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김인식 구단’ 세계 야구 ‘홈’을 훔치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6.03.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은 강했다. 야구 강국들이 ‘착실한’ 한국 야구 앞에 속속 무릎을 꿇었다. 축구의 뒷전에 밀렸던 한국 야구가 역사에 길이 남을 ‘부활포’를 쏘아올린 것이다.
 
2002년 5월의 일이다. 거스 히딩크 축구 대표팀 감독이 이렇게 투덜거렸다.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전 신문의 1면이 야구 기사다. 월드컵을 개최하는 나라가 이러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히딩크의 말대로 한국은 야구의 나라였다. 한·일전을 비롯한 국가대표팀 경기에 반짝 관심을 가졌을 뿐 축구장에 가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스포츠신문 머릿기사는 무조건 야구 몫이었다. 국민들은 야구 선수가 축구 선수보다 연봉이 배 이상 더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스포츠신문에 입사한 1, 2등 신입 기자가 야구부에 배치되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야구의 독보적인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찬호와 김병현이 슬럼프에 빠지자 그 속도는 더 빨라졌다. 그러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야구는 스포츠계의 주도권을 축구에 완전히 내주게 된다. 스포츠 1면은 아예 축구 지면이 되었다. 이제 야구는 뒤뜰에서 농구·배구와 경쟁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리기 직전까지도 야구의 입지는 쪼그라들기만 했다. 월드컵 해가 밝자 축구 기사는 스포츠 뉴스는 물론 정규 뉴스까지 점령했다. 야구는 올림픽에서 퇴출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야구계에서도 ‘야구 월드컵’인 WBC가 열리는 데 관심이 없었다. 대회가 열리기 직전까지도 주장 이종범 선수는 “(축구)월드컵처럼 전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미국 위주로 경기가 진행될 것이다. 선수들은 이번 대회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만약 예선에서 타이완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면 곧 개막할 프로야구가 찬물을 뒤집어 쓸 상황이었다. 김인식 감독은 “예선에서 밀려날까봐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막상 WBC의 뚜껑이 열리자, 상황이 돌변했다. 한국은 연신 기적을 연출했다. 나서는 선수마다 감독과 팬들의 기대 이상 기량을 보였다. 멕시코·미국·일본 등을 만나 6연승이라는 기적 같은 기록을 만들어낸 것이다. “30년 동안 일본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라던 일본의 이치로와 “공 50개로 한국을 잡아내겠다”라던 미국 투수 돈트렐 윌리스의 코가 납작해졌다.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미국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한국은 내셔널 리그 최강의 구단 같았다”라고 말했다.

 
한국 야구는 WBC 선전을 동력으로 한국 스포츠에서 예전에 누렸던 지위를 되찾아가고 있다. 한국 야구의 화려한 ‘부활’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야구 규칙을 모르는 것은 물론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여성들까지도 야구팬으로 끌어들였다. 서울 신촌의 신지수씨(여·50)는 4강전이 열린 3월19일 한국팀을 응원하기 위해 잠실운동장을 찾았다. 신씨는 “야구는 잘 모르지만 우리보다 실력이 좋은 미국과 일본을 이기는 쾌감이 축구보다 짜릿했다”라고 말했다. 해마다 야구팀이 줄고, 등록 선수도 줄어가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한국 야구에는 부활의 전주곡이 울려 퍼지고 있다. WBC 개막 이후 실내 야구장에는 손님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고교야구, 한때 ‘국민 스포츠’로 군림

야구는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렛이 ‘황성 YMCA 야구단’을 만들면서 이 땅에 첫선을 보였다. 이후 한국 야구는 학원 야구를 중심으로 퍼져 1970, 1980년대 최고 인기 스포츠로 각광 받았다. 고교 야구는 야구의 꽃이었다. 특석 2천5백원, 일반석 1천원. 당시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입장료였지만 고교 야구 대회는 거의 매진 사례였다. 본선 대회마다 텔레비전 중계가 따라 붙는 것은 기본이었다.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면 우승 도시에서는 카퍼레이드 행사가 벌어졌다.

