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가 없어 우승했네
  • 김경호 (경향신문 기자) ()
  • 승인 2006.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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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농구 모비스, 지도력·팀플레이·용병 ‘3박자’ 맞아

 
유재학 감독(43)의 눈가에 잠시 이슬이 맺혔다.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우승인가.
 그러나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유감독은 남이 볼세라 얼른 눈물을 훔쳤다. 쑥스럽기도 했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울산 모비스가 2005~2006 KCC 프로 농구 정규 리그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는 지난 3월21일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열린 인천 전자랜드와의 홈경기에서 98대 76으로 승리해 남은 한 경기 승패에 관계없이 정규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2위를 달리고 있는 서울 삼성이 남은 세 경기를 모두 이긴다 해도 순위를 뒤집을 수 없기에 모비스는 홈 팬들 앞에서 보란 듯이 우승 축포를 쏘아올렸다.
 모비스가 프로 농구에서 우승한 것은 2001년 9월 창단한 이래 처음이다. 아마추어 농구대잔치 시절 ‘무적 왕국’을 이루었던 기아자동차와 프로 농구 원년인 1997 시즌에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부산 기아의 전통을 이었던 모비스는 그러나 창단 이후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창단 첫해인 2001~2002 시즌 박수교 감독(현 전자랜드 농구단장)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꼴찌인 10위에 그쳤고, 2002~2003 시즌에는 아마추어 농구의 명장 최희암 감독(전 연세대·현 동국대 감독)이 팀을 맡아 6위로 끌어올리며 재건의 틀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이듬해 다시 최하위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기아가 ‘농구 명가’의 재현을 노리며 유감독을 영입한 것이 이때. 연세대·기아자동차 출신으로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받는 유감독을 불러들인 모비스는 한 시즌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프로 농구 정상에 올라서는 감격을 맛보았다. 창단 이후 처음이고, 기아 시절이던 1997 시즌 이후 열 번째 시즌을 맞는 뜻깊은 해에 마침내 모비스는 그 옛날 코트를 주름잡던 ‘기아왕국’ 영광을 재현했으며, 그 후신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악착같은 수비가 우승 원동력

 사실 올 시즌 모비스의 우승은 뜻밖이었다. 이렇다할 스타 선수도 없었고,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열 개 구단 가운데 최저 수준이었다. 모비스가 우승한 다음날 신문들은 ‘꼴찌의 반란’이라는 제목을 시원스럽게 뽑았다.

 모비스에서 주축을 이루는 국내 선수는 우지원(33)·양동근(25)·이병석(29)·구병두(31)·김동우(26) 등이다. 연세대 시절 이름을 날리며 소녀팬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우지원이 이름 값으로 치면 최고 스타였지만 그도 프로 농구 10년을 거치면서 어느덧 ‘식스맨’임을 자처할 만큼 나이가 들었고 기량도 쇠했다.

그런데 이 스타 선수가 없는 것이 오히려 모비스의 장점이 되었다. 모비스로 부임한 이후 두 번째 시즌을 맞게 된 유감독은 지난해 여름부터 선수들의 체력을 다지고, 부상 선수들의 재활을 서두르는 등 착실히 올 시즌 준비에 나섰다. 유감독의 호된 조련 아래 모비스의 전 선수들은 개인을 앞세우지 않고 팀승리를 우선 생각하는 희생적인 플레이를 몸에 익혔다.

 
 조직력을 앞세운 악착같은 수비는 모비스가 올 시즌 우승하는 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평균 실점이 78.6점으로 열 개팀 가운데 가장 적었고, 실책도 최소였다. 화끈한 공격력보다는 견실한 플레이로 차근차근 정상을 향해 밟아 올라온 것이다.
 국내 선수들의 악착같은 노력이 우승을 향한 밑거름을 다졌다면 이번 시즌에 새로 합류한 만능 외국인 선수 크리스 윌리엄스(26)는 그 위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올 시즌 모비스 농구의 핵심은 키 193㎝, 98㎏의 아담한(?) 체격을 가진 윌리엄스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만큼 그는 뛰어났다.

