대와 고려대 출신인 우리 둘이 불려오게 된 것이다. 이 기획관은 나에게 “조선일보는 서울 법대 출신이 아니고서는 접근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에 오랜 동안 안기부 조선일보 담당관을 지냈기 때문에, 조선일보라면 우리 나라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신문과에 발령받을 때부터 조선일보 담당관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신문과에 배치된 지 3주쯤 지나자 울시 미국 CIA 국장의 방한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되는 사건이 터졌다. 한겨레신문 사회부 기자들이 울시 국장의 방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국방부 청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행사 진행 요원들이 가까이서 찍은 필림은 압수했지만,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은 뺏지 못했다고 한다. 극비로 방한한 우방국 정보기관장의 동선이 노출되었으니, 큰 사고가 터진 것이다. 감찰실에서는 어디에서 보안이 새나갔는지 파악하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끝내 유출자를 찾지는 못했다. 문민정부에서는 이러한 보안 사고가 잦았다. 아마추어 청와대에서 정보가 새나갔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오정소 실장은 YS 정부의 ‘넘버 3’
 

한겨레신문이 특종으로 울시 방한을 보도하고 난 후 ‘물먹은’ 여타 신문들이 후속 취재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일보가 “러시아의 해외 정보기관(SVR)의 프리마코프 국장이 1993년 년말에 방한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특종 보도했다. 그러자 또 얼마 후에는 한 신문이 “한·미·러 3국의 정보기관장이 서울에서 비밀리에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너무 오버한 것이었다. 언론사 간에 과다한 경쟁이 빚어낸 확인되지 않은 오보였다.

나의 신문과 생활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새로 부임한 오정소 실장이 1994년 2월, 나를 대공정책실 부속실의 보좌원으로 부른 것이다.  오정소 실장은 원래 해외공작국 출신이다. 해외 부서의 간부가 국내 부서로 옮기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노태우 정권 말기에 언론 여건이 취약해지면서 협력실이란 조직이 새로 생겼다. 언론과의 협조와 조정을 위해 만든 기구였다. 그는 초대 협력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친형이 아무개 언론사 간부 출신인데다, 오실장 자신이 한국일보 사주인 고 장강재 회장 등 언론계 인사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점이 참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오정소 실장은 안기부 내에서 이른바 실세로 통했다. 국내 부서의 차장인 황창평씨와는 고려대 동문이라 그런지 서로 잘 통하는 사이였다. 오실장과 황차장은 문민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황 차장은 YS에게 이른바 ‘노란 봉투’를 몰래 전해준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오정소 실장은 정권의 막후 실세였던 김현철씨와 고등학교(경복고)와 대학(고려대 사학과) 동창이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김영삼 정권의 신임이 두터웠다. 오실장은 김현철씨·이원종 정무수석에 이어 문민정부의 이른바 ‘넘버 3’로 불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은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는 대통령이 그냥 이름만 부르면 금방 최측근으로 인정받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김 대통령이 순시 중에, “정소는 어디 갔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금세 오정소 실장이 최고 실세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 오실장은 문민정부의 모든 악역을 도맡아 처리하는 해결사 노릇을 했다.
나는 신문과 생활과 대공정책실 보좌원으로 근무하면서 정보기관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내가 대공정책실에 근무하던 1994년부터 이미 정권과 언론은 팽팽한 긴장 관계였다. 당시에도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했다. 한번은 오실장이 자신의 친구인 조선일보 편집국 한 간부를 초청해 안기부 직원들에게 강연을 부탁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언론인들은 무조건 조져야 한다. 주먹으로 대하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강의했다. 나는 자기가 언론인이면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들이 안기부 간부에게 ‘정보 보고’


지금처럼 조선일보를 견제하기 위해 정권과 시민단체가 합동 작전을 벌이기 이전이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조선일보의 힘이 막강했다. 조선일보 사주를 ‘밤의 대통령’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때 조선일보는 텔레비전에다 ‘천칭의 한 쪽에 여타 신문을 쌓아 놓고, 다른 쪽에 조선일보를 얹으면, 천칭이 조선일보 쪽으로 기울어지는’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당시 신문들이 대부분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다른 모든 언론을 합친 것만큼 광고를 수주했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문민정권을 탄생시킨 주역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정권을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당시 안기부 내 판단이었다. 기자들 중에 이른바 ‘김영삼 장학생’두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조선일보 고위층에서 이 장학생들에게 “정권에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들은“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는 첩보가 올라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사표를 쓰고 조선일보를 나오자 경쟁 언론사에서 바로 스카우트해 갔다. 나는 대공정책실 보좌원으로 있으면서 일부 기자의 전화를 수없이 받았다. 오실장의 경복고 후배가 자주 전화를 해 정치권 동향 등을 전달해 주곤 했다. 나는 ‘기자가 이렇게 정보기관과 유착해도 되는 건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타고난 기자란 저런 사람을 말하는 게로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비판한 인사는 가차 없이 쫓겨나

