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뼈’깍은 칼, 카지노 향하는가
  • 김당 기자 ()
  • 승인 1993.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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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슬롯 머신과 ‘동시 겨냥’∙∙∙검찰“아직 수사 계획 없다”주춤

 큰사건 수사에는 늘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슬롯 머신의 대부라고 알려진 정덕진씨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는 사실상 검찰의 일개 부서가 본격적으로 조직 폭력과 그 자금줄인 슬롯 머신 업계,그리고 이들을 비호하는 세력인 정치권, 검찰. 경찰. 안기부 등 권력기관, 군, 언론계등 이른바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기득권 세력과의 유착관계를 파헤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사건에서는 수사 주체인 검찰 조직 ‘내부의적’과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했고 바로 그 점이 중대한 고비였다.

공개 수사는 ‘계산된 선택’
 우선 이번 수사에서 주목할 점은 사건 주무 부서인 서울지검 강력부가 초기부터 공개수사를 택했다는 점이다.  서울지검은 지난 4월16일 슬롯 머신 업소에 대한 일제단속 방침을 발표하면서 다른 때와는 달리 언론에 미리 단속하는 배경과 목표를 밝히는 등 확고한 수사의지를 표시했다. 

 서울지검 강력부(유창종 부장)가 처음부터 공개 수사를 택한 것에 대해 검찰 일부에서는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명심에 사로잡혀 무모한 수사를 벌인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불가피한 계산된 선택’으로 보인다. 강력부 수사팀의 목표는 처음부터 슬롯 머신 업계의 대부 정덕진씨와 카지노 업계의 대부 전낙원씨였다.  그러나 정씨의 내사 과정에서부터 자꾸 수사 기밀이 새나가는 것을 감지한 수사팀은 우선 정씨와 그 비호세력을 잡기 위해서 일찌감치 언론을 이용한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사실 90년 서울지검 강력부 창설당시부터 검찰이 찍어 왔던 인물이다.  당시 심재윤 특수1부장 겸 강력부장(현 대검 감찰부장)이 이끈 수사팀(조승식 검사∙ 현 대구지검 강력부장, 양재택 검사 등 )은 기생에서 공생 또는 자생 단계(마피아 초기 단계)로 오른 이른바 패밀리라는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들을 ‘싹쓸이’했으나 그 배후 자금줄인 정씨를 검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번 수사 결과에서 드러난 것처럼 당시 안기부와 청와대 특명사정반의 내사 및 서울지방 국세청의 세무조사에서 정씨를 구속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드러났는데도 검찰이 검거하지 못한 것은 당시 안기부(엄삼탁 기조실장) 청와대 민정비서실(신길룡 경정)서울지방 국세청, 그리고 검찰(이건개 대검 형사2부장) 등 권력 요직에 심어 놓은 정씨의 비호세력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인 셈이다. 따라서 강력부 수사팀은 최대 걸림돌인 외압에 의한 수사 중단을 막을 수단으로 언론을 이용하는 ‘계산된 공개 수사’를 택한 것이다.  즉 수사팀은 수사 방침을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안팎으로부터 예상되는 압력을 차단하려 했다.  또 수사팀은 “외압이 있을 경우에는 언론에 명단을 공개하겠다”라고 공어했는데, 결과적으로 수사 방식이 ‘선 명단 공개, 후소환∙ 구속’으로 일관함으로써 언론에 끌려다니는 수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건 주임검사인 홍준표 검사(서울지검 강력부)는 지난 5월3일 의외로 쉽게 정씨를 검거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제는 세금 포탈 및 공갈 혐의로 구속한 정씨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이었다. 정씨는 조사받는 과정에서 홍검사의 바지가 짜깁기된 것을 보고 “옷도 못 사입을 만큼 돈이 없냐. 수사비는 충분하냐”라고 비아냥거리는 등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검찰은 정씨의 진술과는 별도로 예금계좌와 슬롯 머신 지분 추적이라는 두 줄기로 수사방향을 방향을 잡았으나 신통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홍검사는 이때(5월8일~9일) “정덕진 수사는 처음부터 한달 예정으로 시작했다. 10일쯤 더 겪어 봐야 정씨의 참회록이 나올 것 같다”라고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예상대로 정씨는 10일쯤 지나면서부터 심경의 변화가 온 듯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박철언 의원과 엄삼탁 전 병무청장이 정씨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가 공개되고 그 목격자인 홍여인이 등장했다.  그러나 수사팀은 ‘범죄피의자인 정씨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수사’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홍검사는 정씨와, 실질적으로 대외 로비를 도맡아 비호세력 수사에 결정적 열쇠를 쥔 덕일씨를 설득해 자진출두케 함으로써 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정덕일씨 소환(5월19일)사실을 숨긴 것과 관련해 수사팀이 정씨를 다른 죄명으로 협박했거나 뭔가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수사팀은 궁지에 몰렸다.  두 번째 고비였다. 