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金芝美
  • 김동선 편집부국장 ()
  • 승인 1991.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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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림굿 받고 싶다”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영화배우 金芝美씨를 만났다. ‘영원한 스타’로서 30년 넘게 줄곧 은막의 정상을 지켜온 김씨는 영화사 ‘지미필름’을 세워 외화 수입과 방화 기획․제작에 뛰어들어 이 방면에서도 단번에 정상으로 뛰어올랐다.

 영원한 스타답게 아직도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김씨는 30년 은막생활과 ‘무당이 됐다’는 소문의 진상에 대해 털어놓으면서 가끔 감회에 젖곤했다.

• 자료를 보니까 덕성여고 2학년 때인 1957년에 <황혼열차>라는 영화에 처음 출연하셨던데, 현재까지 몇편이나 하셨습니까?
 한 8백편은 되는 것 같은데, 저도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어요. 많이 할 때는 한해에 30~40편을 한 적도 있습니다.

•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는 어떤 것을 꼽습니까?
 배우가 좋아하는 작품과 관객이 좋아하는 작품은 좀 차이가 있어요. 그러나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제가 해외에 나가 상을 받은 작품이 좀 낫지 않나 생각해요. 또 관객의 호응이 컸던 작품이 있겠지요. 지금까지도 작품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장희빈>이라든가 등등. 그런 것들은 내가 좋아하기보다는 관객들이 기억하는 것들이죠. 제가 흡족하게 여기는 작품은 아직 없어요. 이런 부분은 좋았는데 저런 부분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작품이 처음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거든요. 감독의 연출에 문제가 있다든지, 배우들간 호흡이 맞지 않았다든지…. 그래서 내가 만족하는 작품은 없어요.

• 한 인터뷰기사를 보니까 “영화는 나의 운명이요 종교”라고 하셨던데 어떤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하셨는지.
 제가 한때는 자의든 타의든 일년에 수십편씩 했잖아요. 이는 마치 숙련공이 작업하듯 한 것이 지나지 않습니다. 연기자로서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외국에 나가 인터뷰할 때 작품수를 줄여 말해요. 한 40~50편 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많다고 그래요. 제가 영화계의 소모품으로 필요했으니까 많은 작품을 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했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연기생활을 하면서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러는 동안 자연인으로서의 제 생활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서너 시간 스케줄을 줘야만 영화가 되니까 1년 3백65일에서 한달을 60일로 나누고 60일을 다시 1백20이로 저희는 나눕니다. 그래서 낮밤으로 시간을 쪼개고 거기서 낮을 두 번 넘고 밤을 두 번 넘는 생활을 쭉 하다 보면 완전히 개인의 인간적인 생활은 하나도 없게 되죠. 그러다 보니 일에 대한 권태도 생겼고, 나를 한번 돌아보자는 방황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래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도 생겼고, 그럴 때 ‘아 내가 영화를 안해야겠다’며 영화계를 떠나 흔한 말로 은둔이라고 할까, 나만의 시간도 가졌는데 결국은 그게 나에게 안 맞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내가 연기자로서나 여성으로서 가정을 이끄는 한국적 여성이 되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끝나는 것 같다는 고민을 했어요. 주변에서 비난도 많이 하고 격려도 끊임없이 해줘서 역시 영화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아니겠는가,  영화만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영화는 나의 운명이요 종교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로서 지천명의 나이인 50을 맞았을 때 어떤 감회를 느끼셨는지….
 그동안의 삶은 갈팡질팡이었지요. 사랑도 해봤고 가정도 가져봤고 자식도 길러봤고, 때로는 연기인으로서 최고의 인기도 누려봤지만, 그것은 한낱 지난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온 것에서 더 이상 고꾸라지지 않고 올바르게 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 나이에 ‘어떤 부분은 잘못됐으니 다시 그때로 가면 절대로 그렇게는 안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바른 길을 더욱 잘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잘 가야겠다는 것은 수학공식처럼 나오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처한 여건과 환경에서 1백% 최선을 다하면 나로서는 충분하게 잘 끌고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영화계를 떠나 다른 일을 하던 사람들이 결국은 모두 영화계로 되돌아옵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배우로서 예술을 하고 여자로서, 동시에 사회인으로서 사업을 하면서 각각의 역할에대한 표본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배우로서 정상을 달렸고 제작자로서도 정상을 달리고 있는데 배우로서 가졌던 영화관과 제작자로서 가지게 된 영화관의 차이는 어떤 것입니까 .
 차이가 있지요. 왜냐하면 배우일 때는 내 연기가 곧 작품화되니까 전체적인 것을 못봤어요. 자기 부분만 봤기 때문이죠. 그러나 제작을 하다 보니 부분부분보다 중요한 것은 큰 틀이더군요. 그래서 부분과 전체 틀을 맞추려다 보니 간혹 관객의 흥미를 돋울 수 있는 부분을 본의 아니게 가미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어요. 예술작품이라고 곡 흥행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영화사업은 대재벌에 비하면 영세한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나마도 회사를 이끌어가려면 절대적으로 경비에 신경을 쓰고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영화의 오락성 같은 것입니까?
 대중성이라고 해야겠지요.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그림을 그려도 그 그림을 일부 사람만이 이해하고 일반 대중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는 대중예술이기 때문에 대중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 주변에서는 배포가 큰 여장부라고 한다는데, 그런 표현은 영화에서 본 이미지하고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저는 성질이 되게 급해요. 남에게 욕을 얻어먹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끝까지 합니다. 절대로 내가 남보다 능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건방진 생각 같지만 그래야만 일을 하려는 의욕과 용기가 생깁니다. 남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하면 의욕과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끝까지 매달려서 해요. 일단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아요. 도 한번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끝까지 안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적당한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일단 약속을 하면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정확하다고 할까요. 결벽증이 있어요 우물거린다든지 나중에 보자든지 하는 게 없어요.