오정소 실장은 언론계 인사들과의 유대를 중요시했다. 언론사 사주 중에서는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와 가까웠다. 각 언론사의 편집국장이나 정치부장 같은 간부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이들과는 정기적으로 자리를 만들었는데 모임에 나갈 때는 언제나 현금이 두둑히 든 촌지 가방을 챙겨 나갔다. 당시에는 “안기부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다”라고 말하던 시절이었다지만 촌지라고 하기보다는 뇌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실장의 판공비는 대부분 기자들 촌지에 쓰인다고 할 정도였다. 내가 직접 세어보지 않아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나갈 때마다 족히 수천만원씩은 가지고 나가는 것 같았다.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한 사람에게 수백만원씩 돌아갈 액수였다.물론 기자들의 직위에 따라 촌지의 규모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런 기름칠이 효력을 발휘한 덕분인지, 오실장은 김대중 정권 때 고비마다 언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언론들은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축소 보도하는 쪽으로 그를 보호해주었다.

 나의 부속실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이원종 정무수석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일주일간의 주요 정치 첩보를 요약 정리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이○○ 보좌관이 이 보고서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는 보안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감찰실이 당장 조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감찰실은 알면서도 묵인해 주었다.


매주 이원종 수석에게는 정치권 동향 보고서 이외에 언론계 동향 보고서도 전해졌다. 이는 방송과 기획반에서 작성했다. 우리가 작성한 ‘야매’ 보고서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령 장관급 인사의 비리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내 눈으로 볼 때가 종종 있었다. 이원종 수석은 우리가 올린 정치권 동향 보고서와 언론계 동향 보고서를 가지고 정치권과 언론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는 이 일을 수행하면서‘7급 공무원에 불과한 내가 장관의 목을 자르는 일을 해도 괜찮은 건가?’하는 의구심과 함께 이런 일은 너무 오래할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정소 실장에게는 언론계 외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거론된 적이 있는 전병민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가끔 오실장에게 오는 전화를 연결해 주곤 했는데 전씨 외에도 김현철씨의 전화도 여러 번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내가 전화를 받으면 대뜸 “여의도 김소장입니다”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여의도에 무슨 장군이 있어 여기로 전화를 하나?’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의도 사무소의 ‘김현철 소장’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안기부에 있다 보니 김현철의 인맥을 알게 될 기회가 많았다. 고려대 출신이면서 경복고 출신인 사람들이 성골이었다. 경복고 출신들은 은어로 ‘K2’라고 불렸다. 아마 일제 때 경복고를 경성제이고보(K2)라고 부렀던 데서 연유했을 것이다. 김영삼 정권을 PK 정권으로 보는 것은 조금 잘못 본 것이다. 물론 숫자상으로는 경남·부산 출신이 많이 중용되었지만, 핵심 실권은 모두 경복고·고려대 출신들이 좌지우지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문민정부는 김현철의 국정 농단을 막지 못해 무너진 꼴이었다. 내가 대공정책실 부속실에 근무할 당시에 이미 김현철은 깊숙이 국정에 개입했다. 일개 사인에 불과한 30대 젊은이가 정부의 핵심 요직 인사를 주물렀다. 개각 시 기판국에서 5배수의 추천 명단을 올렸다. 이와 별도로 대공정책실에서도 따로 5배수를 올렸다. 우리는 이런 보고서가 당연히 김현철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김현철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보인 사람은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도 그래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덕룡 의원도 “현철을  유학 보내라”고 건의했다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 청와대에서 현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유일한 젊은 비서관이 민○○ 비서관이었는데, 그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안기부로 자리를 옮겼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김현철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할 즈음에 가서야 여론에 밀려 경복고·고려대 세력의 중심이던 오정소·이원종 씨를 잘랐다. 지난 96년 12월, 오차장은 연합통신에 기사가 나기 10분 전에 전격적으로 경질을 통보받았다.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YS의 친구였던 김 아무개 변호사가 청와대에 들어가 “오정소를 잘라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오차장의 경질은 YS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전주곡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97년 2월, 이원종 수석도 옷을 벗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정소 실장의 보좌원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 권력의 최고 핵심들의 턱밑에서 근무하다 보니, 그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국가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들인지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전국 각지에서 사고가 터져 나올 때 안기부가 어떻게 개입해 대처해 나갔는지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연예계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도 질리도록 들었다.

