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의 실핏줄 ‘스파이 돌려주기’
  • 본.김호균 통신원 ()
  • 승인 1991.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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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협력관계 확대의 출발점된 ‘교환협상’… 형랑 채운 간첩 한명도 없어

 동서독 사이에는 통일 후까지 여파가 미칠 만큼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졌었다. 두 나라는 상대방의 군사정보뿐만 아니라 산업정보를 빼내기 위해 미인계·매수·협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었다. 《슈피겔》의 추정에 따르면 동독은 서독에서 빼낸 산업정보 덕택에 80년대 중반에 연간 4억마르크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험악한 동서독 첩보전에서도 인도적 차원이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첩보원은 발각되면 본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탈출하기 때문에 체포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체포될 경우에도 동서독 정보부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서로 통하는 관례가 있었다. 통보를 받은 쪽은 즉각 자국 첩보원으로 인정하고 체포된 첩보원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주었는데 서독에서 잡힌 첨보원의 경우에는 볼프강 포겔이 단골 변호사였다. 포겔은 또한 첩보원 교환협상에서 동독 대표로서 호네커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82년부터 서독쪽에서는 루드비히 렐링어 내무성 차관이 대표로 나서 협상에 임했다. 동서독에서는 옥사는커녕 형량대로 살고 석방된 첩보원도 없다.

 87년 4월 동독 바르타 검문소에서는 서독인 3명과 동독인 1명이 서독으로 석방됐다. 그 반대로 서독 헤를레스하우젠 국경검문소에서는 서독 국방성에 근무하던 동독 거물 간첩 로타 에르빈 루체와 다른 한 첩보원이 동독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당시에 관심의 초점이 있었던 첩보원은 이미 7년6개월 동안 동독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던 크리스타 카린 슈만이었다. 그녀는 동독 국방성에서 대 서독 첩보를 담당하고 있던 빈프리드 바우만 해군 소장과 결혼하려 했으나 그럴 경우 자신의 오빠가 서독에 산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고, 남편의 출세에 지장이 있을 것을 고민하다 서독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바우만 소장이 동독 첩보망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고 서독 정보부의 도움을 받았으나 슈만은 탈출에 실피했다. 바우만 소장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고 슈만은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오빠인 볼프디터 토미체크가 석방운동을 하면서 이 사건을 인권문제로 축소하려 한 것이 오히려 동독 보안부를 자극, 석방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앞두고 87년 8월 석방됐다. 그 대가로 서독은 서독신예전폭기 ‘토르나도’와 우주항공계획 ‘스페이스랩’에 관한 비밀을 소련 정보부에 전해준 거물간첩 만프레트 토치를 연방검찰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석방해야 했다.

첩보원 교환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1981년 10월에는 동서독 역사상 최대의 첩보원 교환이 있었다. 서독은 75년 브란트총리의 비서로 일하다 간첩임이 들어나 결국 브란트가 사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동독 최대 거물첩보원 권터 기음과 다른 5명의 동독 첩보원을 석방했다. 이에 맞춰 동독은 9명의 서독 첩보원과 함께 30명의 정치범을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7천명의 동독인에게 서독에 사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출국을 허락했다. 이 교환은 동서독이 극비로 협상했기 때문에 성공한 데 반해 프랑스 덴마크 남아프리카 소련이 참여해 추진한 다른 협상은 너무 일찍 세상에 알려지는 바람에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외국 첩보원이 베를린에서 교환된 경우도 있었다. 1962년 소련 영공에서 격추된 미국 ‘U-2'기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와 소련의 일급 첩보원 루돌프 아벨의 교환은 그 한 예이다. 또한 1985년 6월 동서베를린을 잇는 글리니커 다리에서는 서독 텔레비전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미국 첩보원 25명과 동유럽 첩보원 4명의 교환이 이루어 졌다. 미국 첩보원 25명은 독일인 19명, 폴란드인 5명, 오스트리아인 1명이었다. 동유럽 첩보원은 동독인 2명과 폴란드인, 불가리아인이 각각 1명이었는데 이들은 최하 8년에서 종신형까지 선고받고 복역중이었다. 2차대전 후 최대규모의 첩보원 교환으로 알려진 이 교환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3년 전부터 이들의 석방을 위해 동독과 협상했다. 85년 들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양측은 서독에 중재에 의해 일단 동서독인들의 교환이 합의되자 나머지도 쉽게 타협되었다.

 동서독의 첩보원 교환은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두 나라가 전문 담당관을 두고 오랫동안 협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빨리 타결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서로를 자극하지 않고 당사자의 이해를 앞세우는 인도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접근한 것이 두드러진다. 서독 첩보원 슈만의 경우본인이 자백한 간첩 행위를 서독에 사는 오빠가 부인한 것이 오히려 당사자의 석방을 늦췄다. 석방 후 거취에 관한 한 동서독은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했고 가족 동반을 허용한 경우도 있었다. 동서독의 사례는 또한 첩보원 교환이 상호신뢰와 긴장완화를 전제로 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협력관계를 확대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경험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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