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학’강사 “설 땅 없다”
  • 편집국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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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학문’에 대한 관심 떨어져…일부 대학 강좌 폐지·학생 감소



 “후배들이 마르크스를 개 취급합디다.”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다 최근 ㅅ대 대학원 미학과에 복학한 한 ‘80년대 대학생’이 털어놓은 하소연이다. 그가 겪은 이 문화충격은 지난 2~3년 동안 진행된 대학사회의 변화가 얼마나 급격한 커브를 그리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80년대 내내 진보이론 진영의 나침반이자, 변혁운동이 마침내 닿아야 할 항구였던 마르크스ㆍ레닌주의가 내동댕이쳐진 이 후, 그 무너진 동상을 바라보는 진보적 소장학자들은 착잡하다.

 “나는 학자적 양심과 시대정신의 맨 앞에 있었다고 자부했다. 누군가 내 앞을 달려가면 따라가려고 애썼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나를 앞질러 가 있었다.” 10년 넘게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면서 변혁운동에 앞장섰던 대학강사 김모씨(37)의 ‘고해성사’이다. 특히 정치ㆍ경제ㆍ사회학 분야의 대학강사나 석ㆍ박사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들에겐 김씨의 뼈아픈 고백이 남의 말로 들리지 않는다.

 

학교당국과 신세대 사이의 ‘샌드위치’

 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가 80년대 중후반 대학원에서 진보적 사회과학을 전공한 거개의 소장학자들은 저렇게 무너진 이념의 동상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동상을 뒤로 하고 신보수주의 깃발 아래로 ‘투항’하고 있으며, 또 일부는 그 동안 거부했던 유학을 떠나고, 또 다른 부류는 아예 학문을 포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켠에서는 “일단 시작한 것이니 어쨌든 계속해보자”며 어금니를 깨물고 있다.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 추세와 발을 맞추고 있는 학교측과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신세대와의 사이가 현재 사회과학 강사들이 서 있는 자리이다. 그 자리는 날로 좁아지고 있다. 일부 대학에서는 80년대 말 학생들의 요구로 개설된 진보적 강좌를 폐지하거나 그 강의를 기존의 보수적인 교수로 대체하고 있다. 대학 울타리를 벗어나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88년을 전후해 대학생들이 수업권을 내세우며 진보적인 강좌와 소장학자를 요구하자, 대학은 그간 굳게 닫았던 빗장을 열었다. 89~90년에 걸쳐 그 동안 적체되었던 이 분야의 소장학자들이 대학 강단에 서게 외었다. 이들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참여 또한 매우 높았다. 어떤 강좌는 1천명까지 몰려 강의실을 늘려야 했고 강사도 그만큼 더 필요했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이 세계사적인 대변혁을 일으키고, 동시에 국내 정세가 보수화로 치닫자 진보적 강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감소되고 말았다. 일부 대학에서는 강좌를 없애버렸고, 수강생들이 줄어들자 자연히 강사들은 설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불과 1~2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서울 ㄱ대학의 경우 89년 총학생회의 요구를 학교측이 받아들여 진보적 강좌를 개설했다. 교양선택 과목이었지만 강좌마다 2백~3백명의 학생들이 들어찼고 분위기도 진지했다. 물론 강의는 학생들이 추천한 강사가 맡았다. 그러나 지난해 2학기에 ‘국민윤리’를 가르치던 교수가 강단에 섰다. 학생들은 반발했지만 옛날 같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적지 않다. 서울의 ㅅ대학은 필수교양 과목이던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돌렸다.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을 민중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그 과목은 신진 소장학자가 맡았다. 그런데 ‘세월이 바뀌자’ 나이가 많은 사학과 교수들이 “소장 학자들이 이 강의를 통해 학생들을 선동한다”며 강좌를 문제삼은 것이다.

 기왕에 개설된 사회과학 강좌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그 내용이 바뀌기도 한다. 서울 ㅈ대학의 ‘정치경제학’ 강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배제되고 있다. ㄷ대학의 한 경제학 강의 또한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거세하고 주류 경제학으로 선회했다. 어떤 대학에서는 경제사 강의를 듣고자 수강신청을 한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다. 유물사관에 바탕한 경제사를 기대했는데 막상 학기가 시작되자 미국 실증주의 경제사를 강의한 것이다.

 전국강사노조협의회(전강노) 한면희 위원장(성균관대 강사ㆍ철학)은 “사회과학 분야의 특정 강좌는 줄어들고 있지만, 87년 이후 91년까지 전체적인 강사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고 올해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일반 강사들이 겪는 어려움에 비해 진보적 강좌를 담당했던 강사들의 고민이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위원장은 “진보적 강좌에 대한 대학사회의 관심이 줄어드는 현상은 분명하다”면서 “대학사회의 보수화와 유행에 민감한 우리 학문풍토에 문제가 없지 않다”고 말했다.

 80년대 중후반 진보적인 교수와 학생들의 목소리 앞에서 침묵을 지키던 보수진영의 교수들이 90년대 들어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 내 운동권이 전반적으로 침체됨에 따라 대학사회의 보수화는 더 빨리 진행되고 있다. 총학생회는 대학사회의 변화를 읽어내면서 ‘학우대중’의 여론에 큰 비중을 두는 이른바 대중주의 노선으로 벌써부터 선회하고 있다.

