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차별 편견 속 폭행당하는 여성
  • 시드니.김상익 기자 ()
  • 승인 199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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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강간위기센터, 피해자 도우며 남성 위주 통념 깨
 지역번호 02, 국번호 819-6565. 호주여성들에겐 낯설지 않은 전화번호다. 이 전화 가입자의 이름은 시드니 강간위기센터(Rape Crisis Centre).

  다이얼을 돌리자 차분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하자 상담원은 대뜸 “남자 상담원을 원하느냐”고 물어왔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야 남자에게 강간당한 피해자로 오인됐음을 깨달았다.  취재를 위해 방문하고 싶으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상담원은 위치를 가르쳐줄 수 없으며 취재에도 절대 응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철저히 숨기는 것은 남자들의 ‘습격’을 막고 강간피해자에게 ‘비밀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강간위기센터는 1974년 강간 피해자들과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설립된 단체로, 연중무휴 하루 24시간 전화상담을 하는 외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고 법적·의학적 도움을 준다.  강간 피해자에게는 폭행에 의한 외부상처 치료는 물론, 임신 여부와 성병검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건 3~4일 후, 늦어도 다음 생리일 전까지 임질검사를, 30~90일 사이에는 매독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직접 여의사와 연결해주거나 의료기관을 알선해준다. 강간범의 처벌을 원하는 피해자에게는 그 자신이 법정출두 등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준다. 그 뒤에도 법정에 동행하는 등 피해자 곁에서 도움을 준다. 여성 강사들이 지도하는 호신술교실도 운영한다. 75년부터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아왔으며 최근에는 뉴사우드웨일즈 주정부의 보조도 받고 있다.  호주에는 강간위기센터와 유사한 활동을 하는 기관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뉴사우드웨일즈에만 해도 26개 병원에 성폭행센터가 있으며, 34개의 성폭행상담소가 있다.
피해자 보호로 성범죄 신고율 높아져
 호주의 경찰 통계는 강간사건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강간의 증가’가 아닌 ‘신고의 증가’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폭력 범죄에서 신고율은 큰 의미를 갖는다. 성폭력이 많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숨어 있을 경우 범인은 마음놓고 제2, 제3의 범행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폭력은 왜 신고되지 않는가. 먼저 가해자의 상당수가 피해자와 ‘아는 사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뉴사우드웨일즈 보건 당국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범인의 72%가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다.  상당수의 강간 피해자는 하루라도 빨리 악몽을 잊기 위해 신고를 하지 않는다. 무성의한 경찰수사와 강간 여부를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따지는 검찰의 태도, 변호사의 비윤리적 신문도 신고를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호주에서 신고율이 높아졌다는 것은 사법적·법률적 개선 등으로 피해여성이 보호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법적 개선의 한 예로 호주에서는 강간사건 전담 여자경찰을 배치함으로써 강간사건 수사에 많은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시드니의 강간 사건 전담 여자경찰 마거릿 커크비는 “피해자가 수치심을 갖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경찰 수사에 협조하는 것 같다”고 이를 확인했다.
한국여성 10만명당 4백86명 성폭행당해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89년 6월부터 서울 거주 여성 2천2백90명을 대상으로 88년 1년 동안의 성폭력 실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여 대책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조사에서 88년의 강간범죄 발생률은 여성 10만명당 4백85.9명으로 계산되었다. 이는 공식통계 10.9명과 무려 44.6배나 차이가 나는 것으로서 우리 사회에 ‘숨은 강간’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준다. 신고율은 강간미수 1.9%, 강간 1.8%, 심한 추행 0.9%로 조사됐다. 42면 표에서 한국의 강간범죄발생률은 미국 다음인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미국의 범죄신고율이 약 46%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우리가 미국보다 훨씬 강간이 많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형사정책연구원의 연구조사 보고서는 “신고율이 저조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사회의 통념이고 민생치안 부재, 사법처리 절차 및 기관의 문제점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사회적 통념은 그것이 명백히 사실과 다른 경우에도 여전히 ‘진실’인 양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강간과 관련,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정숙한 여자는 강간당하지 않는다. 여성이 필사적으로 반항하면 강간을 피할 수 있다. 강간범들은 순간적 충동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그러나 개인 강간의 58%, 윤간의 90%가 계획범죄라는 조사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여자가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은 의례적인 표현일 뿐 그 말의 본뜻은 “좋아요”이다 등등.  