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초상 ‘남파’와 ‘빨치’
  • 김당 기자 ()
  • 승인 1991.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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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감호’ 장기수 1백56명…비전향 출소자 양로원 등에서 힘겹게 여생 보내

 “본인은 1990년 11월21일 4시10분을 기하여 세상을 하직합니다. … 당과 조국 앞에 무수한 과오를 범했고 앞으로도 씻을 길 없어 부득이 이 길을 택합니다. 일편단심 자기 사상을 고수했을 뿐 이 세상에 왔다가 아무런 한 것도 없이 흐린 자취만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지난해 11월 한반도 남쪽 끝 한산도에서 유서를 남기고 소나무에 목을 맨 정대철씨의 죽음은 조용한 파문을 일게 했다.

 1927년 평북 용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정씨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조선인민군 소위로 ‘남하’, 남해여단에 편입되어 중대장으로 복무하다 ‘9?28후퇴’ 때 퇴로가 막혀 지리산에 입산한 빨치산이었다. 정씨가 죽고 얼마 뒤에 한 신문 귀퉁이에 12월 4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정씨의 추도식을 연다는 광고가 실렸다. 적어도 지난 40여년 동안 반공이 ‘국시’였던 남한땅에서 볼 수 없었던 조용한 변화를 알리는 광고였다.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를 품에 안은 한 ‘빨치’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추모하는 그 자리에는 예상과 달리 많은 ‘산중?옥중동지’들과 재야인사들이 참석해 고인을 기렸다. 보안 감호소 출신으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감옥에 묻은 세월만도 줄잡아 5백년은 넘어 보였다. 이 땅에서는 아직도 ‘간첩’들에 대한 인적사항은 죄다 국가 기밀로 분류된다. 법무당국이 비전향 좌익수에 내린 통계를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다. 다만 먼저 출소한 ‘옥중동지’들의 기억과 장기수가족협의회 같은 단체 회원들이 면회를 롱해 얼개가 드러날 뿐이다.

 6·25 발발로 양산된 이 땅의 좌익수 중에서 ‘간첩’이라는 꼬리가 붙지 않은 사람은 4·19 직후 거의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70년대 초반부터 쏟아져나온 비전향 좌익수들을 ‘관리‘할 요량으로 만든 제도가 이른바 보안감호 처분이었다. 15년에서 20년까지 원형기를 살고 나온 이들을 다시 14년 동안 격리킨 보안감호처분 결정을 받은 사람은 여자 한명을 포함해 1백 56명이다. 그중 가혹행위로 죽었다는 2명을 포함, 모두 15명이 죽어서야 옥문을 나섰으면 90명은 사상이 죽어서(전향) 출소했다. 끝내 육신도 사상도 죽지 않고 감호소를 나온 ’모진 빨갱이‘는 51명. 정씨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중 남한땅에 연고가 없거나 가족이 인수를 거부하는 ’빨갱이‘들은 서울을 제외한 전국 각지의 양로원이나 갱생보호소에 수용돼 있다(물론 아직도 교도소에는 대전교도소에 집중된 남파공작원 47명을 포함한 수십명의 비전향 자들이 남아 있다).

교수 출신 ‘거물간첩’ 최남규
 올해 여든인 ‘거물간첩 최남규’씨는 자신의 ‘리력’을 “김일성 동지보다 하루 늦은 1912년 4월16일생입네다”라는 출생신고에서부터 시작했다 본적은 한반도의 북쪽 끝인 함북 명천군이지만 돌이 지나기 전에 일제의 수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부모 품에 안겨 북간도로 이주했디. 당시 일제의 괴뢰정권이었던 만주국의 국립 길림사범대학 지리과를 졸업한 최씨는 38년부터 조국이 해방되고 47년 귀국하던 해까지 연길과 길림에서 사범학교 교유(교원), 위임관(관임관), 고등관 등을 지냈다.

