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양심으로 인권 지키는 ‘여걸’
  • 파리.양영난 통신원 ()
  • 승인 199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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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시몬느 베유 장관 ‘외국인 규제법’ 반대

프랑스의 좌.우 동거 정부가 출범한 지 1백여일. 새 내각 출범 뒤 충분히 예상됐던 불협화음이 전혀 뜻밖의 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좌파의 수장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 사이에 마찰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밀월이 아직도 유지되는 반면, 중도파.우파 연합정부 및 여당 내의 갈등이 점점 노출되기 때문이다.

 시몬느 베유 보건.사회.도시문제 장관(65)은 피에르 메뉴리 법무장관과 더불어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신정부가 이번에 국회에 내놓은 외국인 출.입국 강력규제법안에 제동을 걸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푸근한 어머니 상을 지닌 정치가로 인식되는 시몬느 베유 장관은, 외국인이라면 모두 수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번 법안은 인권 종주국인 프랑스의 오랜 전통과 상반된다는 이유를 들어 재검토를 요구했다. 40년간 정계에 몸담아 오면서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집단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 온 시몬느 베유 여사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남 프랑스 니스에서 부유한 유태인 건축가의 딸로 태어난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부모.형제를 잃고 용케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후 법학을 공부하고 파리 정치학교에 입학해 동기생인 앙트완느 베유와 결혼했다. 슬하에는 아들만 셋이다. 변호사가 되려던 꿈은 “아내가 건달들이나 변호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강력한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지만, 베유는 끈질기게 남편을 설득해 57년 법무부 사법관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시몬느 베유와 소외 계층과의 인연은 당시 법무장관이던 프랑수아 미테랑 밑에서 교도소 업무를 관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작 시몬느 베유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 된 것은 74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그를 보건.사회.도시문제 장관으로 임명하면서부터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법시되어 온 인공유산을 자유화하는 법안(일명 ‘베유 법안’)을 놓고 보수적인 남자 국회의원들과 격앙된 토론을 벌이는 광경이 텔레비전에 방영되면서 시몬느 베유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현재 파리 시장인 쟈크 시락이 당시 낙태자유화 법안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을 가리켜 ‘손잡이 떨어진 가방 만큼이나 무용지물’이라고 분개하면서 시몬느 베유를 두둔한 일화는 유명하다. 구색 맞추기 위해 앉히는 여성 장관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벗어던지고 성깔있고 말발 세고 심지 굳은 장관으로서 이미지를 굳힌 셈이다. ‘그가 텔레비전에서 발언을 했다 하면 시청률이 갑자기 오른다’는 신화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효력을 잃지 않고 있다.

 술수나 책략이 따르게 마련인 정치계의 속성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지스카르 대통령은 베유에게 유럽의회 선거를 지휘하도록 제안했다. 여론조사에서 항상 최상위권에 있는 그의 인기를 감안한 조처였다. 가족의 비극을 통해 나치의 악몽을 몸소 경험한 그로서는 평화로운 유럽을 건설하는 일이야말로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였다. 지스카르의 제안을 쾌히 승낙한 시몬느 베유는 선거에서 압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유럽의회 의장직(79~82년)에 올랐다.

“베유의 남편으로 불리는 게 자랑스럽다”
 서유럽 전역으로 활동 무대가 넓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프랑스 정계로부터는 소원해 진 듯한 시몬느 베유는 발라뒤르 총리가 제안한 보건.사회.도시문제 장관직을 수락하기까지 오랫동안 망설였다. 유럽의회 의원직보다 언동에 따른 제한도 많고, 특히 중도적 노선인 자기와 정치적 감수성을 달리하는 우파 동료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장관직에 오르는 것이 마치 양심을 팔아넘기는 행동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생각인들 다 무슨 소용이냐는 아들들의 충고는 시몬느 베유로 하여금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게 했다. 소외 계층의 하나인 외국인에 대한 차별 의지를 담은 법안에 그가 소리 높여 반대하고 나선 것도 양심을 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 같다.

 자기가 세운 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시몬느 베유의 면모는 일상 생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유태인 포로 모임에는 반드시 참석하며, 매주 토요일 손자 손녀 등 온 가족이 모이는 점심식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취소하는 법이 없다.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는 어린 손자들에게 무한히 관대하다고 한다.

 실업가인 그의 남편은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우파요,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좌파며,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중도파라는 평을 듣는 유명한 자기 부인에 대해 ‘시몬느 베유의 남편’이라고 불리는 것이 몹시 자랑스럽다고 공공연히 털어놓는다.
파리.梁永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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