박철언 의원소환을 앞두고 나온 정치 보복이니 표적 수사니 하는 말들도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정씨 사건 주무 부서인 강력부를 제치고 지원 부서인 특수부에서 엄삼탁 전 청장이 관련됐다는 물증을 먼저 확보한 것도 수사팀간에 미묘한 경쟁관계를 만들었다.  특수1부(조용국 부장)에서는 엄씨를 구속한 김진태검사가 한국은행 출신 경력을 살려 면밀하게 엄씨의 비밀계좌를 추적한 결과임을 은근히 자랑해 강력부와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사팀이 무엇 때문에 사건의 열쇠를 쥔 정덕일씨의 자진출두사실을 검찰 수뇌부에까지 보고하지 않았는지 그 까닭은 분명치 않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로 보아 분명한 점은, 수사팀으로서는 당초에 정덕진씨로부터 이건개 대전고검장 등 유착 관계를 맺어온 검사들에대한 진술을 듣고서 이를 확인해 줄, 즉 돈을 직접 건네준 정덕일씨가 반드시 필요했고 자진출두(진술 내용)를 숨겼다는 점이다.  정덕일씨가 자진출두한 만큼 적어도 한꺼번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중요한 사실은 정덕일씨가 자진출두해 조사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청와대로부터 검찰 수뇌부에 특명지시가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언론의 ‘표적∙축소 수사’의혹에 대한 김대통령의 불쾌감이 이같은 강경한 지시로 이어진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인 배경 설명이다.  그러나 검찰 일부에서는 그 직접적인 배경이 정덕일씨의 진술 내용이 처와대에 곧장 전해진 결과라고 본다.  수사 초기에 홍검사가 언론에 ‘한국의 피에트로 검사’로 거론될 때 김대통령이 홍검사를 불러 직접 격려하려 했다는 점도 이같은 배경 설명을 뒷받침해 준다. 또 이미 국회와 언론에서도 정씨 형제와 김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와의 관련 의혹이 제기된 만큼 김대통령 측근이 수사진행 상황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즉 특명지시는 청와대쪽의 필요에 의해서건 아니면 사정의 격려 또는 수위 조절을 위해서건 청와대와 강력부와의 ‘핫라인’이 열린 결과라는 지적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비호세력 색출 위해 정덕일과 ‘거래’
 어쨌건 강력부는 제1의 표적으로 삼은 이건개 고검장에 대한 수사에서 맞닥뜨린 최대의 고비에서도 “정덕일씨가 검찰 내부의 수사 상황을 잘 아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담당 검사가 지독한 사람이니 들어가지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라고 공개해 홍검사를 보호했다.  또 내부 수사와 관련해 누가 우리편이고 누가 적인지 피아 구별이 안된다는 불만 섞인 푸념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송종의 서울지검장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강력부 쪽과 이건개 고검장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적 사이의 치열한 신경전과 ‘언론 이용하기’가 전개되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마약범죄 수사기법을 전수한 유창종 강력부장은 불구속 수사를 전제로 한 정덕일씨와의 담합설에 대해서 미국과 이탈리아의 예를 들며 “조직 폭력을 색출하는 첨단 기법의 하나일 뿐”이라고 적극 해명했다.  강력부는 정씨의 신병처리와 관련해 불구속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정씨로부터 있을지 모를 함정수사 비난이나 법정에서의 진술 번복 대신에 범죄 피의자와의 거래를 시인하는 쪽을 택한 셈이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청와대 지시 이후 대검 중수부(김태정부장)에 검찰‘내부의 적’수사를 넘길 때도 정씨에 대한 불구속 방침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서울지검 강력부가 수사 기법과 관련해 이처럼 검찰 내부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정덕일씨와의 약속을 지키려 한 것은 내부적으로 반드시 비호세력을 밝혀 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일치단결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번 사건의 한 수사 관계자도 수사 초기에 “송종의 검사장-유창종 강력부장-홍준표 검사-은진수 검사로 이어지는 수사 체계가 어느 때보다도 똘똘 뭉쳐 있어 안팎의 압력으로 인한 축소 수사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또 한 지검장은 “조직 폭력 수사는 검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의 수사 지휘 진용만큼 잘 짜여진 때도 없다”라는 평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강력부는 검찰 내에서도 가장 최근에 생긴 부서이다. 89년말 대검에 강력부가 발족하면서 90년 5월 전국 6개 도시 검찰청에 신설된 강력부의 전담 분야는 조직 폭력과 마약 범죄였다.  정씨 형제 사건 수사의 최고 사령탑인 송지검장은 당시 강력부 신설 목적을 “김태촌과 정덕진을 잡기 위해서”라고 쓴 초대대검 강력부장이었다. 중간 사령탑을 맡은 유창종 부장검사 또한 89년 당시 대검 강력부 초대 마약과장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유부장은 이때 ‘마약 전문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밖에 이번 수사에는 3백개에 이르는 정씨의 은행 비밀계좌 추적에 솜씨를 발휘한 공인회계사 출신 은진수 검사를 비롯 이호승∙ 김홍일∙ 이경재 검사 등 강력부 검사 전원(부장포함8명)이 총력전을 펼쳤다.

