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에서 시작해 昏迷속에서 끝낸다”
  • 李成男 기자 ()
  • 승인 1989.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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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山脈≫ 全4部作 탈고한 작가 趙廷來
 “ 1983년 9월의 어둠에서 시작된 소설을 1989년 10월의 혼미 속에서 끝낸다.” 꼬박 여섯해 동안 집필하여 지난 10월12일 새벽 2시에 마침내 탈고한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後記에서 작가 趙廷來씨가 밝힐 말이다.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 직후부터 전개되어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로 대단원을 마감하는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전편에 걸쳐 빨치산 운동을 전개해온 대장 염상진은 부하 몇 명과 함께 자폭한다. 대한민국 군경은 그의 머리를 떼어다 길거리에 효시함으로써 신화적 영웅으로 인식될 그의 존재를 말살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그의 아내 죽산댁과 극우 깡패로서 형과 극한적 투쟁을 획책해온 동생 염상구가 이를 저지하여 염상진의 머리만 넣은 무덤을 만든다. 그 무덤 앞에 충직한 부하 하대치가 부하 6명과 함께 나타나 참배하고 결의를 다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빨치산에게는 대체로 무덤이 없는 게 특징인데 작가는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고 빨치산 대장의 무덤을 남겨놓았다. 한국사에서 명백하게 패배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빨치산 활동을 그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잘려진 태백산맥의 허리를 잇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몇몇 언론이 이 작품을 빨치산문학의 범주에 넣어 두루뭉술하게 취급하는 사실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소재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무책임을 드러낸 소치라는 것이다.
 全4部作으로 구성된≪태백산맥≫은 탁원한 형상언어로 묘사된 빼어난 문학작품이거니와, 그보다도 실종된 한국현대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더 높게 평가되어 대학생 및 지식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아왔다. 문학 평론가 洪延善씨의 말마따나 소설이 역사를 대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해방 이후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태백산맥≫을 읽으며, 이 소설을 통해 역사에서 읽을 수 없는 진실을 읽으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가 아직까지 이야기해주지 못하는 것을 한걸음 앞질러간” 이책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1백만부 가까이 팔렸으며 독자의 90%가 대학생이다.
 전남 별교 언저리와 지리산 일대를 무대로, 그 시대 좌우익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차분한 언어로 한가닥씩 풀어나간 이 작업은 어쩌면 그 앞에 닥쳐올지도 모를 정신적, 육체적 수난을 전제해야만 감행할 수 있었던 험난한 항해였다.
 서슬푸른 5공 군부독재 아래서 박종철군의 의로운 죽음이 은폐, 조작되었고 여대생에게 성고문이 가해지던 시절이었다. 6⋅10항쟁에 잇따른 6⋅29선언이 87년의 일이었음을 기억한다면 그가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되새기며 부인 金初蕙씨에게 “나없어도 하나뿐인 아들 데리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당부한 절박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그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10월의 여순반란사건은 남로당 조직으로 하여금 완전히 비합법 투쟁으로 돌입케 했으며, 지리산으로 입산한 폭동군은 야산대와 합류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장투쟁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남한지역에는 몇 개의 유격지구가 형성되었다. 즉, 호남유격전구⋅지리산유격전구⋅태백산유격전구⋅영남유격전구⋅제주도유격전구 등이 그것이다. 민족분단이라는 엄청난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기에는 참으로 허술하게 설명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뭉툭 잘려나간 한국현대사를 복원시키기 위해서, 들꽃보다도 못한 존재로 기억되는 숱한 빨치산에게 인간의 숨을 불어넣기 위해서 그는 아직 생존해 있는 빨치산들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철통같은 반공논리에 갇혀 ‘민족의 죄인’이자 ‘역사의 반역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분단 40여년을 지배해 온 반공법 아래서 큰 숨 한번 제대로 쉬어보지 못한 그들 아닌가. 결정적인 자료를 찾으려고 벌교에 스물댓번쯤 내려갔으며 한 사람의 족적을 더듬기 위해 지리산 노고단을 헤집고 다녀야 했다.
 끈질긴 추적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뇌리 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던 의문부호들은 의미심장한 뜻으로 해독되었다. 여순사건 직후, 국민학교 1학년짜리 눈앞에서 아버지는 왜 군경에게 무자비하게 끌려가야 했는지⋅⋅⋅. 마침내 국민학교 4학년 때 견학했던 ‘최후의 빨치산’의 처참한 몰골은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머리’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환원되기 시작했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각계각층의 인물 2백여명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들은 저마다 분명한 삶의 자각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갔고 또 그 대부분은 죽음을 택했던 필연의 생명체로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키를 훨씬 웃도는 높이의 1만6천5백장 분량의 원고에서, 그리하여 작중인물이 하는 말과 생각은 작가 자신의 피와 살을 받은 것이었다. 시인인 부인 金○蕙씨는 한 빨치산이 얼어죽는 대목을 읽을 때는 마치 남편이 죽는 것같아 눈물이 흐르더라고 실토한다.
 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분단모순에서 비롯된 피의 좌절로 인식하고 있는 작가는 이 작품의 시대배경을 광주항쟁까지 잡을 것이냐, 말것이냐를 두고 고심을 많이 했다.
 결국 분단 이후 크게 달라졌을 ‘저쪽’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고, 따라서 ‘이쪽’과 ‘저쪽’의 상황설정에 뒤따를 터인 불균형을 염려하여 휴전과 함께 소설도 끝내기로 했다.
 첩첩하고 가파른 등성이를 가쁜 숨 몰아쉬며 한걸음씩 올라야 했던 험난한 역사기행, 그 기간 동안 그는 안양 나자로 마을에서 칩거하다시피하며 지냈다. 세속과의 연을 끊은 그 적막공산에서조차 갈피가 안 풀리면 줄담배를 피워대거나 애꿎은 낯만 연거푸 찬물로 씻어내곤 했다. 흔한 말로 피를 말리는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 고통이 마감되는 날, 아내는 백판번뇌를 떠올리며 붉은 장미 1백8송이를 사다 집안에 가득 꽃아놓았다.
 이제 비로소 큰짐을 벗게 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도 허전할까? 아니면 후련할까? “태백산맥을 쓰기 전이나 지금이나 분단이라는 상황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막막하고 착찹한 시점”이라고 소감을 밝힌다. 그러나 ‘우울에 가까운 이런 상태’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터이다. 곧이어 지식인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눈으로 지켜본 일제식민지사를 집필할 예정인 그로서는 지나간 일보다는 닥쳐올 앞일을 더 걱정이겠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아리랑≫이라고 가제를 붙인 새 작품의 자료조사를 위해 12월 중순께 중국여행을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리랑≫을 끝낸 뒤에는 동학혁명사를, 이어 분단 이후 현대사를 각각 ≪태백산맥≫만한 분량의 대하소설로 집필, 한국현대사 1백년을 완성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러려면 여든살까지는 살아야겠는데, 그게 가능한 일 같단다. 늦자식보면 오래 산다는 속담이 있듯이 쉰살을 앞두고 방대한 작품계획을 세워놓았으니 오래 살아야 하다느 의지가 작용할 것이고, 유전학적으로 볼 때도 그의 부친이 84세에, 모친이 78세에 임종하였으니 평균잡아 그는 여든살까지 살지 않겠느냐는 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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