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페루 민주화’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2.04.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촉즉발 위기감 고조

‘헌정중단’ 비상시국 … 게릴라 ‘유혈의 해’ 선포
 자기 월급의 5~10배나 되는 뇌물을 예사로이 받고 마약사범을 풀어주는 판사들, 고작 2백50달러의 월급의 핑계로 병사의 복지엔 아랑곳없이 돈벌이에 급급한 군 장성들, 일상적인 서류처리도 돈을 받아야 해주는 공무원들, 일반상인은 물로 노점상의 돈까지 갈취하는 경찰관들, 인구 2천2백만명 중 절대빈곤자수 1천2백만, 좌익 게릴라의 준동, 최근 헌정중단으로 정정불안을 겪고 있는 남미의 貧國 페루 (1인당 국민 소득 8백69달러 : 89년)의 실상이다.

 국가기강이 풀릴 대로 풀린 상황에서 헌정중단이란 비상시국을 맞은 페루는 탈냉전 후 급속히 전파되고 있는 남미의 민주화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려주고 있다. 남미 신생 민주국들의 공통적 특징인 빈곤과 경제난, 군부의 발호는 언제든 민선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무기’로 작용하고 있다. 불발로 그쳤지만 지난 2월 베네수엘라의 쿠데타도 그 한 예다. 페루의 경우 헌정중단의 이유야 어떻든간에 탱크를 동원해 해결하려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52)의 발상은 전근대적이며 독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90년 7월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후지모리 대통령이 스스로 페루 민주화의 앞날에 찬물을 끼얹은 게 아니냐 하는 비판이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앞으로 6개월 안에 신헌법을 제정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총선을 통해 차기의회를 구성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알란 가르시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야당인사와 정적들이 대부분 투옥돼 있는 상황에서 그가 제안한 국민투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게릴라 목표는 제2의 ‘모택동 국가’ 건설

 후지모리 대통령은 5일 “무능한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를 재편하기 위해 헌정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시실 의원들의 부패나 판사들의 부조리는 새삼 새로운 사실이 아니어서 그가 발표한 내용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의문이다. 의회에서 안정다수를 확보하지 못한 후지모리는 취임 후 의회와 마찰을 빚어왔다. 특히 지난해 12월 정부가 제안한 1백26개의 각종 개혁법률안에 의회가 미온적 태도를 보이면서 양자간의 마찰은 최고조에 달했다. 비판세력은 이번 조처가 농업과학자 출신으로 정치에는 문외한인 후지모리 대통령의 비타협적이며 독선적인 체질의 결과라고 비난하고 있다.

 물론 페루 정정의 불안요인으로 꼽을 것은 많다. 의원들의 부패와 판사들의 부조리외에 군대의 사기저하도 들 수 있다. 인구의 85%이상을 차지하는 토착민(인디오족과 메스티오 혼혈족)이 1% 미만의 유럽계 기득권층에 느끼는 경제적 소외감을 꼽을 수도 있다.

 최대의 정정불안 요인은 아무래도 좌익게릴라 활동이다. ‘센데로 루미노소’(스페인어로 빛나는 길이란 뜻)로 알려진 게릴라 단체는 5천명의 정예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체는 70년대 좌익군사정권 하에서 태어난 후 지난 10년간 2만5천명을 살해하고 약 2백억달러의 경제손실을 입혔다. 오는 2000년까지 페루에 제2의 ‘毛澤東 국가’를 건설할 것을 목표를 삼고 있는 이 단체는 올해를 “유혈의 해”로 선포하고 최근 활동무대를 산간지역에서 수도 리마로 압축했다. 이들은 이미 리마를 중심으로 반경 1백마일을 해방구로 선포하고 빈민층을 상대로 집요한 반정부활동을 펴고 있다. 외국의 지원을 거부하는 이 단체의 주요 재원은 세계 최대 코카인 생산지인 아야쿠초 일대의 농민과 마약상으로부터 거둬들어지는 ‘전쟁세’이다.

 페루 정부는 군을 동원해 소탕작전을 펼쳐오고 있으나 12만 병력 중 60%가 에콰도르와의접경지역에 배치돼 있고 군인들의 처우가 형편없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론다스’라 불리는 마을 민병대(20만명 규모)를 조직해 게릴라 소탕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이번 페루사태를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면서 당혹해 하는 나라가 있다. 탈냉전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국을 자임하고 나선 미국이다. 미국은 우선 전격적인 헌정중단조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약 2억달러의 원조를 중단한다고 발표했으나 그 이상의 제재를 취할 수 없는 형편이다. 헌정중단이란 ‘비민주적 조처’는 미워도 미국 내 마약밀매의 주요 수입원인 페루의 마약조직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한 후지모리에게 차마 등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정부는 후지모리의 마약퇴치 노력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빠른 시일 내에 헌정에 복구하라고 촉구하는 선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미국 국익에 부합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중남미 33개국으로 구성된 미주기구도 미온적인 태도이다. 미주기구는 작년 11월 아이티에서 군부 쿠데타로 민선정부가 무너지자 강력한 경제제재를 취한 바 있다. 미주기구는 최근 외무장관회의를 소집해 페루문제를 논의했으나 조속한 헌정복귀를 촉구하는선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페루의 비민주적 조치임이 분명하나 그렇다고 제재를 가하는 것은 내정간섭에 해당된다는 논리 때문이다.

 페루사태는 후지모리 대통령의 민심수습 노력과 해산된 의회의 일부 의원이 추대한 카를로스 가르시아 부통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여부에 달려 있다. 리마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피신중인 가르시아 부통령은 일단 출국해서 망명정부를 설립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 다수가 후지모리 대통령의 헌정중단 조치를 환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르시아가 정통성을 얻기는 힘들다.

 민심을 수습하려는 후지모리 대통령의 생각도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일자리와 빵을 얻어주는 게 급선무이긴 하나 후지모리 정부는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어 미국의 원조가 중단된 상태에서 경제난은 가중되고 있다. 근래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좌익게릴라들의 준동도 앞날을 어둡게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