타격 7관왕의 김재박, 무쇠팔 최동원, 세계선수권 우승 주역의 선동열…. 고교 야구에서 수많은 별들이 탄생했다. 인기만 놓고 보자면 선린상고 박노준이 으뜸이었다. 박노준은 1979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고교 1년생으로서 최우수 선수상을 차지해 벼락같이 스타덤에 올랐다. 1981년 8월26일 선린상고와 경북고의 봉황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박노준은 왼발목 복사뼈가 골절되고 삼각 인대가 파열되었다. 박노준 부상 소식은 텔레비전 9시 정규 뉴스 시간에 편성되어 안방을 강타했다. 박노준이 입원한 한국병원 209호실에는 여학생 팬들의 꽃다발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박노준 SBS 해설위원은 “야구팬들이 너무 많은 사랑을 주셨다”라고 말했다. 야구평론가 이병훈씨는 “당시 박노준의 인기를 요즘으로 굳이 따지자면 가수 비와 영화배우 장동건을 합쳐놓은 정도였다. 여학생들은 연습을 하는 박노준 선배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학교 앞에 진을 쳤다”라고 말했다.

 
고교 야구 가운데서도 한·일 고교야구 정기전은 백미 중의 백미였다. 1980년대 한·일전의 주연 배우는 박노준의 2년 후배인 군산상고의 조계현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1981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전에서 한국은 3연승을 거둔다. 군산상고 1학년 조계현은 1승 2세이브를 따냈다.
1982년 일본 오사카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정기전에서 한국은 2승1패를 거둔다. 이때 조계현은 완투로 2승을 따냈다. 조계현은 어깨를 혹사해 1983년 한·일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한국은 일본의 초고교급 투수 구와타와 타자 기요하라에게 막혀 1대 2로 패한다. 조계현 삼성 코치는 “당시는 야구가 최고의 스포츠이자 위안 거리였다. 고1 때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자 14만 군산 시민이 거리에 나와 축하해 주었다. 한·일전에서 이기면 도지사가 초청해 인사하러 가야 했다”라고 말했다. 

아마추어 고교 야구의 인기를 바탕으로 한국 야구는 1982년 프로로 전환한 것이다.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한국은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홈런으로 일본을 누르면서 야구 열기가 고조된다. 군사 정권이 민심을 돌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프로 야구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프로 야구 원년 1백43만명, 1983년에는 2백25만 관중을 동원하며 한국 야구는 독보적인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프로 야구 선수를 꿈꾸는 많은 어린이들이 리틀 야구단에 가입했다. 한국 야구는 1994년 박찬호를 신호탄으로 메이저 리그로까지 뻗어나갔다. 김병현·서재응·최희섭·김선우 등 우수한 인재들이 뒤를 이어 빅리그에 진출했다. 이는 한국 야구가 세계 수준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재능 있는 선수들이 하나 둘 메이저리그로 빠져나간 것은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의 수준 높은 경기에 매료된 국내 야구팬들이 프로 야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1995년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5백40만명이었지만 1996년 4백50만명, 1998년에는 2백만명대로, 갈수록 줄어든 것이다.

조직력·빈틈 없는 수비로 ‘기적’ 연출

게다가 프리에이전트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로 이적한 박찬호가 부진의 늪에 빠져 ‘메이저 리그 최악의 계약’ ‘최고의 먹튀’라는 오명을 쓰면서 메이저 리그의 인기도 시들해진다. 지난해 야구장을 찾는 관중이 3백만명대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 최고 국민 스포츠 자리를 축구에 내준 것은 변하지 않았다. 프로 야구 선수들의 몫이었던 인기 연예인과의 스캔들도 축구 선수들 차지가 되었다.
이번 WBC 대회에서 한국은 ‘3월의 전설’을 만들어내며 극적인 역전극을 펼치고 있다. 대회 직전까지 한국은 미국은 물론 일본을 넘기에도 벅차 보였다. 1930년대 프로 야구를 출범시킨 일본과 한국 야구는 수준 차가 나 보였다. 1990년대 한·일 슈퍼게임에서 이름난 일본 투수들의 공을 건드리는 타자가 없었다. 1996년 ‘국보’ 선동열과 1998년 ‘천재’ 이종범도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도 마찬가지였다.