 “조국에 돌아오니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디요. 다들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웠는데 나만 편케 지낸 것 같아.” 만주 시절에만 해도 먹고 살기에 바빠 ‘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최씨가 해방된 조국에서 맡은 첫 직분은 함격북도 도인민위원회 교육부 시학관(교학관). 그러다 50년 한국전쟁에 39세의 나이로 참전한 최씨는 부상으로 제대해 56년 중앙당의 부름을 받기까지 청진교원대학(현 청진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수사업’을 하던 최씨가 중앙당 연락부의 소환을 받아 남파공작원으로 뽑히게 된 까닭 중의 하나는 이북 출신이지만 북간도에서의 학창시절과 연길에서의 교원시절에 교분을 맺은 동창·후배·제자 중 남한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인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때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씨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남과 당시 정씨는 연합참모부 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정씨 말고도 군부의 요직과 대학 교수직에 있는 후배들이 많았는데 그런저런 인연 때문에 최씨는 체포되자 정부요인 포섭 임무를 띠고 남파된 ‘거물간첩 최남규’가 되었다.

 최씨가 평양 근교의 초대소에서 공작반 교육을 마치고 남파된 때는 57년 4월, 선장과 안내원이 함께 탄 쾌속선은 월음기(음력 그믐 때)에 해주를 출발해 멀리 공해를 돌아 남한땅 대천해수욕장 북쪽 군도리에 최씨를 내려놓고 떠났다. 무기도 무전기도 없는 단독남파였다. 간첩하면 으레 따라붙는 소련제 때때권총이니 일제 무전기니 암살용 독침이니 하는 것을 소지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 임무가 단지 ‘남쪽에서 생활토대를 구축하라’는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즉 때가 되면 일정한 시기에 구체적 임무를 줄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거였다. 최씨는 그 ‘때’를 넉넉잡아 10년쯤으로 보았다. “난 고저 한 10년이면 통일이 되지 않겠나 이케 생각하고 통일사업에 임했드랬는데 ‘사업’에도 실패한 채로 30년이 넘고 말았디요.”

 최씨가 체포된 때는 내려온 지 5개월만이 57년 9월, 최씨는 서울에 오자마자 자유당 정부 요직에 있던 여러 동기·후배들을 두루 만났다. 연참 의장으로 있던 정일권씨도 한번은 남산에 있던 연참본부 사무실에서, 한번은 정씨 집에서 만났다고 했다. 최씨 말에 따르면 포섭은 당치 않고 친한 후배였는데 안 만나면 되레 의심받을 것 같다 만난 것일 뿐이었다. 최씨는 후배들의 주선으로 건설업체인 ㅈ산업의 주택부장직을 맡기로 하고 막 생활토대를 구축하려는 때에 그보다 먼저 체포돼 변절한 공작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심에서 20년, 2심에서 15년, 그리고 대법원에서 15년을 확정·선고받았다. 전주교도소에 있을 때 최씨도 다른 교도소 좌익수들과 마찬가지로 전향공작을 받았다. 그러나 최씨는 이른바 사상전향을 거부하고 끝내 ‘비전향’으로 72년 10월 만기 출소했다. 최씨가 밝힌 비전향의 변은 “대학에서 사회주의 사상으로 교수사업을 했는데 어드렇게 전향서를 쓸 수 있겠냐” 하는 것과 “내 자식들을 변절자의 자식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15년 전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던 때와는 달리 감옥 안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온 ‘간첩’ 최씨를 반기는 사람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최씨는 서울에서 3년 동안 주민증도 없이(지금도 없지만) 떠돌면서 엿장수, 고물장수로 전전했다. 그러다 75년 7월 국회를 통과한 사회안전법이 발표하자 그해 8월9일 맨 처음으로 이른바 보안감호처분을 받았다. ‘사회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였다. 다른 피감호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씨는 처음 3년은 대전교도소 임시감호소에서 지내다 78년 청주보안감호소가 완공되면서 그곳으로 이감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청주보안감호소가 문을 닫게 되자 최씨난 89년 8월8일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최씨는 ‘지상과업인 통일을 위한 정치공작’을 예비한 죄로 꼬박 30년 동안 구메밥을 먹고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감호소를 나온 최씨는 부산의 한 양로원으로 보내졌다. 최씨는, 검사의 청구와 법무장관의 결정으로 2년씩 무기한으로 거주 및 주거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른바 보안관찰처분을 받고 현재 영생양로원에서 살고 있다. 소학교 교원이었던 아내와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북에 둔 최씨는 “우리 같은 늙고 병든 사람들이 서로 만난들 무슨 음모라도 하겠습네까. 고저 바라는 것은 조국의 자주·민주통일뿐이디요”라고 마지막 소망을 밝혔다. 최씨는 또 10년 안에 통일이 될거고 그보다 먼저 양쪽 정치범 교환·석방이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지만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최씨는 양로원에 오고서부터는 날마다 일기를 써오고 있다.
 “내 삶의 기록이자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기는 글’이디요. 당과 가족 앞에 가서 눈을 감고 싶습네다. 내 ‘사업’에는 실패했디만 당 앞에 가서 총화하고 싶습네다.”