문민정부는 집권  초기에 국민들로부터 대단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다 집권 2년째부터 전국 각지에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구포에서 열차 사고가 나더니, 격포에서 여객선 사고가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나는 곳은 ‘포’자로 끝나는 도시들이었다. 사회가 어수선해지면서 대통령의 지지율도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일련의 사고 가운데 가장 충격을 준 것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은 금요일 아침이었다. 안기부는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묘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바로 탈북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사실 안기부는 애초부터 조창호 소위가 탈북하여 귀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조창호 소위는 서울과 미국에 사는 친지들이 탈북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특히 조창호 소위의 조카가 조선일보 사회부 최 아무개 기자였는데, 그가 조소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초 안기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수대교가 붕괴하자 안기부의 태도가 돌변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창호 소위를 살려서 데려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당초 조창호 소위 일행은 조그만 통통배를 이용해 서해를 건너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파도가 너무 높아 실패하고 되돌아갔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풍랑으로 인해 통통배가 실종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안기부에서는 수산청의 어업 지도선을 총 동원하여 서해를 이 잡듯 뒤졌다. 수색 작업은 안기부의 최 아무개 담당관이 주도했다. 총력을 기울여 수색한 끝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사흘 만인 일요일 오후에 조창호 소위를 구출해낸 뒤 즉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환영식도 거창하게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국군 포로 출신 탈북자 1호가 탄생한 것이다. 알고 보면 대형 사건 사고로 돌아서는 민심을 붙잡기 위한 부끄러운 공작이었다.  

외국 정보기관 간부들 위해 ‘채홍사’ 노릇

이렇게 문민정부는 시국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사건이 터지면 안기부를 이용해 더 큰 사건을 만들어 뉴스로 뉴스를 덮으려 시도하곤 했다. 지난 1997년 황장엽씨의 망명 사건도 전형적인 사례였다. 김현철 사건으로 정권이 위태로워지자 더 큰 뉴스 거리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황씨의 망명을 추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애꿎은 황씨 가족만 희생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민심을 호도하려는 시도 가운데서 가장 노골적인 것이 연예계 사정이었다. 1995년 초 연예계 사정이 있었다. 표면적인 명분은 연예계에 만연한 부패를 일소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국민들의 정부 비판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당시에 연예계는 한탕주의가 판치는 복마전이었다.
연예계 사정 수사는 검찰이 맡았지만 그 배경에는 청와대의 민○○ 비서관이 총대를 메고 안기부의 방송과가 지원을 했다. 연예계 내부를 들춰보니 악취가 상상을 초월했다. 돈과 섹스와 마약이 뒤엉켜 있었다. 당시에 “○○아, 차 바꿀 때 되지 않았니?”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일부 인기 연예인의 하룻밤 화대가 차 한 대 값이라는 뜻이었다.

연예계의 3대 뚜쟁이가 누구라느니 하는 소문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소문으로만 돌던 일부 PD와 연예인들 간의 뇌물과 몸 로비도 사실로 드러났다. 어느 음악방송 DJ는 하루하루 연속 방송 출연 기록을 경신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잠적하고 말았다. 음악방송에 신곡을 소개해 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혐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달간 진행된 수사도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해외공작실로 옮겨 정영철 실장에게 신고하러 갔더니 그는 대뜸 “니가 김기삼이냐?”라며 첫인사를 했다. 오정소 실장이 직접 부탁해 전입한 직원이라 신경이 쓰여서 그랬던 것 같다. 당시 국정원은 고려대 출신 3인방인 오정소·정영철·남영식 실장이 각각 국내와 해외, 그리고 대북 수집 부서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는 ○○과 3계에 배속되었다. 이곳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외국 정보기관 간부들을 방한 초청하는 행사였다.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 협력 채널을 새로 구축하거나, 기존의 정보 협력 채널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를 방한 초청하는 사업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보통 방한 목적은 원장과 차장을 접견하는 데 있지만, 향응과 접대도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우리가 이들의 가이드 노릇을 했다.

외국 정보기관 사람들에게는 관광도 시켜주었지만 가장 중요한 행사는 저녁 접대였다. 최고의 음식점에서 술과 음식을 거나하게 접대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2차까지 대줄 때도 있었다. 우리는 2차를 제공하는 것을 특별 조종이라는 말의 약칭으로‘특조’라고 불렀다. 이문동 시절에는 용산에 있던 ‘ㅇ’이라는 요정을 많이 이용했다. 내곡동으로 옮겨 온 이후에는 강남역 근처의 ‘ㄷ’이라는 한식 요정과 여러 룸살롱들을 이용했다. 선배들은 특조 시에 아가씨들을 불러다 놓고 주의 사항을 전달하곤 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마치 내가 조방이 된 듯한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다. 선진국 정보기관 간부들은 발목이 잡힐까 우려해서인지, 특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중동이나 동남아 지역의 후진국 정보기관 사람들일수록 특조에 홀딱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슬람권 정보기관 사람들은 낮과 밤의 생활이 달랐다. 그들은 낮에는 술과 여자를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노골적으로 여자를 요구하곤 했다.