•김금화씨로부터 내림굿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고 무병을 앓았다는 소문도 있는데요.
 내림굿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의 무속신앙, 샤머니즘에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어요. 저는 지금도 점을 보러 다녀요. 또 우리 생활 속에서 무속신앙은 항시 있는 것 아닙니까. 가령 “재수없는 것 봤다”든지 :신난다“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 그런 바탕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는 무속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흥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병을 앓았다는 것은, 지나치게 보도 경쟁을 벌이다 보니 오보를 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림굿을 받고 싶어요. 타 종교에서는 미신이다 뭐다 하지만 궁금해서라도 받고 싶은데 받아질른지, 받을 수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도 열심히 무속에 관해서 배우고 있어요 촬영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질 수 있는 연기를 해야지 적당히 해서는 안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말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 영화촬영을 위해 무당수업을 받은 셈인데 어떻게 받으셨어요.
 김금화씨에게서 받았지요. 제가 출연하는 <서울만신>의 주인공은 단란한 가정의 주부입니다. 남편은 교수고 저는 화가이고, 자녀를 둔 단란한 가정의 어머니였던 여자가 갑자기 무병을 앓는 증세를 겪습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내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병을 앓으면 어떤 정신적인 상태를 겪는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맨처음 그런 사람들의 생활모습, 다음엔 무녀로서의 업을 어떻게 하는가, 다시 말해서 무당이 되고나서 무가라든지 춤이라든지 이런 것을 알아야 되기 때문에 일일일 수업을 받았지요. 김금화씨나 그의 수제자들이 굿을 하면 같이 갑니다. 같이 가서 그 사람들의 상태를 계속 봅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한마당 나가서 추라고 하면, 김금화씨가 나를 연습시키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가서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당됐다는 소문이 난 것 같아요.

