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사로잡은 ‘형형색색’ 영상
  • 김봉석(영화 평론가) ()
  • 승인 2006.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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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화의 장점은 다양성이다.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예술영화만이 아니라, 특정한 취향을 지닌 각양각색의 관객을 위한 다양한 장르와 독특한 성향의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도 홈드라마와 멜로물만이 아니라 추리와 공포물, 사회 드라마 등 다양하다. 한국인의 취향에도 잘 맞는 순정만화적 감성의 멜로물 이외에 어떤 작품들이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는지 만나보자.

 
영화 <오디션>
해외에서 가장 주목받는 일본 감독 중 한 사람인 미케 다카시의 <오디션>(1999)은 한 중년 남자가 극심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가진 여자를 만나서 겪는 악몽을 그린 공포 영화다. 아오야마는 오디션에 참가한 야마사키란 젊은 여성에게 관심을 갖고, 만남을 시작한다. 그러나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모든 행복은 사라지고 끔찍한 파멸이 다가온다. <오디션>은 익명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공포를 보여준다. 아오야마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트라우마에 지배된 야마사키의 분노 대상이 되어야 한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와 범죄는, 한 개인의 선택 이전에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일 것이다. 미케 다카시는 현대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을 단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엽기적인 감독이다. <오디션>은 이미 국내에 수입되었지만 잔인하다는 이유로 개봉하지 못했다.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1997)
일본인이 가장 좋아했던 드라마로는 단연 <춤추는 대수사선>이 꼽힌다. 국내에서도 개봉된 극장판 두 편과 2005년 일본에서 개봉된 번외편 극장판 <교섭인 야마시타>와 <용의자 무로이>까지 모두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춤추는 대수사선>은 정통 수사물이라기보다는, 범죄를 둘러싼 인정희극(人情喜劇)에 가깝다. 경찰서의 고위 간부들은 무능력과 무사안일에 관료주의라는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고, 일본 경찰의 고질적인 문제인 캐리어(고시 출신)와 논캐리어의 갈등도 심각하지만 코믹하게 그려진다. 전직 영업 사원인 아오시마는 시민에게 서비스한다는 정신으로 수사에 최선을 다하지만, 현실의 벽은 거대할 뿐이다. <춤추는 대수사선>은 현실의 부패와 불의를 치열하게 고발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유쾌한 드라마다.

 
드라마 <게이조쿠>(1999)
<춤추는 대수사선>이 일본인 누구나가 좋아하는 서민적인 드라마라면, <게이조쿠>는 실험적이고 광적인 추리 드라마다. ‘계속’이라는 의미의 <게이조쿠>는 미결 사건만을 해결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이지만 일생 생활에는 젬병인 여자 시바타 준과 동생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조종하는 살인마를 쫓는 마야마의 기상천외한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는 <게이조쿠>는 수사물과 판타지, 공포물 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며 눈길을 끌었다. 엽기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이조쿠>는 독특한 구도와 카메라워크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이후 <게이조쿠>의 캐릭터와 이야기 구성은 마술사와 과학자가 한 팀이 되어 세상의 모든 ‘트릭(속임수)’을 풀어내는 <트릭>으로 이어졌다. <게이조쿠> 극장판은 국내에서 개봉했다.

 
애니메이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5)
2002년 신카이 마코토는 혼자 힘으로 만든 25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별의 목소리>는 1인 제작의 한계도 보여주었지만, 외계인과의 전쟁을 그린 SF물이면서도 순수하고도 애절한 감성이 선명하게 드러나 깊은 감동을 주었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별의 목소리>의 성공으로 제작이 가능해진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2차 대전 후, 일본이 두 나라로 갈라졌다는 가정 아래 두 소년과 한 소녀가 갈망하는 꿈을 그리고 있다. 홋카이도에 서 있는 수수께끼 탑에 다가가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청년이 된 아이들은, 소녀가 계속 잠을 자는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유년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감성은 여전하고, 좋아진 제작 환경 덕에 애니메이션의 질은 일취월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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