이종찬 원장 ‘DJ 노벨상 공작팀’ 극비 운영

실무에 배치된 지 3년 만에 해외 연수 기회가 생겨 다시 정보학교로 돌아와 영어 과정에 입소했다. 당시 김기섭 기조실장은 “정치공작을 하던 돈을 직원들 재교육하는 데 써야 한다”면서, 직원들을 외국으로 연수 보내는 데 많은 투자를 했다. 일년간은 정보학교에 가르치고, 일년간은 해외에서 연수시켰다. 
일년간의 어학 과정을 마친 후 나는 미국에 있는 칼라일 대학에서 연수를 들어갔다. 연수 기간 중에 정권이 바뀌었다. 나는 미국에서 김대중 정권이 과거 야당 시절 핍박받았던 경험을 잘 살려 진정한 국민 통합을 이루어내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1998년 6월, 나는 뉴욕 현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행사에 보안 지원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근접 경호는 경호실에서 담당하고, 우리는 원거리에서 경호 정보 지원 활동을 했다.    

나는 1998년 6월 외환위기 여파로 일년간의 연수 기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귀국해야 했다. 귀국 후 국제정책실 ○○과를 거쳤다가 1999년 2월 대외협력보좌관실로 발령이 났다. 처음 발령받을 때만 하더라도 그곳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다만‘원장 직속의 부서이니,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겠지’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국정원 내에서도 대외협력보좌관실이 ‘옥상옥’이라는 둥 말들이 많았다.

이종찬 국정원장은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기를 소원한다는 점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직속으로 대외협력보좌관실이란 기구를 신설하고, 국정원 내에 비밀리에 노벨상 공작팀을 구성했다. 물론 기존의 해외공작국 동유럽과 북유럽팀에서 일상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노벨상 업무는 별도로 계속되었다.
대외협력보좌관실은 1998년 8월 이○○ 뉴욕 부총영사가 귀국하여 보좌관으로 임명되면서 체계가 잡혔다. 전주고와 육사(24기) 출신인 이보좌관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북유럽어를 연수하고 돌아온 케이스로 오랫동안 북유럽 담당관과 파견관을 거쳐 동구과장까지 지냈기에 노벨상 업무라면 누구보다도 적임자라 할 만했다.

 
당시 민주당 설훈 의원의 이종 조카로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로 있을 때 공보비서로 일했던 김한정씨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이종찬 원장에게 특채되어 우리 팀에 합류했다.
 이종찬 원장은 우리 팀에 조○○라는 직원도 특채했는데 그는 DJ와 교분이 깊은 조승형 전 대법관의 조카였다.
 
김한정과 함께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 박사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런던정경대학에서 학사·석사를 거쳐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사람이었다. 런던정경대학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못지않은 명성을 지닌 대학이다. 나종일 차장이 그를 특채했다. 김 박사의 선친과 나차장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데다, 둘이 영국에 있을 때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김박사는 인격이 훌륭한 분이었다. 나는 북한국 출신의 후배 여직원 한 명과 함께 김박사의 대외홍보팀에 합류했다.