남성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위와 같은 통념은 심지어 피해자인 여성에게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결과 상당수의 피해 여성은 자신이 피해자란 사실조차 잊은 채 수치심에 빠져 완강히 저항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는다.  강간과 관련한 통념은 재판 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박선미 연구원은 88년 6월부터 10월까지 서울의 한 지방법원에서 시행된 23건의 강간 재판 사례를 통해 강간재판의 성차별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  강간재판 과정에서 피고인(가해자)의 의뢰를 받은 변호인은 피해자의 ‘약점’을 들추어낸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혼자 잠을 잤지요?” “피해자는 술을 마신 채 피고인을 따라갔지요?” “술자리에서 농도 짙은 음담패설을 주고받았다던데요?” “피해자가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라도 옷을 잘 입고 있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폭행과 협박, 그것도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을 강간인가 아닌가를 가리는 기준으로 삼는 우리나라의 법질서 속에서 피해자의 반항은 ‘피고인의 강제 의사’를 나타내는 정황증거로서 신문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래서 변호인은 피해자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옆방에 손님이 들어서 소리치면 언제든지 사람들이 달려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던데.” “반항할 수 없었는가. 두 팔 두 다리가 멀쩡한데.” 여기서 피해자가 그 상황에서 과연 얼마만큼 반항할 능력이 있는지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노조 여성부가 강한 직장엔 성폭력 없어
 대부분의 경우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피해자 개인에 대한 평판이나 성경험 여부도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가령 피해자가 유흥업소에서 일한다거나 혼전경험을 가진 여성이라면 ‘정숙하지 못한 여자’로 규정되어 보호받지 못하는 수가 많다. 변호인은 또 피해자가 고소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의심한다. “피고인과의 성관계가 부모에게 알려지자 강제였다고 하기 위해 고소를 제기한 것이죠?” “그러니까 처음엔 신고할 마음이 없었는데 몸에 이상이 있어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가 고소하자고 해서 안하면 이상하고 해서 했구먼.”  이상과 같은 변호인의 신문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자를 평판이나 행실이 나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피해자로 하여금 강간 당시를 다시 떠올리게 함으로써 고통을 주는 사례도 발견된다. “피고인의 성기가 증인의 질 속에 들어갔나?” “(아픈) 느낌이 시작해서 그 느낌이 끝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인가?” “다른 느낌은 없었나.” 이런 가혹한 신문을 받으면서 피해자는 강간 피해를 다시 한번 받게 되며, 결국 사건을 계속 끌고가지 못한 채 ‘합의’를 보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검사나 판사 역시 남성 중심의 편견에 사로잡혀 그 같은 신문이 사건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이의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며, 피해자 과실을 인정하는 ‘정상참작’판결을 내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재판에서의 성차별을 가능한 한 막기 위해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의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해자의 과거 성경험이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고 성범죄 관련법안을 개정한 바 있다.  강간은 왜 일어나는가. 근절할 수 없는 범죄인가. 소리지르기·맞서 싸우기 등 개인적 자구노력 외에 예방책은 없는가.  여성의 전화 한우섭 사무국장은 “향락산업의 비대화와 저질비디오의 양산, 선정적 광고, 폭력적 사회 분위기, 남녀 불평등 구조, 성교육 부재, 여성의 순결만을 강조하고 매매춘을 ‘합법화’하는 이중적 성윤리 때문에 성범죄가 늘어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당하는 입장인 여성끼리 주체가 되어 함께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출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 예로 성폭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직장내 성폭력은 노조 여성부가 잘 운영되는 곳에서는 발붙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든다.  그는 또 성폭력을 전문적으로 상담하고 피해자를 돕는 강간위기센터나 여성의 피난처는 피해자 보호와 성폭행 퇴치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에도 하루빨리 그 같은 기관이 설립돼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 단체의 활동은 통념을 깨는 데도 큰 몫을 한다. 이와 함께 성폭력 범죄에 대한 법규정의 개정이나 피해자가 신고해야만 기소되는 친고죄 폐지 등 법률개폐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여성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9분마다, 독일에서는 15분마다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 얼마나 많은 강간이 이루어지는가를 수치로 비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지 모른다. 강간은 모든 여성에 대한 모든 남성의 폭력이라는 일반성을 갖기 때문이다. 굳이 나라별 차이에 눈을 돌리려 한다면 그들 나라가 성폭행을 추방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는가, 그 나라의 여성은 ‘해방’되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한국의 ‘강간추방 노력점수’는 과연 몇 점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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