지리산 외팔이 파르티잔 강동근
 ‘외팔이 빨치’ 강동근씨는 남한땅이 고향이고 가족도 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양로원을 택한 불구 노인이다. 1918년 경남 하동 청암 태생인 강씨는 14세에 혼인하여 남매를 낳아놓고 19세에 대륙으로 건너갔다. 심양에서 가마니·새끼장사, 자전거 수리공 등을 전전하다 해방을 맞이한 강씨는 팔로군 휘하의 방호산부대(조선인 의용군 사단)에 들어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그때 오른쪽 팔을 잃었다. 군관 강동근씨는 9·28 후퇴 때 본대에 합류하지 못한 채 떨어져 남았다가 퇴로가 막히자 지리산으로 입산해 ‘신빨치’가 되었다. 그러다 52년 1월 지리산에서 체포되어 전남 광주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강씨는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로 확정돼 징역을 살다가 4·19 뒤에 20년으로 감형되었다. 74년 1월 10일 20년 징역을 죄다 마치고 대구교도소에서 나왔으나 오갈 데 없는 강씨는 감옥문을 나서자마자 대구갱생보호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루도 안 빠지는 꼭 2년을 지내다 다시 경찰서로 끌려갔다. 잡혀가기 몇 달 전부터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산 사람은 모두 신고하라고 해 강씨는 그대로 했는데 76년 1월10일 새벽에 권총을 차고 들이닥친 대구 북부경찰서 정보3계장 입회하에 체포돼 보름쯤 유치장에 있다가 법무장관의 보안감호처분 명령을 받고 대전 임시 보안감호소로 끌려갔다. 강씨는 79년 11월18일 청주보안감호소로 이감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10년을 더 살다가 감호소가 폐소되면서 89년 10월 부산시 북구 화명동 정화양로원으로 ‘이감’되었다.

 강씨는 10년 전 감호소에 있을 때 어찌어찌하여 아들을 용케 찾았으나 출소하기도 전에 아들은 죽고 며느리가 손자를 데리고 부산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다. 강씨는 얹혀사는 것도 구차하고 가족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형편’이라 할 수 없이 양로원에 들어 왔지만 양로원 생활은 한마디로 ‘내놓고 징역살이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고위급회담이 세차례나 열렸는데도 포로나 정치범에 대한 교환·석방 제의가 어느쪽에서도 나오지 않는 데 대해 강씨는 “아직 때가 안되서 그런 것 같다”면서 “한번도 북쪽에 대해 서운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마침 강씨와의 대화에 기어든 한 노인이 “사회주의 국가에 부자세습이 웬말이냐”고 강씨의 ‘일편단심’을 나무랐지만 강씨는 이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그 노인이 나가자 강씨는 “철저한 반공교육만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식견도 없이 정권의 악선전대로 따라하는 말뿐이라 내가 가타부타 말을 안한다”고 덧붙였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강씨는 동료 원생들과 별로 대화가 없어 보였다. 강씨는 ‘자폐의 벽’ 속에 갇힌 환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벽은 강씨 스스로 만든 벽이라기보다는 양쪽의 정권이 스스로 걸어닫은 ‘이중의 벽’이었다. 그 이중벽은 군사분계선이라는 분단의 벽 말고도 34년 동안이나 한 인간을 바깥세상으로부터 차단하고서도 다시 양로원의 울타리 안에 가둔 의식의 벽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시장 출신 무인포스트 신인수
 피보안관찰자들은 대개 법규정보다 더 엄격한 법적용을 받고 있는데 대구시 서구 상리동 영락 양로원에 수용된 신인수씨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양로원에 들자 여사무원은 “신씨 할아버지는 형사 입회하에 면회가 가능하다. 곧 담당형사가 올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30분쯤 기다리자 하어무개 경사라는 서무경찰서 대공과 형사가 동료 한명과 함께 도착했다. 허형사는 대뜸 “취재 목적이 뭐냐, 여생을 편히 사는 노인을 뭐하러 취재하려느냐, 죄목 등 전력은 기밀사항이니 묻지 말고 양로원 생활에 대해서만 취재해라”는 등 꼬치꼬치 캐물었다. 신씨를 양로원 사무실에 불러 앉혀놓기는 했으나 원장도 마뜩찮은 표정을 드러내면서 빨리 끝내라고 졸랐다. 나중에 겨우 신씨 방에서 어렵게 취재를 했으나 총무가 따라 들어와 앉아있는 통에 신씨가 민감해할 부분에 대한 취재를 어렵게 했다.

