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의 영광 특종… 죽음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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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의 로버트 카파에서 피터 아네트까지
 텔레비전이 출현하기 이전 사진은 주요한 전쟁보도의 수단이었다. “전쟁으로 출세하는 건 장군과 카메라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사진은 강력하고 생생하게 현장의 메시지를 전했다.

 헝가리 태생의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종군기자의 치열한 직업정신을 실현한 전설적 인물이다. 본명은 안드레이 프리드맨. 풋나기 사진가 프리드맨은 1936년 《라이프》에 스페인내전에 관한 사진을 실으면서 일약 명성을 얻게 된다. 그중에서도 공화파의 한 병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한장의 사진은 마지막 순간까지 군인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려는 병사의 표정을 생생히 포착한 것으로 전세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공화파나 프랑코파 어느 한편을 두둔하지 않고 전쟁 그 자체를 ‘제3의 시각’에서 본 객관성 때문에 이 사진은 오늘날에도 전쟁사진의 고전으로 기억된다. 또 한장의 사진 ‘노르만디 상륙작전’도 카파가 남긴 걸작 중의 하나이다. 포화 속에서 필사적으로 촬영한 이 사진은 상태가 몹시 나빠 편집자는 궁여지책으로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설명을 달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명주석으로서 이 사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스페인내전 이래 크고 작은 다섯번이 전쟁에 종군했던 그는 1954년 베트남전 취재중 지뢰를 밟아 폭사한다.

 2차대전 당시 전쟁중계로 이름을 날린 민완기자가 바로 미국 CBS의 에드워드 머로이다. 그는 독일의 런던 공습현장을 생생한 폭음과 함께 전함으로써 미국민들을 라디오 앞으로 끌어모았다.

 머로가 방송계의 신화를 낳았다면 신문기자들의 ‘영웅’ 어니 파일은 전쟁 보도에 휴머니티를 불어넣은 미국 최초의 저널리스트였다. 한 지방지의 스포츠 기자였던 파일은 2차대전 때 아프리카 전선에 종군, 어느날 장군의 브리핑을 취재하러 가다가 적의 사격을 받고 지프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예정된 기사 대신 사살된 운전병의 이야기를 송고했다. 인물스케치류의 이 기사가 호평을 받자 파일은 그후 ‘인간적’ 접근법으로 전쟁기사를 쓰게 된다. 체온이 실린 그의 전쟁소식은 가족을 전장에 내보낸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려 한때 1백20개 신문에 동시에 게재될 만큼 인기를 모았다. 장성들보다 평범한 졸병을 즐겨 상대했던 그는 194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 오키나와에서 총탄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종군기자 70여명 목숨 앗아간 베트남전
 전쟁은 또한 여걸을 낳았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여기자의 종군을 비웃던 시절 마그리트 히긴스는 그같은 편견을 보기 좋게 물리쳤다. 이미 2차대전 말 독일전선에서 남성특파원을 능가하는 취재력을 과시한 그는 맥아더의 특별 배려로 한국전에 종군, 인천상륙작전을 취재하는 행운을 얻는다. 이 대작전의 종군 상보 ‘붉은 해안’은 50년 9월18일자 <해럴드 트리뷴>에 대서특필되어 그에게 여성 종군기자로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다. 그러나 한국을 일곱차례나 방문한 知韓 여성이었던 그녀 역시 전장에서 불운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월남전이 절정이던 66년 정글 취재중 얻은 열대병으로 4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밖에도 역시 한국전 등에서 세계적 특종을 낸 타임-라이프사의 사진기자 마거릿 버크화이트, 9백60킬로미터의 베트남 종단 취재중 베트콩의 포로가 됐다가 3주만에 풀려난 모델 출신의 프랑스 자유기고가 미셸 레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여걸이었다. 특히 2차대전 중 독일공군의 모스크바 공습 당시 지붕에 올라가 공습 야경을 찍는 데 성공한 버크화이트는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호텔 목욕탕에서 필름을 현상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텔레비전이 안방의 시청자들에게 속속 전황을 전하게 된 베트남전 이전까지 《라이프》는 전쟁보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6년 창간 당시 40만부에 불과했던 《라이프》는 사진만이 지니는 생생한 박진감으로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어 전성기였던 70년에는 8백50만이란 엄청난 발행부수로 세계 저널리즘을 선도했다.