당초 대외협력보좌관실의 설립 목적은 주변 강대국의 실력자들에 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대상이 한반도 주변의 4대 강국이었지만, 우리의 주 관심은 미국이었다. 우리는 클린턴가(家)나 고어가 혹은 부시가와 연이 닿을 수 있는 한인 교포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작업부터 했다. 기업체와 정부 투자기관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접근 방법도 연구되었다. 대외협력보좌관은 당시 외무부 대사 출신으로 코트라에서 간부로 있었던 남 아무개씨와 이 일을 활발하게 논의했다. 가령, 삼성이 텍사스에 투자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하면 부시 가문과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풍산이나 한화같이 이미 미국에 끈을 가지고 있는 방위산업체를 활용하는 방안도 연구되었다. 풍산이 부시 전 대통령을 방한 초청했을 때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큰 관심을 가졌다. 톰 리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가 방한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작업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되어야 할 사업이었지만 차츰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가 나는 업무에 치중하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비밀 공작이었다. 이○○ 보좌관은 노벨상 업무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였다. 노벨상 공작을 위해 특채된 김한정과 김○○ 박사는 이 분야에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이○○ 보좌관은 이 일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인지 노벨상 공작에 그다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맡고 있던 해외 언론 조정 업무도 실상은 노벨상을 겨냥한 분위기 정지 작업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외 언론들로부터 DJ에 대한 우호적인 논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 우리는 철저히 일을 분담했다. 우리는 김한정이 하는 일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그는 비밀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대충 눈치로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 사무실에서는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알면 다쳐!”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김박사가 이런 농담을 잘했다. 섬뜩한 말이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아무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김박사의 해외 언론 조정 업무를 보조했다. 회사 안에서 협조해야 할 일은 주로 내가 했다. 김박사는 바깥으로 나가 서울 주재 외신 기자들을 직접 상대했다. 우리가 외신 업무를 담당하던 짧은 기간 서울에 주재하던 외신들은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아마 외신이 이렇게 대접을 잘 받은 일은 전무후무했을 것이다. 나차장은 외신 기자들을 따로 저녁에 초청하여 비보도를 전제로 민감한 북한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다.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서울대 출신은 김한정과 나밖에 없었기에 비교적 쉽게 가까워졌다. 그는 성실하고 빈틈없이 일했다. 그러나 다른 부서의 직원들은 김한정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자주 마찰이 빚어졌다. 소위 국장급 사무관이었던 그의 실체를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비밀스럽게 일하다 보니 더욱 오해를 사기 마련이었다. 한번은 공항에서 근무하던 훈육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대뜸 “김한정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김한정이 자주 외국 손님을 모셔 오는데, 굳이 특급 귀빈 대우를 해달라고 졸라서 성가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훈육관에게 “알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1999년 5월 말, 이종찬 원장이 갑자기 경질되면서 우리 업무도 전면 중단되었다. 새로 부임한 천용택 원장은 이종찬 원장이 추진하던 일들을 모두 중단시켰다. 같은 육사 동기이지만 서로간에 경쟁의식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천원장은 제일 먼저 김한정을 잘랐다. 천원장이 “국정원에서 노벨상 일을 하는 건 위험하니 밖에 나가서 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국정원에서 밀려난 김한정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로 돌아가서 노벨상 업무를 계속했다. 그는 퇴사하자마자 DJ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겼다. DJ의 오랜 후원자였던 필라델피아 출신 민주당 의원 포글리에타라는 사람이 적극 도와준 결과였다. 당시 클린턴 정부에서 주 이탈리아 미국 대사로 나가 있던 그는 2000년 12월 오슬로에서 열린 DJ의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된 두 사람의 외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외무장관이었다.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은 대략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1998년 5월에서 1999년 5월까지로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이때는 준비 기간으로 볼 수 있는데, 주로 혼자서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두 번째 시기는 1999년 6월에서 12월까지 아태민주지도자회의로 돌아간 때이다. 이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성공시켜 본격적으로 발판을 마련하였다. 마지막 시기는 1999년 12월에서 2000년 10월까지로, 이때 그는 청와대 제1 부속실장으로 있으면서, 국정원과 외교부를 직접 지휘하여 일을 마무리했다.
 

천원장이 우리 업무를 전면 중단시킨 후 나는 대북전략국 배치를 자원했다. ○○과는 대북전략실의 핵심 과였다. 남북간의 협상 전략을 기획하고 남북간 회담의 뒤치다꺼리는 거의 이 과에서 했다. 전략국은 선호 부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재가 몰리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계장 몇 명만이 쓸 만한 사람들로 채워져 차장이나 실장은 이들만 끼고 일했다. 그래서 5공자니 7공자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북한의 대남 전략 담당 부서에 최고의 인재가 모여 있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국정원의 현실은 한심한 수준인 것이다.
나는 ○○과에서 근무하는 짧은 기간 부서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던 비밀 문서들을 샅샅이 읽었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관심 없는 문서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정보들이었다. 나는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부터 보았다. 1급 비문이었다. 황장엽씨와 김덕홍씨의 디브리핑 책자도 읽었다. 
나는 전략국에 전입하자마자 2000년 8월 15일 제1차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준비하는 상황실에 배속되었다. 일복이 있어서인지 전입하자마자 남북한 관련 행사를 두루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김만복 과장이 상황실장이었다. 

하루는 김만복 과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해외공작국 동기인 ○○의 전화였다. 그는 내 목소리를 알아보고는 “형이 전화를 받으니 잘 되었네”라면서 “본데비크 노르웨이 전 총리 일행의 극비 방한이 있는데, 협조를 좀 잘해 달라”라고 했다. 그는 관련 보고서도 보내 왔다. 나는 김만복 과장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후에 들으니, 박○○ 팀장이 극비리에 본데비크 일행을 행사장으로 안내했다라고 한다. 본데비크 총리의 방한 초청은 김대중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 후 행사가 시작되자 워커힐호텔로 상황실을 옮겨 통일부 직원들과 합동으로 행사 지휘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통일부가 행사를 주관했지만 실상은 국정원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만찬장의 좌석을 결정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상황실에 있으니 행사 진행 요원들로부터 북측 인사들의 동태에 관한 보고가 들어왔다. 우리는 그것을 상황 보고로 정리하여 원장에게 보고했다. 북쪽 가족들은 단체로 맞춤옷을 입고 왔는데, 사전 교육을 철저히 받았는지 모두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만 서면 오버액션을 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원수님의 은혜로…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카메라가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이들은 “남조선 처녀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다닌다”라든가, “남조선 젊은이들은 줏대 없이 노랑머리로 물들였다”라는 등 비난하는 말을 했다. 모두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하루 행사가 끝나면 밤늦게 다시 모여 총화라는 것을 했다. 그러나 그들도 남쪽이 훨씬 잘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남쪽 가족들이 몰래 주머니에 달러를 집어넣어 주는 걸 가장 원했다.

