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무너지자 “역시 한 핏줄”
  • 나가오카·채명석 통신원 ()
  • 승인 1991.04.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북 탁구단일팀 ‘융화의 현장’ 동행취재 / 민단·조총련도 손잡고 “반목은 옛말”

 분단 46년만에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한데 어우러지고 있었다. 코리아탁구팀의 2차 전지훈련지인 나가오카시 북부체육관 안은 본대회의 승리를 겨냥한 투지로 꽉 차 있었고 분단의 깊은 곳은 형적을 찾기 힘들었다.

 “남규, 일없어(괜찮아).” 남자팀 주장인 북측 리근상 선수가 연습상대인 남측 유남규 선수의 헛손질을 감싼다. “형, 괜찮아.” 이번에는 유남규가 외친다. 리근상이 유남규의 왼쪽 모서리를 향해서 받아친 외로막기(백푸시)가 살짝 네트에 걸린 것이다.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단일팀 깃발 아래 남북이 하나가 되지 않았던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다. 더욱이 그들은 1년 전 바로 이곳 나가오카시에서 열린 ‘올스타 월드 서킷 일본시리즈’에서 숙명적인 남북대결을 벌였던 라이벌이었다.

 여자팀 주장인 남측 홍순화 선수도 땀에 뒤범벅이된 채 북측 리분희 선수와 쳐넣기(서브)와 받아치기(리시브) 연습을 되풀이한다. 이윽고 리분희의 연습상대는 이미 “정화야” “언니” 사이로 가까워진 현정화 선수로 바뀐다. 리분희와 현정화는 세계 최강의 여자복식 콤비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기에 코리아팀이 그들에게 걸고 있는‘금메달’에 대한 기대 또한 대단하다. 그러한 중압감을 떨쳐버리려는 듯 리분희와 현정화의 연습은 실전 못지 않게 불꽃이 튄다.

 지난 3월25일, 각각 서울과 평양을 출발한 코리아탁구팀의 선수단 56명은 단기인 한반도기가 나부끼는 도쿄 나리타공항에서 하나로 만났다. 도쿄에서 가차로 3시간 거리인 나가노시에서 일주일간의 1차 합동훈련을 성공적으로 끝낸 코리아팀은 4월1일 니이가타현 나가오카시로 장소를 옮겨 10일간의 2차 합동훈련에 들어갔다.

 남과 북, 북과 남의 경계선이 분단 46년만에 처음으로 지워진 코리아팀을 동행취재하기 위해 1차 훈련지인 나가노시를 찾아간 것은 3월31일 오후, 선수단 숙소인 워싱턴호텔은 다음 훈련지 나가오카로 보낼 짐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동질성의 극대화, 이질성의 극소화라는 목표 아래 남과 북의 선수·임원이 노력한 결과, 비록 일주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2백%의 훈련성과를 올렸다고 본다.” 코리아팀의 박도천 공보담당의 첫마디는 이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또 양측선수단이 남과 북의 빗장을 풀고 단시간내에 융화될 수 있었던 것은 “20여년간의 남북 탁구대결을 통해 미운정 고운정이 쌓여온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 선수단이 한데 어우러지는 융화의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남과 북의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박공보담당의 말이 얼른 들어오지 않았다. 그 융화의 현장은 저녁 7시부터 시작된 나가노현의 민단·조총련지부가 공동주최한 환송회였다. 본지는 선수단측의 특별배려로 보도진으로서는 유일하게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용어문제는 2~3일만에 해소
 코리아팀의 김형진 단장(북측)과 김창제 총감독(남측), 그리고 민단·조총련의 두 지부장이 참석한 가운데 선수단 전원이 빙둘러앉았다. 먼저 전 선수·임원의 사인이 들어 있는 흰색 바탕의 푸른색 한반도기가 40여년간에 걸친 재일교포사회의 대립에도 종지부를 찍어달라는 염원을 담아 교포들에게 건네졌다. 이에 감격한 박창두(민단)·허길량(조총련) 지부장은 두 단체가 대림과 반목의 길을 걸어온 이래 처음으로 두손을 맞잡았다.

 선수단도 마찬가지였다. 남측·북측이 따로 따로 마주보고 앉은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섞여 앉아 일주일간의 성공적인 훈련성과를 놓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여자팀의 막내둥이 박해정(18) 선수는 남자팀 막내둥이 북측 김국철(19) 선수에게 ‘스카이서브’는 북한의 ‘던져쳐넣기’, ‘스매싱’은 ‘때려넣기’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탁구용어 해설을 열심히 해주고 있었다.