파편에 잘린 다리 주우며 촬영한 ‘이요섭’
 20여년 동안 전세계에서 수천명의 기자가 종군, 70여명(실종 40명 포함)이 목숨을 잃은 베트남전은 금세기의 가장 가파른 취재전선이었다. 요즘 한창 바그다드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CNN의 피터 아네트는 누구보다도 단숨에 그 고지를 점령한 민완기자이다. 당시 갓 30대였던 AP통신의 아네트는 65년 한해 동안 다섯 차례의 특종기록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 67년, 미군 3백명 중 90명의 전사자를 낸 유명한 ‘닥 토’고지 혈전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헬기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행운의 사나이이기도 하다.

 전쟁의 참상을 수없이 목격한 그는 결국 격렬한 반전론자가 되는데, 미 공보당국이 만든 베트남전 뉴스영화 등 많은 허위선전을 비판해 미국 당국으로부터 큰 미움을 사기도 했다. 75년 4월말 사이공이 함락됐을 때는 AP지국장 조지 에스퍼와 함께 그곳에 남아 독립궁에 진주한 북베트남군 상황 등을 송고하여, 미국 언론인은 교전상대국에서도 받아들여진다는 ‘특례’를 보여주었다.

 34세의 꽃송이로 쓰러진 사와다 교이치는 베트남전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기자혼을 불사른 인물이다. 그의 65년작 ‘안전에의 도피’는 어깨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필사적으로 헤엄쳐 건너는 5명의 베트남 모자를 찍은 사진이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베트남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포착한 이 작품은 전쟁에 무감각해진 미국인의 가슴에 큰 감동을 전했다. 삶에 대한 집념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표현한 이 사진은 퓰리쳐상을 비롯 잇달아 큼직한 상을 휩쓸면서 UPI의 신참기자인 그를 ‘세계의 사와다’로 만들었다. 망원렌즈를 쓰는 대신 늘 남보다 한발 앞에 나가 셔터를 누르던 기자. “베트남의 로버트 카파가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그는 70년 캄보디아전선에서 사망했다.

 사와다를 “매우 온순하고 차분한 사나이”로 기억하고 있는 ABC 서울지국장 이요섭씨는 베트남전 당시 같이 활약했던 한국 동료들간에 “전쟁의 험로를 뚫고나온 강철 같은 사나이”로 기억되는 인물이다(《시사저널》67호 시론 참조). 77년 태국 국경전 취재중 한쪽 다리를 잃은 그는 부상의 순간 ‘마지막 기록’을 남기기 위해 파편에 끊어져나간 자신의 다리를 주워놓고 촬영한 초인적 의지의 소유자이다.

 이씨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 기자들이 호텔방이나 사령부에 앉아 기사를 보내는 일이 왕왕 있었다고 시인하면서 “부대측에 교란사격을 요청, 연출사진을 찍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털어놓았다. 이같은 눈속임은 직업정신이 투철하기로 소문난 서방언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듯 출격 예정이 없는 비행장에서 억지춘향격의 출격장면을 찍었던 UPI의 한 견습기자가 베테랑의 감식안에 걸려 해고된 일도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당시 한국 취재진의 문제점으로 △종군에 대한 사전 준비의 불충분 △전방취재를 꺼리는 투철한 직업근성의 부족 △군당국과의 유착으로 인한 도덕성 상실 등을 지적하면서 이번 걸프전 취재에 있어서도 그같은 오점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특종을 낳고 특종은 명기자를 낳는다. 명기자는 포성을 쫓고 오늘도 중동에서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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