전략국에 들어가 남북간의 일들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어느 정도 보고난 후, 나는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국정원 내 지역감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DJ가 정권을 잡으면서, 국가 정보기관은 완전히 사설 흥신소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김영삼 시절에도 어느 정도 지역 차별 인사가 있었지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국정원 내 호남 출신의 인사 독주에 분노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2000년 7월 행정과에서는 “대외협력보좌관실이 해체되고 나면, 원하는 과로 보내주겠다”라고 했다. 북미과에서 오라고 전화가 왔지만 거절했다. 나는 이 참에 차라리 다른 부서로 전출하기를 원했다. 남들은 해외공작실을 선망의 부서로 알고 서로 오고 싶어 안달하는데 스스로 나가겠다고 하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행정과 간부들은 이 참에 타실로 전출을 희망하는 직원을 조사해보라고 지시했다. 예상외로 10여 명의 젊은 직원이 손을 들었다.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려 하니 행정과가 당황했다. 그들은 부랴부랴 달래서 몇 명을 주저앉혔다. 그 중 6명은 끝까지 나가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행정계장이 전출을 희망하는 직원을 개별적으로 행정과로 불러 서약을 받았다. 내가 행정과에 불려 가보니, 그는 나에게도 서약서를 내밀었다. 서약서에는“해외공작국으로 다시 전입오지 않겠다는 것과, 타실에 가서는 파견관 신청 등 해외공작국의 인사에 부담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라고 서약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선배들은 모두 이미 서명을 한 상태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이런 서약서에는 서명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내가 거절하자 행정계장은 화를 벌컥 냈다. 그는 여러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야, 이 ××야, 니가 그렇게 잘 났냐?”라며 화풀이를 해댔다. 나는 침착하게 “내가 잘난 건 없지만, 부당한 요구에는 응할 수 없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나는“해외공작국으로 다시 오고 안 오는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누구에게 서약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면서, “파견관 신청 문제도 마찬가지다”라고 선을 그었다. 내가 버티자 그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듣고 있던 행정과 직원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때 안에서 행정과장이 나왔다. 나도 그 길로 걸어 나왔다.

결국 2000년 10월28일, 나는 7년 10개월간 몸담았던 국정원을 떠났다. 내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니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국정원에서 이유 없이 사표를 쓴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주위에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퇴사한다”라고 둘러댔다. 떠나는 나의 등 뒤에는 “서울대 출신은 할 수 없어”라는 비아냥도 들렸다. 늦가을에 물든 청사를 뒤로하고 나오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퇴사 후 집에서 얼마간 쉬다가 문득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공개 자료를 뒤지며 지난날 국정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들추어보았다. 우선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북풍사건에 대해 좀 알아보기로 했다. 북풍사건이란 1997년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안기부가 기획했다는 몇 가지의 공작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우선 공개 자료부터 살펴보았다. 나는 1998년 6월 신동아가 보도한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검찰 신문조서를 전제한 ‘윤홍준 기자회견 조작 아니다’ 제하의 기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기사를 읽고 윤홍준의 담당관이었던 이○○ 전 직원을 수소문했다. 그가 윤홍준의 기자회견을 기획한 공작관이었기 때문에 뭔가를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직원은 이 일로 인해 재판정에 서게 되었고, 종국에는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는 법정의 최후 진술에서 “다시 이같은 임무가 주어지더라도 그대로 수행하겠다”고 소신 발언을 해 정보 요원들을 감동시켰다.  
 

나는 이○○ 직원을 만나 윤홍준 기자회견의 개요와 그의 공작원이었던 윤홍준에 대해 들었다. 이씨는 나에게 “윤홍준 기자회견은 대선 바로 직전에 권영해 부장의 지시로 급조된 것이지만, 기자회견 내용만은 진실한 것이다. 윤홍준은 믿을 만한 공작원이었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윤홍준은 실지로 김정남과 가까운 사이며, 김정일도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라고 귀뜸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언젠가 미국에 가면, 윤홍준이라는 사람을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정확히 미국에서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후, 동아일보 사회면에 김형윤 경제단장에 관한 기사가 터졌다. 기사에 따르면, “검찰이 이용호 게이트 수사에서 사채업자인 이경자로부터 김형윤 단장이 5천만원을 받은 사실을 수사하고서도 외압으로 사건을 덮었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국정원 내에 있을 때부터 김형윤 사건의 윤곽에 대해 대강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국정원에도 9·11이 터졌구나’라고 생각했다.
 

