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페미니즘 파종 시작됐다
  • 송준 기자 ()
  • 승인 199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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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 제3세대, 대중에 파고들어



 페미니즘(여성주의, 여성해방론·여성학·여성운동 등을 아우름)의 해일 밀려오고 있다. 최근 생활·문화·예술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페미니즘의 기조는 하나의 새로운 사회심리적 경향을 형성한다.

 방송은 그 맨 앞에 선다. <서른한살의 반란>(KBS2) <사랑의 조건>(sbs) <폭풍의 계절>(MBC) <들국화>(KBS1) 같은 연속극은 예외없이 극중 인물의 입을 빌려 여성해방론을 펼치거나, 아예 여성 문제를 주제로 다룬다. 주부를 대상으로 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여권 문제를 끌어들인 지는 이미 오래다.

 광고에서는 남녀평등이 진작 실현된 듯하다. 가사를 분담하는 남편, 활동하는 주부상, 남학생을 차고 때리는 여학생, 심지어 남성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여성에 이르기까지 광고의 세계는 여성해방의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이밖에 여성 문제를 쉽게 풀어 쓴 소설·비소설 단행본이 올해 들어서만 20여 권 출간됐고, 영화·연극·무용·비디오아트·행위예술 같은 분야에서 여성주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등장하여 ‘페미니즘 예술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80~81쪽 기사 참조).

 이같은 경향은 일단 ‘페미니즘 대중화’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기왕의 여성해방 논의는 지식인 위주로, 여성학이라는 인식 체계에 기대어 진행돼 왔다. 이에 견주어 문화·예술이라는 옷을 입고 등장한 최근의 여성주의는 학교와 강의실을 벗어나 일반 대중에게로 성큼 다가선 것이다. 한 소장 여성운동가는 “마침내 풀뿌리 여성주의의 씨 뿌리기가 시작됐다”라고 말했다.

 대중화를 빌미로 페미니즘이 상품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페미니즘을 내세우는 광고가 상품화의 대표적 예이다.(79쪽 상자 기사 참조). 연극·영화·소설 앞에 쉽사리 갖다붙이는 ‘본격 페미니즘 ○○’이라는 과대포장이 또한 그렇다. 김소영씨(한림대 강사·영화학)는 “본래의 여성해방이란 의미와 관계없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거품처럼 부풀어오른 것 같다”고 말한다.

 대중화든 상품화든, 이제 페미니즘은 우리 생활과 문화 속에 뚜렷한 하나의 현상으로 등장했다. 왜일까.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페미니즘이 거세게 등장하게 됐을까.

 여성학자들은 우선 여성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성 문제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부천서 성고문 사건·화성 연쇄살인·주부 납치 인신매매단·김부남 사건 등 각종 성폭력 사태가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여성주의 확산 이끈 ‘핵가족 현상’
 가족계획(61년)으로 70년대 이후부터 두드러지지 시작한 핵가족 현상은 여성주의가 확산된 매우 중요한 변수로 꼽힌다. 이는 곧 교육열로 반영되었다. 유치원·학원 등에서 남녀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조기 성교육을 받은 신세대들은 성에 대한 편견에서 미리 벗어날 수 있었다.

 70년대까지도 우리 사회에는 남녀 차별이 심했고, 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차별은 남매 사이에까지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전통적 가족관이 지니는 통념에 기인한다. ‘탁아제도와 미래의 어린이 양육을 걱정하는 (학자들의) 모임’이 펴낸 《우리 아이들의 육아현실과 미래》(한울 펴냄)는 이러한 통념 속성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조에 완성된 가부장중심의 가족제도는 임진왜란·일제 식민기·한국전쟁 등 혼란기를 거치면서 ‘생존을 위한 최소단위’로 전락한다.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 이기적·배타적 가족주의 앞에는 이웃도 사회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급기야 가족주의는 ‘가족제도가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해 구성원이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는 통념으로 굳어진다. 아들은 확실한 직장을 얻기 위해 교육의 혜택을 받지만, 딸은 아들이 교육을 마칠 때까지 공장으로 식당으로 일을 나가야 했다. 그리고 이 차별과 희생은 가족의 생존이란 명분 아래 당연시됐다.

 이같은 성차별은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해 있었다. 이에 대해 문제 제기가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은, 여성이 대거 대학에 들어가는 시기와 일치한다. 82년 이화여대 대학원이 처음으로 여성학과를 개설한 뒤로 여성학 강좌는 전국 대학에 점차 보편화 됐다(《시사저널》 제60호 참조).