 다행히 신씨는 총무가 이건 말건 상관치 않고 대담하고 견결하게 답변했다. 사무실에서 현사의 주문대로 양로원 생활을 물을 때도 형사가 “불편할 게 뭐 있겠어요. 오갈 데 없는 노인들 먹여주고 재워주는데”라고 끼어들자 신씨는 단박에 “불편이 많지요”라고 반박하면서 “여기에 온 뒤 외지에 나가 본 적이 한번도 없다”라는 말로 징역살이나 다름없는 경찰의 지나친 간섭을 꾸짖었다.

 신씨는 1918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홀어머니 밑에서 고학하던 신씨는 17세에 함경북도로 가 청진에서 낮에는 기계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전까지는 공장 기술자로, 행방 뒤에는 행정지관의 공무원으로 일했다. 신씨는 함북도청을 거쳐 성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시장)으로 복무하다 57년 11월 내각의 소환으로 내각 간무국(인사과)에 소속돼 58년 10월9일 정치공작 임무를 띠고 단독남파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인포스트 임무로서 지정된 장소를 독도 작업으로 찾아가 배달할 편지를 숨기는 한편으로 그곳에 숨겨놓은 다른 공작원의 편지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최남규씨의 ‘생활토대 구축’과는 정반대로 무인포스트 임무는 일회성 임무만 수행하고 다시 입북하게 돼 있었는데 신씨는 고향 근처인 경북 영일군에 상륙하자마자 체포됐다. 신씨는 간첩미수죄로 15년을 확정·선고받고 73년 11월 대구교도소에서 만기출소했다. 갈 곳이 없던 신씨는 대구 갱생보호소에 거처를 두고 2년 3개월쯤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다 76년 2월 보안감호처분 명령으로 대전을 거쳐 청주감호소에 수용됐다. 그러다 89년 10월 11일 보안감호 13년 8개월만에 출소, 대구 영락양로원으로 이감된 신씨는 최씨처럼 ‘때’를 기다리고 있다.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때’는 언제일까. 확실한 것은 ‘통일의 그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통일의 방식(형식과 내용)은 우리가-남과 북이 함께 결정해 만들어야 하는 숙명적 과제일 것이다. 신씨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다. “선생이 남파된 뒤로 강산이 세 번이나 번했고 요즘 들어 남북 고위급회담도 세번이나 열렸는데 선생을 ‘사지’로 내몬 저쪽에서 한번도 교환·석방하자는 제의가 없는 데 대해 서운하지 않느냐”고. 신씨는 “이쪽에서 ‘북파’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쪽에서도 제안할 수 없는 임장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서운한 점은 없다”고 말했다.

 위의 세사람을 포함한 이 땅의 ‘남파’와 ‘빨치’는 어찌보면 멸종될 위기에 놓은 남한땅의 ‘희귀종’들이다. 한결같이 ‘사업’에도 실해한 채로 늙고 병들어 지친 몸뚱아리뿐인 이들의 소망은 자신의 과오를 당과 인민 앞에서 총화하는 것이다. 이쪽의 잣대로 재면 분명히, 30여년 동안이나 대한민국 정부의 교도와 감호를 받고서도 여전히 붉은색이 바래지 않은 빨갱이고 비전향자이다. 이들의 발언에서도 언뜻언뜻 묻어나오듯, 어찌보면 이들은 ‘사회주의가 몰락한 세상’인데도 ‘한가닥 불순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별종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에게 그런 의지를 품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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