 윌리엄스는 경기당 평균 득점 4위(25.2점), 리바운드 8위(9.9개), 어시스트 4위(7.2개), 가로채기 1위(2.6개)를 기록할 만큼 모든 면에서 고른 기량을 보였다. 득점이 필요하면 반드시 골을 넣어 ‘해결사’ 몫을 했고, 도움이 필요하면 동료들에게 어시스트를 해주는 감각을 갖추었다. 올 시즌에서 윌리엄스는 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에서 고루 두 자리 수 이상의 기록을 내는 ‘트리플 더블’만도 여섯 번이나 작성했다.

 유재학 감독은 2004~2005 시즌을 7위로 마친 뒤 곧바로 새 외국인 선수 선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선수진이 약했기에 실력 있는 용병을 뽑는 게 모비스 전력 상승의 관건이라 본 것이다. 유감독은 독일 리그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뛰는 윌리엄스(당시 프랑크푸르트 소속)의 기량을 눈으로 확인했고, 두말 않고 스카우트를 결정했다.
유감독의 기대대로 윌리엄스는 역대 한국 프로 농구를 거쳐간 외국인 선수 가운데 톱클래스에 꼽힐 만한 실력을 갖춘 특급 선수였다. 윌리엄스 돌풍은 곧 모비스의 승승장구로 연결되었다.

지옥과 천당 오간 유재학 감독

 출발부터 선두를 계속 지켰지만 고비도 있었다. 팀당 두 명씩 보유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 가운데 다른 한 명이 계속해서 말썽이었다. 키가 너무 작거나, 팀플레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상을 당하는 따위 사유로 수시로 교체되는 불안정을 드러냈다. 선두를 달리다 1월 중순 3위까지 떨어진 것은 분명 위기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팀내 최고참 이창수(38) 등 국내 선수들이 이 약점을 모두 메우며 한숨 돌리게 했다.
 유재학 감독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회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추어 시절 ‘천재 가드’로 명성을 떨쳤던 유감독은 무릎 부상으로 서른 살에 조기 은퇴하는 불운을 겪었다. 1993년 연세대 코치로 지도자의 길로 접어든 유감독은 서장훈(현 삼성)·이상민(KCC)·우지원 등 쟁쟁한 스타들을 거느리고 농구대잔치를 제패해 화려하게 지도자로 데뷔했다.

 그러나 프로는 달랐다. 신생 창단팀인 인천 대우 제우스의 코치로 새 출발을 한 유감독은 1998~1999시즌부터 감독으로 승격되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98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인천 연고 농구단은 신세기통신, SK텔레콤을 거쳐 전자랜드로 2~3년마다 팔리는 상시 매각 대기 상태의 어려운 여건에서 운동을 해야 했다.

 유감독은 신세기통신에 몸담았을 때인 2000~2001 시즌 최하위로 곤두박질쳤을 때를 잊을 수 없다. 그는 “그땐 정말 주위 사람 볼 낯이 없었다”라면서 최고에서 제일 밑바닥까지 떨어져본 쓰라림을 되새겼다.

 유감독은 2003~2004 시즌 전자랜드를 4강까지 이끈 뒤 구단의 재계약 요청을 뿌리치고 과감히 친정팀 모비스의 부름에 응했다. 유감독은 이때 계약 기간 3년에 2억3천만원이라는 최고 연봉을 받았다. 기존 구단의 재계약 요구를 거부한 경우는 유감독이 처음이다.

 그만큼 유감독의 우승에 대한 갈망은 컸다. 팀 전력상 전자랜드는 하향 곡선을 그리는 팀이었고, 모비스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심을 품고 친정으로 복귀한 유감독은 프로농구계에 소문난 그의 지도력이 헛소문이나 과장된 허풍이 아니었음을 두 번째 시즌 만에 우승으로 증명해 보였다. 지난 시즌 전 당뇨병 후유증과 망막손상 등으로 한쪽 시력을 잃을 뻔한 위기에 몰렸던 아픔도 이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유감독은 “아직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이 남아 있다. 챔프전까지 제패해 진정한 챔피언으로 매듭을 짓고 싶다”라고 말하며 감격의 눈물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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