김형윤 사건 보도 후 ‘나도 더 이상 숨어서 활동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망설이던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노벨상 공작 등을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에게 넘겼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2001년 10월 중순 내부 직원으로부터 “조갑제 편집장이 김한정에게‘노벨상 공작에 대해 취재가 끝나 확인차 전화를 했다’며 직접 전화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또 “김한정과 조○○, 그리고 박○○ 팀장이 노벨상 관련 자료를 파기하고, 정보 누설자를 색출하느라 아주 난리가 났다”라고 전해 주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러지 않아도 한나라당 유흥수 의원이 국회에서 본데비크 노르웨이 전 총리의 극비 방한 사실에 대해 질문했기 때문에, 김한정측이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차였다. 사실 본데비크 전 총리의 방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는데, 국회에서 그런 일이 터진 것이다. 본테비크 건은 사실 내 입에서 나간 것이 돌고 돌아 한나라당에까지 들어간 셈이었다. 이제 의심의 눈길이 나에게 쏠릴 게 뻔했다. 나는 우선 김한정의 추적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급히 ‘뉴욕주 변호사 시험을 보러 간다’고 소문을 내고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2001년 11월 초, 혼자 서울을 빠져나와 미국으로 건너 왔다. 뒤이어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 피신한 후 커뮤니티 칼리지에 등록하고, 뉴욕주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김대업 사건이 터지는 것을 보고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한나라당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광복절인 2002년 8월15일  인편으로 한나라당의 이병기 특보에게 DJ의 노벨상 공작에 대해 알려주었다.
나는 그 즈음 간간이 워싱턴에 살고 있다는 윤홍준을 수소문하기 시작해 2002년 9월 경 우연히 인터넷에서 윤홍준의 주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워싱턴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직접 찾아갔다.

우리는 당시 한창 이슈가 되고 있던 대북송금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15억 달러랍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좀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그는 “지난 2000년 초 날씨가 제법 쌀쌀한 날 도쿄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을 만났는데, 그때 김정남과 그의 수행원으로부터 남북의 거래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여권을 확인해 보니, 2000년 2월과 4월 초에 일본에 갔던 기록이 남아 있었다.
윤홍준의 주장에 따르면, “남북은 1999년 12월 말, 국정원의 파우치를 이용하여 유로화로 미화 15억달러를 송금하기로 합의했다”라는 것이었다. 당시 윤홍준은 “김정남에게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고 그저 흘러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는데, 지금 와서 그것이 남북정상회담의 뒷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 윤홍준은 당시 김정남이 이야기하던 자세와 감정 상태까지 기억해내어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처음에‘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판단하고 믿게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나는 이병기 특보가 내가 준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도청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중전화로 이특보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직접 국내에 들어갈지 물었더니 들어와 만나자고 했다. 대선을 3주 정도 남긴 2002년 11월 28일, 나는 급히 비행기표를 끊어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한나라당 당사를 찾았다. 마침 그 날이 한나라당이 1차 도청 자료를 폭로하는 날이었다. 궁금하여 어깨너머로 보니 국정원 도청 메모 보고서였다. 워드로 다시 찍은 것이지만, 형식과 내용을 보니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건이었다.
 나는 이특보에게 “내가 건낸 자료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 날 오후, 한나라당사 내 회의실에서 이병기 특보와 정형근 의원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브리핑을 했다. 정형근 의원은 전날 도청자료 폭로를 준비하느라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브리핑을 마치자 정형근 의원은 “니는 우째 지난 일들을 날짜도 안 잊어 먹고 다 기억하고 있노? 내보다 더 마이(많이) 아네”라며 감탄사를 남발했다. 당시엔 김한정이란 인물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내가 김한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그는 좀 놀라는 듯했다. 브리핑을 마친 나는, 한나라당이 나의 기자회견을 주선해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나는 “신변안전만 보장되면 노벨상 관련 자료들을 공개하겠다”라고 제안했다. 그들은 며칠 말미를 달라고 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철저히 숨어서 움직였다.
 대통령 선거가 열흘 전으로 다가왔는데도 한나라당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다시 이병기 특보를 찾아갔다. 내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그는 “기자회견을 열든지 무얼 하든지 한나라당은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하라”라고 잘라 말했다. 아마도 한나라당은 노벨상 공작을 폭로하더라도 그 시점에서 별반 효과가 없으리라고 판단한 듯 했다. 자신들이 거기에 연관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미국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비행기를 탈 때 혹시 국정원 수사관들과 조우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무사히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 국내로 전화를 해 보았다. 내가 알던 국정원 친구들이 부서 행정과에 불려가 “김기삼을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 어떤 자료를 제공했는지 등에 관해 취조를 당하고, 구두 경고를 받았다”라고 했다. 내가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국내에 들어 왔다는 사실과 한나라당 당사에 출입했던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되었다는 것이다.  김한정씨가 국정원 감찰실에 직접 지시해 “김기삼을 체포하라”라고 지시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감찰실에서 체포조를 풀었을 때는 내가 이미 한국을 빠져나간 후였다는 것이다.