 한국여성연구회(회장 정현백) 한국여성연구소(이화여대) 아시아여성문제연구소(숙명여대) 및 각 대학 여성연구소에서는 성차별 및 여성 억압 구조를 체계적으로 연구·분석하고 그 성과를 책으로 펴냈다. 연구 결과는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학습되었고, 비로소 여성 문제가 사회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여성해방운동의 중요한 변별점에 해당한다.

 한국 여성해방운동의 효시는 개화기의 신여성, 또는 일제 식민기의 근우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의미의 여성운동 1세대는 가족법 개정운동을 밀어붙인 이태영 한국가정법률사무소장과 이효재 교수(이화여대·사회학) 등이다. 이들은 몸소 투쟁하고 정책적 대안을 추구하는 한편, 외국 이론을 들여와 여성 문제를 학문적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원풍모방·반도섬유·YH사의 여성 노동자들이 벌인 생존 투쟁의 제3세계 여성해방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여성학 강좌를 통해 ‘여성해방의 기수’를 무더기로 길러낸 장필화 정현백 조옥라 조형 조혜정 등 외국 유학파는 제2세대에 해당한다. 이때의 여성해방 논의는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농촌봉사활동이나 노동현장 투쟁을 통해 농촌 여성과 여성 노동자들을 여성주의로 일깨운 것은 또 하나의 성과로 꼽힌다.

 강의실에서 여성학을 학습하고, 민주화 투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가 마침내 문화적 페미니즘을 내걸고 대중 앞으로 나섰다. 제3세대의 등장이다. 이들은 여성운동의 권위자가 아니다. 이들은 정열과 소신으로 무장한 보통 여성일 뿐이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소모임을 중심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이뤄진다. ‘사량’은 카피라이터·학원강사·기자 등 일곱 여성의 모임이다. 이들은 성균관대 여학생회 출신들로, 1년여의 연구·학습을 거쳐 《남성연구》를 펴냈다. ‘사잇소리’는 출판사에서 만난 우현정 윤영효 이경혜 셋이서 사내 성차별에 반발해 결성한 출판기획 모임이다.

 ‘여성을 위한 모임’‘바른 글을 위한 자유기고가 모임(여성분과위)’등의 출판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여성사’(대표 온현정)는 지난해 말 여성 서적을 전문으로 출판하기 위해 문을 연 뒤 지속적으로 책을 내고 있다.

“페미니즘은 인간해방 운동이다”
 변영주 신혜은 김소연 이민아가 주축이 된 ‘보임’은 여성 영화인 모임이다. 올해 완성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페미니즘 영화제’<스핑크스의 수수께끼>(6월28일~7월2일)에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이들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음 작품 주제로 정하고 작업을 준비중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기획한 ‘아이콘’역시 4인방 여성 영화의 모임이다(김 영·손주연·이언경·이 향). 이밖에 각 대학 총여학생회나 단과대학별 여학생회, 여러 노동조합 내 소모임, 여성운동단체 및 종교단체 안의 소모임에서 벌이는 활동도 활발하다. 바야흐로 페미니즘의 생활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량’이《남성연구》에서 지적한 단단한 자기반성은, 여성운동을 한 차원 높인 듯하다. ‘모든 남성을 무자비하게 매도하는 것이 여성운동이라고 착각하는 피해의식에 젖은 여성, 말만 앞세우고 책임지지 않는 여성, 우월의식에 젖어 대중과 호흡을 함께하지 못하는 여성’을 이들은 비판한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여전히 지식인 운동의 한계를 보인다. 주부, 사무직 여사원, 생산직 노동자, 농어촌 여성, 기층 여성의 상당수가 아직도 여성 문제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여성해방론 자체의 한계도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누구나 쉽사리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행동지침이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남성위주의 사회 질서를 대체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조혜정 교수(연세대·인류학)는 “현실에 바탕을 둔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학생들과 함께 몇가지 문제를 실험해볼 계획이다. 직업, 사회문제, 그리고 새로운 가족 질서에 관해 연구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강남식씨(서강대 강사·여성학)는 “삼강오륜과 같은 차원에서 현대적·합리적 윤리강령을 채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하나의 문화’에서는 84년부터 ‘어린이 캠프’‘대학생 캠프’‘가족 캠프’등을 통해 자발적·합리적 새 질서를 실험해왔다. 또 ‘여성문화예술기획’은 한국적 페미니즘을 모색하느라 굿 연구와 ‘가족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기행’프로그램을 병행해왔다.


 이들은 말한다. “페미니즘은 인간해방 운동이다. 남자든 여자든,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한 마음껏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인간해방이다.”
宋 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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