 
또 한국 야구는 미국 야구와 엄청난 실력차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1982년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잠깐 물을 먹은 박철순이 22연승 기록을 세웠다. 그는 고작 마이너 리그 더블에이에서 활약했다. 1876년 출범한 미국 프로 야구는 30개의 메이저리그 구단 산하에 트리플, 더블, 싱글A 팀을 두고 있다. 프로 선수들만 1천명이 넘는다. 한국은 미국에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다. 프로 야구팀이 8개, 대학 야구 33개, 고교 야구팀은 57개에 불과하다. 김인식 감독은 미국전을 앞두고 “미국전은 포기할 수도 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이랬던 한국 야구팀이건만,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온 것일까. 한국은 WBC에서 멕시코·미국·일본을 연파했다. 한국 야구의 힘의 원천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선 김인식 감독의 신기에 가까운 용병술에서 찾는다(딸린 기사 참조). 김감독의 전술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가장 구위가 뛰어난 서재응을 1·2라운드 첫 경기였던 타이완과 멕시코전에 투입해 승리를 낚았고, ‘에이스’ 박찬호를 마무리로 돌렸다. 부진한 최희섭을 미국전에 대타로 기용해 홈런을 터뜨리게 한 것도 절묘했다. 이번 경기에서 김감독을 괴롭힌 가장 큰 적은 경기 내내 서서 경기를 지켜보아야 하는 미국의 라커룸이었다. 김인식 감독은 2004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두 번째로 꼽히는 것은 톱니바퀴 조직력이다. 박찬호·서재응·김병현·최희섭 등 메이저 리거들이 자신의 몸을 낮추어 팀플레이에 녹아들었다. 박찬호는 항상 선발이었지만 타이완전·일본전·멕시코전에서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승리를 지켜냈다. 박찬호는 “국가를 위해, 후배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메이저 리그 관계자들마저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 ‘그물망 수비’는 한국의 4강 진출에 주춧돌이었다(딸린 기사 참조). 한국은 참가국 중 유일하게 실책이 한 개도 없다. 이진영은 1라운드 일본전에서 다이빙 캐치로 승리를 일구었다. 16일 경기에서도 환상적인 홈 송구로 일본의 선취 득점을 막았다. 유격수 박진만은 메이저 리그급 수비를 선보이며 상대의 기를 꺾었다.
마지막으로 이승엽의 힘과 대표팀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이종범·구대성 등 이른바 일본파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딸린 기사 참조). 특히 결정적인 장면마다 불을 뿜은 이승엽의 빛나는 홈런포는 한국이 기선을 제압하는 견인차였다. 2004년 메이저 리그 진출에 실패한 이승엽은 차선책으로 일본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한국의 국민 타자는 롯데 마린스에서 왼손 투수가 나올 때는 벤치를 지키는 반쪽짜리 선수로 전락했다.

2년 동안 이승엽은 일본 투수들의 정교한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를 공략하기 위해 백스윙을 줄였다. 엄청난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힘이 붙었다. 그의 스윙은 더욱 간결해졌다. 투수를 읽는 눈이 밝아진 것은 타석에서 여유를 잃지 않게 한다. 이것은 상대 투수를 불안하게 만든다.
WBC에서 이승엽은 자신을 반쪽짜리 선수로 만든 일본을 상대로 역전 투런 홈런을 날리고, 자신을 외면했던 미국을 상대로 선제 홈런을 빼냈다. 미국 대표팀 포수 마이클 배럿(시카고컵스)은 “왜 그가 메이저 리그에서 뛰지 않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메이저 리그 진출을 꿈꾸는 이승엽은 이번 대회에서 만점짜리 면접 시험을 치른 셈이다.

한국 야구는 WBC를 계기로 야구 강국이라는 미국·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부활의 초석을 놓았다. 미래의 동량 어린이들이 다시 야구를 꿈꾸게 된다면 그것은 한국 야구의 미래를 밝게 한다. 박찬호는 “이번을 계기로 야구 붐이 불어 어린이들이 야구를 가까이 하고 많은 선수들이 메이저 리거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