 공교롭게도 차기 검찰총장으로 꼽히다가 이번에 옷을 벗은 이건개 고검장, 신 건 법무부 차관, 전재기 법무연수원장과 구설수에 오른 ㅊ고검장 등은 63년에 고시 사법과 (16회)또는 사법시험(1회)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또 박철언∙ 이건개∙ 전재기씨는 모두 검사시절에 이른바 엘리트 코스라는 청와대 파견근무를 했던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정씨 사건으로 밝혀진 검찰 조직의 어두운 단면이다.  어쩌면 구태를 도려내는 제살깎기 수술의 최대 고비는 이제부터라는 지적이다.  특히 이번 사건에서도 예외없이 검찰 수뇌부의 정치권 ‘눈치 보기’와, 외압과 여론에 이끌린 타성에 의한 수사라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해 수뇌부에 대한 물갈이와 조직의 체질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그동안의 검찰 수사는 축소 의혹을 받는등 우여곡절이 많았고 검찰 수사팀과 수뇌부와의 뚜렷한 의식 차이로 사정의 한계를 드러내는 등 문제점이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는 중간평가를 받고 있다.  검찰이 맡아온 수많은 의혹사건 중에서 사실‘배후다운 배후’를 캐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검찰사상 처음으로 고검장(차관)급 인사를 구속함으로써 각종 비리에 연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을 댈 수 있다는 선례와 엄정한 검찰권 정립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보인다.  성공한 요인으로 수사 초기에 내부에서조차 ‘무모한 짓’이라는 평을 듣던 홍준표 검사의 집념과 추진력 홍검사가 속한 서울지검 강력부의 강력한 진용과 결속력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 정책으로 인한 사회 분위기와, 특히 수사 국면 전환에 결정적 계기가 된 김대통령의 ‘특명 지시’등을 들 수 있겠다.

슬롯 머신은 비스켓, 카지노는 코끼리
 서울지검 강력부는 문민 정부가 출범한 이후 사정 분위기를 틈타 정씨 형제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서, 당초 조직 폭력의 돈줄과 비호세력을 차단한다는 의미에서 정씨 형제와 카지노 업계에 대한 수사가 사실상 조직범죄 척결을 위한 강력부의 마지막 수순임을 강조해 왔다. 강력부의 한 검사는 이미 수사초기에 이렇게 말했다.

 “다음 차례는 O O O 이다.”

 정씨 형제 사건을 마무리지은 다음에는 카지노 업계를 주름잡는 O O O 씨를 대상으로 수사를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슬롯 머신 업계에 대한 수사가 시작될 때 이미 ‘슬롯 머신이 비스켓이라면 카지노는 코끼리’라는 말이 나올 만큼 카지노업은 거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노다지로 알려져 있다. 현재 사정 당국은 카지노의 영업허가 및 갱신 과정을 둘러싸고 권력층과의 유착 및 탈세. 외화유출 등 비리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내사를 벌인 결과 상당한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언론에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정 당국이라고 통칭되는 카지노판에 대한 내사의 주체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의 한 관계자는 “카지노업은 그 규모나 로비의 수준으로 볼 때 슬롯 머신보다 훨씬 더 접근하기가 힘들어 어려운 수사가 예상된다”라고 밝힌다.  과연 강력부는 카지노 업계의 비리와 그 비호세력을 겨눌 사정의 칼을 쥐고 스스로의 공언대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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