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다툼에 등 터지는 지방 재정
  • 나권일 광주주재기자 ()
  • 승인 2000.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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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광주, 문화 도시 면모 과시하기 ‘자존심 경쟁’… 극장 건립 등 치장에만 열중

호남을 대표하는 ‘빛고을’광주(光州)와 ‘온고을’ 전주(全州)는 언제 어디서나 예향(藝鄕)의 전통을 거론하는 호남의 중심 도시이다. 광주는 평범한 식당이나 찻집에도 그림 한 점씩은 걸려 있을 정도로 문화적 향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전주는 조선 왕도의 탯자리라는 전통에다 판소리와 좌․우도 농악의 발원지로서 각각 전라도 문화의 맥을 쥐고 있다는 점을 자랑한다. 이처럼 서로 예향임을 자랑하는 전주와 광주의 정서는 각각 문화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반자이면서도 은근히 경쟁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광주는 비엔날레, 전주는 국제영화제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먼저 예향으로서 정치성을 찾아나선 곳은 광주였다. 인구 1백30만명에 호남을 대표하는 도시인 광주는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개최해 ‘중외공원 벨트’라는 문화 인프라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광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춤했던 전주는 이에 뒤질세라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와 2001년 ‘세계 소리 축제’를 통해 예향 전주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예도(藝道) 전라북도의 중심 도시인 전주에 전북문예회관 격인 ‘한국 소리 문화의 전당’을 조성해 소리의 본고장 답게 매년 50억원을 들여 세계소리축제를 열고, 전주국제영화까지 개최해 예향의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구상이다. 광주에 문예회관과 중외공원 벨트가 있다면 전주에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있고, 광주가 광주비엔날레를 연다면 전주는 세계소리축제와 전주국제영화제를 연다는 식이다. 그러나 정체성을 확보하고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단체장들의 의욕이 너무 지나쳐, 행사가 비슷 비슷한 건물 짓기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특히 최근 전라북도와 전주시는 대규모 문화 사업을 벌이면서 특성이 없는 중복 투자를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우선 전라북도가 짓고 있는 전주시 덕진동 한국소리문화의전당. 3만여평 대지에 1천89억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대극장․소극장․국제회의장․국악당․야회공연장을 갖추고, 매년 소리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국제 회의와 판소리․연극 공연을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서울 예술의전당을 능가하는 규모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유종근 도지사가 강력하게 밀어붙여 1998년 착공해 2001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도중 부실 공사로 건물이 무너지기도 한 데다 소리문화의 전당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시설은 국악당 하나뿐이어서 소리 축제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오래 전부터 받아 왔다. 올해 10월 프레대회를 열고, 내년 10월 처음 개최되는 세계소리축제 역시 아직까지 국체적인 프로그램이 확정되지 않아 졸속 추진이 우려되고 있다. 전라북도 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소리 축제가 광주비엔날레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야심 찬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프로그램 내용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전라북도와 전주시가 짓고 있는 공연 시설은 이뿐만이 아니다. 전라북도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을 짓는 것과 별도로, 전주시는 독자적으로 20억원을 들여 관광객이 판소리르 1년 내내 관람할 수 있는 ‘판소리 전용 극장’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 고창군이 35억원을 들여 건립한 판소리 박물관이 올해 고창읍에 완공될 예정이다.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계획대로라면 전라북도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판소리전용극장․고창 판소리박물관․남원 판소리전수관 등 판소리 일색이 된다. 전라북도가 자타가 인정하는 판소리의 고장임을 감안하더라도 예산 낭비와 중복 투자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전통 계승할 내실 있는 문화 사업에 역점 두어야”
광주시와 전라남도 역시 문화 예산 투자가 공연장과 전시관 건립에 치중했다는 지적에서 예외는 아니다. 전라남도는 2002년까지 화순 ‘오지호 화백 기념관’, 신안 ‘김환기 화백 기념관’, 진도 ‘소치 허 련 기념관’, 구례 ‘송만갑 선생 기념사업추진’등 기념관을 줄줄이 지을 예정이다. 게다가 3백25억원이 소요되는 국립국악원 분원인 남도국악원 건립도 추진 중이다.

광주시 역시 서구청이 대규모 국악전수관과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고, 북구청은 인간문화재가 직접 가르치는 문화 예술 배움터인 ‘전통 문화 학교’를 건립할 예정이다. 전주와 광주의 예향 자존심 경쟁이 건물 짓기 바람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단체장들의 이러한 과욕은 문화 인프라 구축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 건물 신축에 따르는 공무원 인력 증가와 예산 낭비, 중복 투자라는 부정적인 면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신정일 전주 황토현문화연구소장은 “외형적 투자만이 문화 도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단체장들이 경쟁적으로 짓고 있는 공연장이나 시설보다 세시풍속과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문화 사업에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지적했다.

전주시가 4월28일부터 1주일간 치르는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역시 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무리하게 추진되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영화나 영상 전문 인력이 거의 없는 전주시가 광복후 한국 영화의 주요 촬영 무대였다는 이유 하나로 행사를 개최한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주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는 “영상산업 단지를 조성하는 전주시가 영화제를 통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영상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라며 지역 발전과 연계된 사업임을 강조했다. 17억원을 들여 모두 1백40여편이 상영될 전주국제영화제는 특히 제3회 광주비엔날레 기간에 열리는 데다 최 민 조직위원장(한국예술종합학교영상원장)이 광주비엔날레 전시 총감독을 맡아 일하다 해이 파동을 겪었던 터라 그 성공 여부가 주목되고 있기도 하다. 최 민 조직위원장은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총감독을 맡았다가 관료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져 미술계의 큰 반발을 불렀다. 4․13 총선 분위기 때문에 비엔날레 바람이 주춤한 광주비엔날레 재단측으로서는 전주국제영화제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최 민 조직위원장은 “광주비엔날레와 전주국제영화제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며 광주와 전주의 상호 발전 가능성을 강조했다.

건물 짓기가 대규모 행사에 치중하면서 예향을 내세우는 광주와 전주의 은근한 자존심 경쟁이 외형 확장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지적을 단체장들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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