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세 약소국의 '동병상련'
  • 부다페스트 ·김성진 통신원 ()
  • 승인 1992.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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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폴란드·체코 6백50여년 만에 정상회담 … 유럽공동체 가입에 목매

 

 부다페스트에서 다뉴브강을 거슬러 50㎞정도 올라가면 절경으로 이름 높은 비셰그라드가 나온다. 강기슭 높은 산 위에는 이제 폐가가 되다시피한 고성이 아득히 보이고 그 아래쪽으로는 한때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건물 흔적이 무성한 나무 사이사이로 보인다.

 이곳은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비지만 한때는 유럽 역사에서 동양과 서양의 칼이 맞부딪친 전쟁터였다. 칭기즈칸이 중원을 호령하던 1242년 그 예하부대 중에서 잔인하기로 악명을 떨치던 타타르족이 비셰그라드를 유린했다. 2년 동안 헝가리 사람 절반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이 같은 국난을 극복하는 데는 1백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 상징적인 행사가 1335년 비셰그라드에서 열린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현 체코)의 3국 정상회담이었다. 당시 헝가리왕이던 찰스 1세(헝가리어로는 로베르트 카로이왕)가 폴란드의 카시미르 1세와 보헤미아의 존왕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동유럽 최초의 3국 정상회담에서는 당시 합스부르크제국이 실시한 일련의 보호무역에 관한 대책 등 상호관심사가 논의되었다. 세 나라는 합스부르크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하는 한편 역내 무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무역관세 폐지를 결정했다. 또한 세 왕은 정기적으로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해묵은 갈등 속 '3국 협력' 모색

 그러나 주현 강대국의 야욕에 늘 약소국으로서 설움을 겪어온 것이 세 나라 역사였다. 비셰그라드의 합의사항도 끝내 실행되지 못했으며 3국 정상의 회동마저 단절되었다. 3국의 정상회담이 다시 열린 것은 동유럽 개혁이 가닥을 잡은 지난해 5월. 비셰그라드에서 1335년 이래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어 세 번째 회담은 지난 7일 프라하에서 열렸다. 첫 정상회담이 열린 지 무려 6백56년 만에 후속회담이 열리는 진 기록을 세운 것이다. 당시 언론은 앞을 다투어 "역사는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되풀이 된다"는 경구를 인용했으며 회담의 내용보다는 6백50여년 만에 되풀이 된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해 비셰그라드 회담은 첫 정상회담의 관례에 따라 헝가리의 초청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헝가리의 아르파드 곤츠 대통령과 요제프 안탈 총리,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대통령과 마리안 칼프 총리, 그리고 체코에서는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과 비에레츠키 총리가 참석한 이 회담은 '3국협력선언'을 채택한 뒤 하루 만에 끝났다. 지난 7일의 프라하 정상회담도 공동선언문을 통해 서로 긴밀히 협력한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세 나라는 민주주의 및 시장경제를 확립하고 유럽통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원칙에는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이 목표를 자력으로 이루기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문제가 적지 않다. 바웬사 대통령은 헝가리의 일간지 〈넴사바차그〉와 가진 회견에서 세 나라 사이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모든 문제에 공동대처해 나갈 것임을 낙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관측통들은 우선 헝가리와 체코 간에 해묵은 긴장이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슬로바키아 공화국에 거주하는 헝가리 소수민족에 대한 박해가심해지고 있는 것을 헝가리 측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며, 과거 1천여년간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던 슬로바키아측은 헝가리가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야욕을 가진 것으로 간주해 헝가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다. 게다가 비셰그라드 북쪽의 다뉴브강에 양국이 공동으로 건설 중이던 수력발전소 문제를 놓고 심각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도 양국 협력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헝가리측은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공사를 중단했지만 이미 20억크라운(약 6천7백만달러)을 들여 반 이상 공사를 진행한 체코측이 공사강행을 주장해 양국의 주요 현안으로 남아 있다.

 프라하회담을 마친 안탈 헝가리 총리는 세 나라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세 나라는 마치 유럽공동체(EC)의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와 같다. 수술이 가까워 왔을 때 서로를 위로해주면 그만큼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 유럽공동체 정회원 가입에 목을 매고 있는 세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서로를 격려하는 것뿐 다른 구체적인 합의가 있을 수 없는 실정을 반영하는 말이다.

 역사는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되풀이된다. 동유럽 3국은 정상회담을 6백여년 만에 부활시켜 역사를 되풀이했지만 약소국으로서의 역사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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