 여자팀 주장 홍순화는 “처음 합동연습을 시작했을 때 남북의 탁구용어가 틀려 약간 애를 먹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용어문제는 2~3일만에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고 한다. 모두 같은 탁구선수들이고 젊기 때문에 이해력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현정화는 연습이 끝나 숙소에 돌아가면 여자복식 콤비 리분희의 방에 놀러가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가족사진도 함께 나눠보고 있다고 했다. 현선수는 또 남측선수들이 지금 서울에서 유행중인 “피곤한 스타일이야”라는 말을 자주 썼더니 어느새 북측선수들도 이 말을 배우 애용하고 있다고 귀띔해줬다. 연습에 약간 늦거나 성가시게 하면 북측선수가 “피곤한 스타일이야”라고 놀릴 정도로 남북한 선수간에 칸막이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2차 훈련지인 나가오카시로 이동하는 기차 속에서도 남북간의 칸막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북측의 리근상, 남측의 박지현 추교성은 정답게 둘러앉아 트럼프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본에 여덟 번째 왔다는 리선수는 “유남규선수와는 그동안 수차례 대결했다. 그러나 단일팀이 된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리해하고 논의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도록 함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화가 정치성 화제로 비화할 듯하자 그는 얼른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황건동 남자감독과 윤상문 여자감독은 나란히 앉아 주위의 한국기자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북측선수단 중에서는 가장 박학다식하다는 평이 나 있는 황감독이 좌중을 시종 이끌어갔다. 김형진 단장도 김창제 총감독과 나란히 앉아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 서슴없이 으해주었다. 그는 이번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민족의 대잔치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하고, “이번 대회에서 기적적인 성과를 올려 7천만겨레의 성원과 기대에 꼭 부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43일간의 합동훈련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코리아팀내의 남북한 의견 불일치를 최소한으로 줄여가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번 단일탁구팀이 좋은 성과를 올리게 되면 내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의 단일팀 구성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4월1일 정오 무렵, 나가오카시에 도착한 코리아팀은 환영식·오찬회 등을 마치자 다시 4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연습을 속행했다. 김창제 총감독은 2차훈련의 중점목표는 “실전훈련을 통해 개인전술을 보완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이번 훈련은 메달의 색깔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계이기 때문에 주변여건에 개의치 않고 훈련에만 열중하겠다”며 종합우승을 향한 결의를 표명했다.

 이 방침에 따라 선수단측은 2차훈련 때부터 보도진의 선수 개별취재를 엄격히 제한하는 등 컨디션 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선수들에게도 연습중에는 일체 취재에 응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나가오카시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코리아선수단은 다시 정상훈련에 돌입했다. 숙소인 뉴오타니호텔을 9시에 출발한 남녀선수 22명은 약 10분만에 연습장소인 나가오카시 북부체육관에 도착, 9시30분부터 오전 실전훈련에 들어갔다.

 남자팀은 리근상 주장이 “단결”이란 구호를 외치자 모두 힘차게 뒤따라 복창했다. 여자팀은 윤상문 감독이 “힘차게”라고 외치자 전선수가 “단결”을 외쳤다. 선수들은 11개의 탁구대에 나뉘어 양감독으로부터 지시받은 ‘연습메뉴’를 열심히 소화해갔다. 북측의 김명준 선수와 연습을 하고 있던 박경애 선수가 “자 이번에는 언더서브야”하고 말하자 김선수가 조금 멈칫거렸다. 박선수가 몸짓으로 언더서브의 자세를 취해보이자 김선수가 금방 “알갔어”라고 외친다.

 수많은 보도진과 일반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12시경 오전훈련이 끝났다. 다시 남녀선수들이 각각 양감독 앞에 일렬로 정열해 “수고하셨습니다”를 복창한다. 점심을 든 후 약1시간 가량 낮잠과 휴식을 취한 남녀선수들은 다시 3시부터 연습상대를 바꿔가며 구슬땀을 흘렸다.

신바람 난 교포들 ‘통일떡’ 대접
 한편 탁구단일팀의 합동연습을 지원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은 코리아팀의 훈련이 본궤도에 오르자 신바람이 났다. 민단 니이가타 현지부 박영기 부단장은 “통무우로 ‘통일김치’를 만들고, 코리아팀의 단기를 본떠 흰시루떡에 하늘색 한반도 지도를 그려넣은 ‘통일떡’을 만들어 선수단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민단과 조총련의 본대회 합동응원 계획도 서서히 피치를 올리고 있다. 지난 3월22일 40여년만에 처음으로 공식합의문서를 교환한 두 단체는 응원기 1천2백20개를 준비하고 합동응원단을 조직하기로 합의한 바에 따라 실무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응원계획을 짜고 있다.

 이렇게 해빙분위기가 짙어가자 민단중앙본부의 한 간부는“이번 합동응원 계획을 계기로 두 단체는 본국의 정세와는 관계없이 교류를 확대해나갈 것이며, 그것은 결국 남북화해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조총련의 한 관계자도 “남과 북은 물과 기름이 아니라 한데 섞일 수 있는 한 핏줄임을 실감했다”며 이번 합동응원 계획에 큰 기대감을 표명했다.

 일본의 언론도 코리아팀의 합동훈련에 큰 관심을 갖고 그 동정을 쫓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4월3일자 석간에 현정화 선수가 수건으로 리분희 선수의 이마를 닦아주는 사진을 크게 싣는 등 이미 두차례나 관련기사를 보도했다. 또 지금까지 선수단을 취재해간 기자만 해도 연 2백명에 달하고 있어 일본언론의 높은 관심도를 짐작케 해준다.

 4월2일부터 오전 2시간30분, 오후 3시간씩 10일간의 실전훈련을 끝마친 선수단은 11일 본대회 개최지인 지바현으로 이동한다. 최종훈련 단계에서는 예상 대전선수에 대비한 개인 전술훈련에 중점을 두고 마지막 컨디션 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4월24일부터 2주일간 개최되는 제41회 세계탁수선수권대회는 스웨덴·중국·코리아 3팀의 각축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코리아팀은 7개 종목 중 3개 종목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남북단일팀이 상승기류를 타게 되면 종합우승도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