 정치적인 대자보가 빈틈없이 들어차 있던 게시판에는 해외유학과 배낭여행을 모집하는 포스터가 대신 붙어 있으며, 대학가 앞에는 락카페나 노래방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91년도 신입생의 70%가 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다닌 것으로 나타났으며, 70%를 차지하던 지방 출신 학생들이 최근 들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서울대 총학생회 학술부 차장 김성수군(지구과학교육과 3)은 “전체 학생 중 중상류층 출신의 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군은 “총학생회 활동이 정치투쟁 일변도일 때 학생들로부터 비판이 나온다. 학우들의 삶과 유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운동권 대 비운동권으로 양분되던 80년대와는 달리 대학생 사회는 다양·다원화되고 있다. 운동권이 관념적인 논쟁을 피하고 구체성과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방향으로 옮아가고 있으며 비운동권은 순수한 학구파, 진로문제를 일찍부터 염두에 두는 실용적 입장, 그리고 소비문화세대 등으로 집단적 분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총학생회가 너무 대중추수주의적이고 운동권이 반지성적이다”라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장학자 최성씨(고려대 강사ㆍ정치학)는 학생들의 변화를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올해 처음 마련한 제1회 관악민주강좌(4월7일~6월2일화ㆍ목요일)에서 소련 사회주의 붕괴와 중국 및 북한 사회주의의 현실을 강의하는 최씨는 지난해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서울대에서 당시 소련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는 시사강좌를 가졌었다. 그때 2천여명이 몰렸다. 그 1년 후, 현실 사회주의권의 변화를 분석·전망하는 민주강좌에는 2백여명이 참석한 것이다.

 

“유행 뒤쫓는 학문풍토 문제 많다.”

 최씨는 이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의 내용이나 미래가 부실하다고 학생들이 판단하는 것 같고, 사실적 자료에 대한 접근을 기피하고 대신 정치적 노선이나 이데올로기만을 평가하려는 경향, 그리고 지식인사회의 유행병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같은 민주강좌에서 철학을 담당한 김창호씨(서울시립대 강사)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줄고 사회 발전에 대한 낙관론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진지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치ㆍ사회학 분야의 소장학자들이 많이 흔들리는 편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를 사회과학의 특수한 성격으로 풀이한다. “역사학이나 철학은 오랜 연구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사회과학은 화려한 포장이 가능하고 단기간에 명망가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많은 소장학자들이 언급했듯이, 사회과학분야의 진보적 소장학자들은 대학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계기로 학문풍토의 ‘경박성’을 반성하고 있다.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난해 귀국한 김호균씨(중앙대 강사)는 “진보적 학문이 자리잡지 못한 데에는 진보적 학자 자신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로 말했다. 서구의 유행이론을 도입해 답습하면서 새로운 현실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이론들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 학문적 직무유기가 사회의 보수화를 가져오는 데 어느 정도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한면희씨도 지식인 사회의 특수한 분위기를 비판한다. 한씨에 따르면 국내에 들어오는 서구 이론들은 본고장에서 결실기에 있을 때 유입되는 경우가 많다. 이 이론들에 국내 학자들이 달려들다 보면 서구에서는 퇴조 국면이 나타난다. 결국 국내 학계는 손을 떼고 이내 다른 신사조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이 악순환은 학문적 축적을 이루지 못한다. 한씨는 사회 변화에 밀려 사회과학 연구가 주춤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당장의 사회적 활용가치에 연연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진보적 민간연구소 역할 기대한다.”

 대학에서의 입지 약화로 고민하는 소장연구자들 말고도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기력해진 세대들이 있다. 바로 진보적 강사의 후배들인 석ㆍ박사 과정 재학생들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석ㆍ박사 과정을 마치고도 논문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 논문이 통과된다 해도 보장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배들의 뒤를 성실하게 따라갔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앞에 아무도 없음을 발견했다”고 허탈해 한다. 대학원 신입생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진보적인 강좌의 폐지와 축소, 그리고 소장연구자들의 혼돈은 대학마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등 분야마다 또 편차를 보인다. 신광영 교수(한림대ㆍ사회학)는 “사회학계의 경우 특정한 세계관을 가졌다고 해서 진로가 차단된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신규 교수 채용이 줄어든 구조적 문제가 더 크다”고 말했다. 정치ㆍ경제학이 문제인 것이다.

 지식인 사회의 전반적인 위축과 맞물려 암중모색하는 소장학자들은 최근 새로운 몸짓을 보이는 민간연구소와 학계를 주목하고 있다. 지난 4월11일 한국사회연구소와 한겨레 사회연구소가 한국사회과학연구소로 통합ㆍ발족했고, 이보다 앞서 진보학계의 중견학자들이 모여 동인을 결성하고 학술지 ≪이론≫창간을 앞둔 것이다. 이외에도 대학원의 과 차원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개발해 소장연구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나, 아직 성과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국학파’를 태동시키려는 배병삼씨(경희대 강사ㆍ정치학) 등의 노력 또한 젊은 사회과학연구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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