• 작두 위에 올라서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발을 보험에 들었다는 말이 있던데…
 아직 들지 않았습니다. 그 보도는, 영화사에서 “위험하니까 보험에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하고 말한 것이 확대된 것입니다. 일반 무녀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생활고에 시달리고, 굿이 있어야 생활이 되는데 무녀들은 그런 소문에 상당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어요. “니 다리는 뭐고 우리 다리는 뭐냐”는 거죠. 그래서 보험에 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사람들은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멸시받고, 정신적으로 외로워하고 있어요. 제가 시간이 나면 가서 만나려 하고 그 사람들도 자기들 이야기를 해준다고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인식을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 텔레비전에서 UIP 직배반대시위에 참여한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영화계는 UIP 직배로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지요.
 UIP 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운명적인 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정부가 하는 일이고 통상법 301조에 의해 열어준 것인데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안되는 일이거든요. 그러나 정부가 시장을 개방할 때 문화는 다른 산업부문과는 다르기 때문에 달리 취급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조업은 좋은 재료를 사용해 좋은 물건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문화는 시간을 요하는 것이지요. 정부에서 그런 국가 대 국가의 문제가 있다면 몇 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문화예술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처를 취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한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또 영화인들이 우왕좌왕하는데, 저는 그 사람들을 탓하고 싶지 않아요. 못 먹을 때는 방 한조각 가지고도 사울 수가 있지요. 문화부에서는 올해를 ‘영화의 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청사진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우리 문화는 완전히 미국에 예속화되고 있어요. 정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 자유당 시절에는 영화발전을 위해 면세가 됐는데 3공 이후에는 영화법에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어요. 관객들이 “우리는 미국영화를 보려고 하는데 왜 당신들이 못 보게 하느냐”라고 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우리가 영화를 잘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3공 때부터 시작된 각종 제재 속에서는 영화를 잘 만들 수가 없었어요. 20여개 상사만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해놓았고, 시나리오의 사전 심의를 통해 사회성 드라마는 허가를 안해줬어요. 시나리오 심의를 적당히 해서 넘어가도 공륜에서 가위질을 했어요. 이중으로 심의를 당한 셈이지요. 또 특정 직업을 모델로 하면 관련 단체에서 못하게 했지요. 간판을 올렸다가 뗀 적이 있잖아요. 우리는 아무런 보호책도 없었어요. 몇해 전에는 제가 삭발을 했더니 스님들이 영화를 못 만들게 했어요. 그래서 촬영을 하다가 그 영화는 사장됐어요. 그러다 보니 도둑놈, 창녀 이야기, 그래도 재미가 없으니까 벗기는 영화만 만들어온 거죠. 그건 누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영화인들의책임이 아닙니다. 국산영화 몇편 만들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 줬습니다. 쿼터 하나에 비쌀 대는 5억까지 했어요. 결국 20명만이 외화쿼터를 받아먹은 셈입니다. 우리가 신규등록을 하려 해도 안됐어요. 그 사람들만 해먹게 돼 있었어요. 영화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시장을 개방해주려다 보니 영화법을 개정하게 된 겁니다. 그러자 너도나도 나서는 바람에 영화사가 난립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외국영화를 수입하면서 검열에 대한 답변이 궁해지자 검열을 완화해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영화에 대한 소재도 개방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제가 UIP 직배반대시위를 하기위해 서울극장 앞에 나갔는데, 그때 순수영화인들이 많이 나왔어요. 영화를 하는 사람은 대중의 우상이요 대우를 받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다가 우리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이러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죽겠더군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저기 신성일이 나왔네. 김지미도 나왔네”하명서 지나가고요. 그런 소리를 들으니 더 속상해요. 우리가 어떻게 하다 이지경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봐요. 정부하고는 싸움을 못하니 업자하고, 극장주인하고만 싸우는 것입니다. 한국영화가 필요없으면, 우리 영화를 보호해주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못 만들게 해야지요. 그 자리에서 정지영 감독 등 삭발을 하는데 눈물이 나와 못견디겠더군요. 한국 영화계가 이런 지경에 놓여 있어요.

• 금년 계획은 어떻습니까.
 금년엔 제가 할 일이 참 많아요. 영화도 많이 만들어야 하고요. 연초부터 사할린에 갔다와야 하고, 앞으로는 영화인으로, 좋은 제작자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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