나의 예상대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패했다. 해가 바뀌고 2003년이 시작되자마자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의 입에서 “현 정권에서 대북송금 문제를 털고 가야 한다”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북 비밀 송금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점점 커지고 있던 와중에 오마이뉴스가 2003년 1월 29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북한에 2억 달러를 보냈다”라고 처음으로 시인하는 기사를 냈다. 당시 오마이뉴스는 자신들이 ‘대특종을 했다’며 흥분했다.
 나는 이 뉴스를 보면서 직감으로, ‘2억 달러만 시인하고 나머지는 대충 뭉개고 넘어가려고 하는구나’라고 판단했다. 마침 설날 연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가 세상에 알리기에 가장 적당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2003년 1월30일 국내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DJ 노벨상 공작과 비밀 대북 뒷거래에 대해 밝혔다.

쓴 글이 인터넷에 올라가자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여러 인터넷 신문에서 나의 글을 전제하고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다. 나중에 들으니 날벼락을 맞은 국정원 지휘부와 청와대는 설연휴를 악몽같이 보냈다고 한다. 국정원 안에 있는 지인이 나의 신변을 염려하며 회사 내 분위기를 은밀히 전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몇몇 국정원 고위간부들이 “김기삼이를 죽여야 한다”라며 매우 흥분했다고 한다.
내 글이 공개되고 나서 2주일 후인 2003년 1월14일, DJ는 박지원 실장과 임동원 특보를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이번에는 “김정일에게 5억 달러를 송금했다”라고 부분적으로 시인했다. 그러나 통치행위론을 들어 국민의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한나라당이 대북송금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법을 발의했다. 많은 논란 끝에 신임 노무현 대통령은 특검법을 승인했다. 특검의 결과는 내가 아는 정보에 비하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특검 수사의 부산물로 권노갑씨와 박지원씨의 비리가 불거져 그들이 구속되었다. 특검 조사 후 검찰의 후속 수사 와중에 정몽헌 회장이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회장은 대북 불법 송금의 공범이었지만, 그렇게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그 분의 명복을 빈다.

이런 와중에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에서 폭로한 도청 문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재연되었다. 민주당의 이낙연 대변인과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이 나서서 “도청 문건은 조작된 가짜 문서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거짓말을 들으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거짓말에 익숙해져 있는 것인지, 또 왜 우리 사회는 이런 거짓말에 관대한 것인지 하는 회의를 떨칠 수 없었다. 단 한번 만이라도 거짓이 엄정히 심판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조직을 보호하는 것도 좋지만, 진실이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2003년 3월24일, ‘거짓의 희극, 도청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안기부와 국정원의 도청 실태를 고발했다. 이미 ‘조직에 대한 배신자’라는 비난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미림팀의 불법 도청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나는 2005년 6월경 미림팀의 존재와 활동 내용에 대해 국내 언론에 최초 제보했다. 미림의 불법 도청을 언론에 알리기 전, 나는‘과연 무엇이 국익에 부합하는 일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고, 모든 것은 진실대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여름 조선일보와 <시사저널>에 미림팀의 존재를 제보한 뒤 나는 문화방송 <손석희의 시선집중>이라는 프로그램과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인터뷰에서 미림팀의 도청뿐만 아니라, 지난 정권의 휴대폰 도청 문제도 다시 제기했다. 이러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가 미림팀 도청 파일을 폭로하면서 도청 문제가 공론화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국정원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이어지면서,  국정원은 창사 이래 최악의 시기를 겪은 뒤 도청 사건의 전모가 샅샅이 드러났다. 수백명의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이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나와 가까웠던 분들도 불려갔다고 들었다. 이 과정에서 얼마 전 이수일 차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지만, 이 지면을 빌려 그 분의 명복을 빈다. 나는 이 모든 소동이 언젠가 한 번은 치러야 할 홍역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국정원이 이번에도 일시적인 면피에만 급급한다면, 영원히 희망이 없는 조직이 되고 말 것이다. 과거의 허물을 통절하게 회개하고 환골탈태한 국정원으로 거듭나기를 빈다.  

나는 그동안 미국에서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글을 써 왔다. 다른 한 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손에 정의의 칼을 쥐어 준다’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나는 노대통령이 김영삼·김대중 정권에서 저질러진 거악 사건들을 척결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나의 그러한 기대는 전혀 실현될 기미가 없다. 노대통령은 노벨상과 대북송금이라는 칼을 몇 차례 휘둘러 보다가 그만 중도에 놓고 말았다. 아마 너무 무거웠나 보다. 그래서 나는 YS·DJ 양대 정권의 무기도입 비리라는 좀더 가볍고 잘 드는 칼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노대통령은 이번에는 아예 칼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불법 도청이라는 칼을 쥐어 주었다. 아직 어떻게 처리될는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노대통령이 청사에 길이 남을 길을 택할지, 아니면 그저 그런 대통령 으로 스러지는 길을 갈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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